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패치워크 (6)
레나가 품에서 꺼낸 책은 한눈에 봐도 무척 오래된 것이었다. 하지만 보관 상태는 좋았다.
‘밀봉되어 있었나.’
레나는 책의 표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첫 페이지를 펼쳤다.
<트로핀 나나우, 여기에 길드 규칙을 남긴다.>
독특한 글씨체로 쓰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적어도 백 년의 세월을 지나온 둣,
종이는 누렇게 바랬지만 아직 글자에는 힘이 남아 있었다.
“트로핀. 나냐우?”
“T&T 두 창립자 가운데 하나죠.
그가 남긴 룰북이에요.”
그녀가 내게 말했다.
‘또 변했군.’
중요해 보이지만, 분명 처음 보는 책이다. 저번 생에서 레나는 이런 책을 손에 넣은 적이 없었다.
미래가 변했다.
세계선이 변했다. 아마 이제부터 과거의 기억 같은 건 쓸모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녀는 책을 내 쪽으로 기울인 채,
가운데를 펼치고 손가락으로 한군데를 짚었다.
“여길 보세요.”
<지부장의 자격과 임명>이라는 조항이었다.
.다음 두 가지에 해당하는 자 가운데, 소속 지부장과 다른 지부 장두 명의 제청으로.
- 5년 이상 T&T에 몸담은 자.
- 실적 수치가 1, ???을 넘은 자.
“5년이라면. 어떻게든 안 되는 거아닌가?”
“아래를 보세요.”
그 밑의 여백을 바라봤다. 종이 맨 아래쪽에 깨알 같은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단, 루-륨 100ml를 가져오는 자는 그 즉시 지부장 대우를 한다.>
추가된 수칙인지 뭔지, 장난처럼작게 적혀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도통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형식은 정확했다. 크기가 작을 뿐뜯어보면 글씨체도 같았다.
“루. 륨?”
“마력 액이에요. 엠버에서 동력원으로 쓰는 물건이죠. 생산은 불가. 수집만 가능. 효율이 무한정에 가까운 귀중한 에너지원이에요.”
“그럼 이 조항은 엠버를 위해서 만들어진 건가?”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요. 트로핀 나냐우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조항을 만들었는지는 캐 봐도 안 나오더라고요. 저도 궁금하니까, 지부장이되면 알아볼게요. 헤햇.”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구하러 가자. 말을 구해야겠군.”
“아,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라스미어에 있어요. 루-름을 동력원으로 작동하는 것들이.”
“설명해 봐라.”
“이 도시엔, 골렘들이 지키는 지하던전이 있거든요.”
문득 깨달았다. 성문 앞에서 만난진네이의 말이 떠올랐다.
<크흠! 한때 남부를 지배하던 주술사가 있었소.>
<무덤을 지켜 줄 강철 골렘들을만들기 위해서요.>
“혹시, 지금 주술사의 무덤을 지키는 골렘들을 말하는 건가?”
- 꿀꺽.
레나가 침을 삼켰다.
“알고 오신. 거예요?”
그리고 무척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아니. 그냥 여행자에게 주워들은 전설 수준이지.”
정말 그런 던전이 있다면 굳이 레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단 나부터도 관심이 간다.
골렘은 마력으로 작동한다. 하지만골렘이 마법을 쓰는 건 아니다.
마법의 재능이, 아케인 하트가 있을 리가 없다. 동력원은 따로 있다.
레나의 말에 따르자면 골렘의 동력원은 루-륨.
그 원리를 파악한다면-
‘아케인 하트가 없는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을까?’
마법을 쓰게 될 실마리를 거기에서 찾는다. 미약한 가능성이지만, 시도할 가치는 당연히 있다.
레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꼭 가보고 싶은 던전이다.
하지만 진네이의 말에 따르면 와본 모험가가 하나둘이 아니다.
다들 무덤을 찾아 도시 주변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그럼 그냥 전설일 확률이 높다고 레나에게 말했을 때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한 번도 안 건드린 곳이 있죠.”
“.그게 어디지?”
레나가 씩 웃었다.
“이것 좀 보시겠어요?”
그녀가 능숙한 손길로 배낭을 뒤적였다. 그리고 길다란 종이 세 장을 꺼냈다. 지도였다.
- 휘리릭.
큼지막한 지도가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그라스미어 전체가 표시된 지도였다. 건축 설계부터 지하 하수도까지 빼곡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다 돈이 부족하더라고요. 특히 행정관들이 그래요. 건축기획과나, 수도사업본부나.”
돈을 줬다고 해서 이런 걸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자금을 꽤 넉넉하게 주고 갔다고 한들, 고작 두 달밖에 안 된 일이다.
놀라울 정도의 수완이었다.
“여길 보세요.”
레나가 손가락으로 지도 가운데를스르록 훌었다.
“성. 인가?”
지도 전체에서.
백작이 지배하는 내성 부분만 텅 비어 있었다. 나는 한 번에 레나가 말하려는 걸 알아차렸다.
“지금 팬 들러 가문이. 그 던전과 엮여 있다는 뜻인가?”
“분명해요. 일단.
레나는 영주의 내성 지하에 던전이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하나씩 중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주가 직접 관리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돈을 꽤 풀어서 알아봤는데,
지하로 들어가 본 사람이 아예 한명도 없었어요.”
“한 명도?”
“네. 정말 이상하죠? 일하다 보면,실수로라도 한 번쯤은 들어가 보기마련인데.”
설명이 쭉 이어졌다.
그녀의 말을 하나씩 듣다 보니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수상하군. 그동안 아무도 안 건드린 건가?”
“영주가 관리하는 내성 지하예요.
웬만한 무력 집단은 다 그라스미어에서 무기를 공급받을 텐데, 괜히건드려서 갈등할 이유가 없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던전과 엮여 있는 가문이라. 정말 악마에게 무기 제조법이라도 배우는 건가?”
그때 였다.
- 똑똑.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흠칫 놀랐다. 잠시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 똑똑.
“.들어가도 되겠소?”
챈들러의 목소리였다. 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감도 좋네.”
그녀는 내게 보여 줬던 지도를 말아서 배낭에 집어넣었다. 나는 어느새 축 잠들어 있는 밤톨이를 안아서자루 안에 살짝 집어넣었다.
“이제 오라고 해.”
“아, 들어오세요!”
: 르륵.
문이 열렸다.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남자가 얼굴을 비췄다. 뒤에는 챈들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크리스티나가 말없이 서 있었다.
‘들었을까?’
레나의 이야기에 지나치게 집중한탓에, 다가오고 있는 걸 신경 쓰지 못했다. 방이 워낙 넓은 데다 문과테이블 사이에도 칸막이 두 개가 있다. 듣지 못했을 가능성도 높다.
‘탐지.’
반사적으로 챈들러를 체크했다. 하지만 별달리 수상한 기색은 없다.
영주의 내성에 골렘 던전이 있다면, 과연 이 녀석은 알고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던전을 내성에 숨겨서까지, 챈들러 가문이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같이 식사하시지 않겠소?”
레나와 눈이 마주쳤다. 레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지.”
그러자 내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둣, 종업원들이 차례로 음식접시를 나르기 시작했다.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호박색 수프 그릇을 시작으로 인간의 음식이 차례대로 놓이기 시작했다.
‘전부 기다리고 있었군.’
“안 드시오?”
나는 챈들러의 물음에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배고프지 않다.”
“아, 그럼 배고플 때 드셔야지. 먼저 실례하겠소.”
의외로 권유는 없었다.
살짝 뒤로 앉아 그들을 관찰했다.
레나는 방금 전까지 수상한 둣 말하고 있던 챈들러도, 크리스티나도자연스럽게 환대했다.
역시 그녀답다고 할까.
기본적으로 대화 능력이 무척 탄탄했다. 고개를 끄덕거리고 눈을 반짝이며, 상대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능력이 뛰어나 보였다.
며기 공자님은 스승님을 참 좋아하나 봐요.”
“그렇소!”
“스승님께서 주신 제작 패를 제가 쓰자마자 무서울 정도로 절 쫓아오시고.
“하하하핫. 그거야.
챈들러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식사에 반주를 곁들였다. 촉촉한 와인 향기가 퍼져 갔다.
권하려는 둣 슬쩍 내 쪽을 쳐다보는 챈들러에게 손을 저어 거절했다.
“스승님이 오시길 이분이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몰라요. 질투 날 정도였다니까요. 저 성을 지배할 차기영주가 경쟁자라니.
레나가 챈들러의 속내를 떠보려는 듯 흘끗 성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챈들러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분명히 마음에 무언가 거리끼는 게있는 태도였다.
“물려받는 성이라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하겠소. 자신이 두 손으로 해낸 게 중요하지. 그런 면에서. 존경하고 있소이다.”
“나에 대해 모르지 않나.”
“검을 쥔 자는 검으로 말하고 검으로 생각하지. 검을 맞대다 보면 열홀 밤을 나눈 것보다 더 깊이 상대에 대해 알게 되지요.”
검술 지상주의자 같은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의 남자가 날이 정도로 좋아할 이유는 없다.
레안드로 후작 같은 격외급 강함을 보여 준 것도 아니다.
지금 내 수준은 이사벨 정도지만,
유블람 가도에서 첸들러와 맞붙었을 때는 그보다 훨씬 약했다. 근위대를두 번째로 흡수하기 전이었으니까.
‘무슨 속셈이 있는 거지?’
적당히 쓸모없는 환담을 나누는 레나와 챈들러를 흘끗 바라봤다.
식사는 거의 다 끝나 가고 있었다.
‘수상하지 않게. 가기 전에 얼굴한번 보여 줄까?’
물론 마스커레이드를 쓸 생각.
레나는 놀랄 거다.
내 정체를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자리에서 티 내지 않을 정도의 판단력은 충분히 있다.
‘마스커레이드.’
스킬을 쓴 뒤, 투구를 벗으려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이었다.
“스승님.?”
벗기 전 레나가 잠시 흠칫했다. 그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우스운 건 챈들러의 반응이었다.
나를 계속 곁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 역시 흠칫했다.
‘왜 그러지?’
- 철컥.
나는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챈들러가 깜짝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내 모습을 아는 레나는 몰라도, 챈들러까지 놀랄 이유는 전혀 없다.
날 처음 보는 크리스티나는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가면무도회 활성중!]
[짧은 시간 동안 얼굴에 ‘인간’의모습을 덧씩읍니다.]
[남은 시간 - 09:43]
“아.!”
귓속말을 해 둔 덕분인지.
레나는 납득하고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챈들러의 반응을 이해할 수없었다. 그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예상과 다른 무언가를 보는듯한 태도.
“왜 그러지?”
“아니오, 그냥. 투구를 벗는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서.”
챈들러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아무래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태도였다.
챈들러는 백색 포도주 한 잔을 쭈욱 들이켰다.
아무래도, 향취도 즐기지 않고 취하기 위해 들이켠 것 같았다. 셔츠 끝이 떨어진 술방울로 살짝 젖었다.
‘취했나.’
챈들러가 술을 마시는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크리스티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남작님.
“아니. 괜찮으니 놔두게.”
향긋한 와인이지만 도수는 높은 듯했다. 잔뜩 마신 탓에 그의 목소리에서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챈들러가 만들어 내는 긴장이 점점더 고조되고 있었다. 그는 식사를 하러 온 게 아니었다.
무언가를 말하러 온 게 분명했다.
레나도 그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어느새.
나와 레나, 크리스티나 셋은 챈들러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쪽으로 걸어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 털썩.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한 가지 꼭 물어야 할 게있소.”
“뭔가.”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