125화 패치워크 (5)
- 철컥!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잠시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분명 약속했지.’
검술 정도는 그냥 가르쳐 준다고 확언했다.
검술 따위보다 네가 훨씬 소중하다는 입바른 소리를 지껄였다.
그때 그녀의 눈빛이 떠오른다.
흠칫 놀라던 몸.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
나를 담은 채 흔들리던 새까만 두 눈 동자.
‘심한 짓을 했군.’
그런데 거의 봐주지 못하고 훌쩍 떠나 버렸다.
편지 한 장 남기고 두 달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었다.
칼을 잡은 레나에게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먼저 갈게요, 스승님.”
“.와라.”
레나는 곧바로 커팅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 피릭!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허리에 찬 철검을 빼, 왼쪽으로 찔러 오는 얇은 칼을 쳐냈다.
한 번 부딪치고 곧장 깨달았다. 나는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강하다.’
그녀의 칼은 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 챙챙챙!
연달아 세 번 소리가 울렸다.
간격도 없이 공격이 몰아쳐 왔다.
가느다란 칼이었지만 강한 힘과 회전이 실려 있었다. 가드의 장식을 이용해 각도를 돌려 가며 세검을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 채채챙!
반 이상 부서진 철검을 세검이 잡아먹듯 휘감아 왔다.
‘곤란하군.’
대충 받아 낸다면, 안 그래도 데미지가 심한 철검이 완전히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 피릿!
레나의 검이 목 쪽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너무 빠르다고.’
철검 손잡이로 검신을 쳐내며 레나의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레나]
[호감도: 34]
- 왜곡된 호감(B): 레나는 당신에게 버려졌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남긴 것들로 인해 크게 성장했지요.
이 과정에서 그녀는 끝없이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내부에 당신의 견고한 이미지를 만들고, 호감도를 계속 키워 갔습니다.
- 당신에 대한 레나의 호감도 가멸어지지 않습니다.
- 호감도가 떨어질 만한 일을 할 경우, 대신 특별한 이벤트가 생길확률이 높습니다.
‘이거 뭐야. 무서워.
[호감도 상한: 60]
[도적 Lv.153[트릭스터 Lv.13]
[사냥꾼 Lv.3]
[어쌔신 Lv.5]
[상인 Lv.5]
[체력: 36]
[힘: 38]
[민첩: 51]
[지혜: 34]
[특전]
재능 (B플러스)
- 레벨 업 때마다 얻는 스탯이 플러스2에서 플러스3까지 보정됩니다.
전투 감각(B)
<하나 더 열린 감각>
이 특전의 소유자는 타인과 완전히같은 스탯을 가지고도, 훨씬 더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 줍니다.
‘.다 개방됐잖아?’
- 채채채챙!
네 번의 검격이 겹치듯 들어왔다.
가속도와 회전력이 섞인 공격을 쉽게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주의! 무기 내구도가 18%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뒤로 두 걸음을 물러났다. 레나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였다.
호감도가 알아서 올라간 데다, 호감도가 올라야 달성할 수 있는 특전도 이미 개방되어 있었다.
‘던전 셋을 다 돌았나?’
함께 던전을 돌았던 때보다도 레벨이 훨씬 높았다.
알려 준 던전을 전부 다 돌고, 혼자경험치를 독식해야 가능한 상승세.
‘초반 차이가 이 정도로 큰 격차로 나타나다니.’
세검이 다시 뱀처럼 사각으로 휘감겨 왔다. 한 발을 디디며 칼을 크게 휘둘렀다.
- 쩌엉!
레나의 몸이 붕 뜨며 뒤로 날아갔다.
- 팟!
하지만 곧 다시 자세를 잡고 더욱 빠르게 다가왔다. 날카로운 칼끝은잔상이 길게 이어져 보일 정도로 빨랐다.
[주의! 무기 내구도가 17% 이하로떨어졌습니다!]
‘이대로라면.,
칼이 금세 부서진다. 힘을 흘려 내기 위해 뒤로 세 걸음을 물러나며 공격을 받아 내는 순간.
- 툭.
등에 담벼락이 부딪혔다.
“스승님. 그만할까요?”
레나가 벽에 부딪힌 내 모습을 보고 주춤거렸다.
그녀가 뿜어내는 투기가 잠시 누그러져 있었다.
나는 레나의 상태창을 꼈다.
‘이대로 끝내면 곤란하지.’
한순간에 제압하려면 검기를 쓰는 편이 좋다. 하지만 위험한 선택이다.
무리하게 철검에 검기를 불어넣다가칼이 깨질지도 모른다.
좋은 꼴은 아니다.
‘그거라면.
나는 다른 방법을 떠올리고 레나를 도발했다.
“아니. 더 빠르게 와 봐.”
“정말입니까?”
“지금 너무 느려.”
“.갑니다!”
- 피리릿!
칼날이 내 얼굴 쪽으로 빠르게 뻗어 왔다. 가장 빠른 속도였지만,
‘흡착.’
- 탁!
날카로운 칼날이 건틀렛에 잡혔다.
쇠와 쇠가 마찰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한 번에 레나의 세검을 빨아들이듯 잡아냈다.
레나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오오!”
챈들러의 감탄사가 들렸다. 호감도가 1 올랐다는 메시지가 허공에 떠올랐다.
“어떻게 저걸 잡아낼 수가.!”
크리스티나의 작은 감탄사도 들렸다. 하지만 느긋하게 즐기고 있을 기분은 아니었다. 아슬아슬했다.
‘.망신당하는 줄 알았네.’
도박이었다. 흡착 스킬을 건틀렛으로도 쓸 수 있을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잘 수련했.
칼을 다시 놓아 레나에게 돌려주려할 때였다.
- 와락!
레나는 내가 잡은 칼을 탁 놓아버린 채 갑작스럽게 나를 안았다.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돌 벽에 가로막힌 상태.
칼을 잡은 왼손을 뒤로 물리는 사이 레나가 품을 파고들었다. 스탯의차원을 떠나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절체절명의 공격이다.
그녀는 내 가슴에 머리칼을 묻으며 허리를 꼭 감싸 안았다.
“크홈.
챈들러가 헛기침을 했다.
“먼저 들어가지. 한바탕 대련을 했더니 피곤하군. 크리스티나?”
“예!”
“얼른 가자.”
챈들러가 넉살을 부리며 여관으로 올라갔다.
레나는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나만 보며 말을 걸었다.
“그렇게 말도 없이 가시다니.
“다시 그렇게 떠나실 거예요?”
인간들을 거리낌 없이 살해하지만,
나에게는 이상하게 부드러운 눈매.
똑바로 나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가 촉촉하다.
“미안하다.”
그녀에게 할 말은 없었다.
레나를 떠난 건, 그녀와 상관없는기스-제-라이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기스-제-라이 본인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 알량한 책임감.
네크로멘서는 내 앞에서 다시 온몸이 벌집이 되어 죽었고, 내 정수 흡수 레벨만 올라갔다.
레나가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미안하실 건 없어요. 역시 제가 쓸모없었으니까 그런 거겠죠?”
입을 다물었다.
“쓸모 있어지기 위해 그동안 무척 노력했어요.”
그때 였다.
- 쏴?아아아아.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줄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몰아붙여져 추궁당하고 있던 참이라, 분위기를 끊는 비가 반가웠다.
레나가 내게 말했다.
“우리도 방으로 들어갈까요?”
“그러지.”
‘탐지.’
나는 안으로 들어가며 여관을 샅샅이 훌었다.
전세를 얻은 건지, 3층짜리 여관에는 1층에 있는 종업원과 첸들러 일행 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품 있고 깔끔한 여관이었다.
입구로 들어갈 때부터 고급스럽고 청량한 나무 향이 났다.
“스미디쉬 원목으로 만든 여관이래요. 추울 때는 따듯하게, 더울 때는 시원하게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신기한 나무죠. 비가 올 때랑 아닐 때랑 다른 향이 나요.”
그녀는 곁에서 나란히 계단을 밟으며 말을 이어 갔다.
“옛 엘프 숲에서는 특별한 나무가더 많았다던데.
“엘프는 멸종하지 않았나.”
“네. 숲과 함께 죽었죠. 박제가 되어 귀족들의 밀실에 전시되어 있거나. 아, 같은 말이구나? 우리 방은 여기에요.”
레나가 문을 열어 준 방은 무척 넓었다. 다섯 칸으로 구분된 방은 열댓 명이 한 번에 묵어도 될 것같은 곳이었다.
테이블과 침대를 비롯해 여관 곳곳에 배치된 시설과 물건은 하나하나가 모두 깔끔하고 세련된 기품을 뿜어냈다.
[회계 Lv.l이 작동합니다!]
[숙련도가 미세하게 올라갑니다!]
자연스럽게 스킬이 발동됐다. 한눈에 훌어봐도, 어지간히 부유하지 않고는 묵지 못할 여관으로 보였다.
세련된 욕실만 해도 웬만한 여관의 로비만 했다.
욕실 창문에서는 오래된 나무와 돌조각들, 작은 연못이 있는 뒷마당이한 번에 내려다보였다.
“동방 스타일의 여관이에요. 챈들러 남작이 좋아하더군요.”
“그가 잡은 건가?”
“네. 여관을 전부 다 빌렸어요.”
“능력도 좋군.”
“차기 영주니까요. 유일한 후계자에, 영주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라고 한다던데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 자식이, 동방으로 무사 수행을 가겠다는데 막지 않은 건가? 가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뭐. 뜻을 존중한다는 건가.’
적당히 의문을 홀려 보냈다. 크게신경 쓸 만한 건 아니었다. 그보다 아까부터 레나의 안색이 심상치 않다. 말은 잘 하고 있지만, 몸짓과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혹시독 같은 거에 당한 걸까?
‘탐지.’
나는 그녀의 상태를 훌었다.
‘심장이 빠르게 턴다.’
‘호흡도 살짝 가파른데.’
그리고 몸짓이 조금씩 경직되고 있었다.
밖에서는 이러지 않았는데, 나와 둘이서 방 안에 들어오자 몸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괜찮은가?”
“.네? 아, 네! 괜. 찮은데요?”
조금씩 굳어 가는 분위기가 약간어색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달각! 달각!
주머니 안에서 새끼 늑대 해골이 움직였다. 레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 안에 든 거 뭐예요?”
“그게.
녀석이 밖으로 획 뛰쳐나왔다.
“어이쿠.”
엉겁결에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레나의 심상치 않은 안색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터라 다른 데신 경 쓰지 못한 것이다.
“뭐. 그냥 늑대 해골이다.”
‘레나 앞이라면 상관없겠지.’
녀석은 발치를 빙빙 돌았다.
“이것 좀 봐. 이리 와 볼래?”
레나는 놀라지 않고 놀자는 듯이 손을 뻗었다.
테이블 밑에 숨은 녀석이 목을 내밀어 이를 부딪쳤다.
- 딱딱! 딱딱!
“도망가 버리는데?”
“잡을 거거든요? 압!”
레나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늑대를 잡는 시능을 했다. 녀석은 안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몸을 내밀고 달그락거렸다.
‘좀 귀엽군.’
“어쭈? 도망치네? 이리 온? 안 잡아먹는단다? 이 압!”
레나는 달그락거리는 녀석과 테이블을 둘러싸고 몇 바퀴를 돌았다.
‘저거. 혹시 일부러 안 잡는 건가?’
그나저나.
굳어 있던 레나의 안색이 갑자기좀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런 귀여운 애를 어디서 구해 오셨어요?
레나가 훨씬 풀어진 얼굴로 날 보며 말했다.
”그냥 산에서 주워 왔지.”
“일으킨 거예요?”
“그래.”
- 달각! 달각!
테이블 아래 숨어 있던 녀석은 레나가 자길 잡으려 하지 않자 터덜터덜 밖으로 나와 가만히 엎드렸다.
레나가 늑대 해골의 척추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두 달 동안 뭘 하셨나 했더니. 이름은 뭐예요?”
“이름이 필요한가?”
“당연하죠! 안 지어 주셨구나. 밤톨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밤톨?”
“네. 두개골이 밤톨 같은걸요.”
그 순간이었다.
- 띠링!
[‘작은 새끼 늑대’ 해골을 ‘밤톨’
이라고 명명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뭐, 그러지.”
나는<예>에 눈길을 보내 승낙의 의사를 표시하며, 레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띠링!
[’작은 새끼 늑대’ 해골의 이름이‘밤톨’이 되었습니다.]
[밤톨이가 자신의 이름을 좋아합니다.]
[<뼈의 군주>의 숙련도가 약간 올라갑니다.]
[호감도가 3 상승합니다.]
[민첩이 1 상승했습니다.]
[이름: 밤톨]
[늑대 Lv.l]
[체력: 8]
[힘: 6]
[민첩: 10] (new)
[지능: 7]
[진화 확률이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이름 부여에 의해 자율 E랭크를 획득합니다.]
‘스탯까지 올라가는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이름을 지을 걸 그랬나?’
이름.
많은 것은 하나의 이름을 가진다.
레나도, 루비아도 그렇다.
늑대도 그렇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고 마음을 만든다.
기록에 남고 비석에 남는다.
내 이름은.
- 달그락!
문득 소스라치는 기분이 들었다.
[동화율이 낮아집니다!]
[동화율: 81.13%]
- 철컥.
테이블을 짚었다.
“괜찮으세요?”
레나가 말을 걸었다.
“아. 그냥 좀 귀여워서.”
“밤톨이요? 완전 귀엽죠. 헤햇.”
레나가 새끼 늑대 해골을 몇 번밤톨아, 라고 부르며 쓰다듬었다.
- 달각! 달각!
늑대는 그 이름에 반응하듯 레나의 품에서 마구 꼼지락거렸다. 잠시 후레나가 안색을 가라앉혔다.
“스승님.”
그녀의 눈빛이 문득 진지해졌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스승님이 어떤 분인지, 뭘 하시려는 건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일단네크론을 뜯어 버리시려는 건 맞죠?”
레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지금 와서는 그 목표가 다소 퇴색되었다고는 해도, 처음에 레나와 그렇게 이야기했다.
“역시 낮은 권한으로 놈들에 대해 알아보기는 찜찜하더라구요. 열람기록이 읽히니까. 그래서 말씀드린 대로 지부장이 되는 거에 초점을 맞춰서 활동했어요.”
“그런가.”
잠시 잊고 있었다.
눈앞의 이 여자를 T&T의 지부장으로 만들기로 했다.
<네크론 신사회요? 놈들에 대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제 길드 등급이 올라가면 됩니다.
T&T의 지부장은 기록 없이 정보를 열람할 수 있거든요.>
그게 처음의 대화였다.
우리의 기본 관계다.
회귀를 반복했기 때문에, 잠시 나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또 하나 잊고 있는게 있었다.
내게 주어진.<시나리오>.
‘상태창!’
상태창을 열고 한참을 뒤적였다.
오랫동안 열지 않아 어디 있는지도 잊은 시나리오 창을 열었다.
雄급 시나리오, ‘레나 이야기’가 열립니다.>
<그녀를 T&T 길드 지부장에 앉혀보세요! ‘어둠 속의 조력자’ 시나리오가 활성화됩니다.>
이 시나리오를 달성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예전에는 그게 궁금해서라도 레나를 지부장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는 T&T 내부, 푸르손의 추종자들에게 살해당해 실패했지만.
‘지금이라면.’
레나의 이 정도 성장 속도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레나가 말을 이어 갔다.
“일단 헤어진 첫날, 정식 회원으로 등록했어요. 실적을 쌓아서 벌써 한번 승급을 거쳤고요.”
“훌륭하군.”
그 정도면 예전보다도 훨씬 더 빠른 속도였다.
“스승님 덕분이죠. 그래도 이런 식이면 5년은 있어야 바라볼 수 있겠더라고요. 짜증나게 연차 제한이라는 게 있어서. 대신 좋은 걸 찾았죠.”
툭.
레나가 품에서 낡은 책 하나를 꺼냈다.
“오늘. 성문에 못 나가서 죄송해요. 딱 맞춰서 환영해 드리고 싶었는데. 이걸 구하느라 늦었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