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27화 (127/458)

‘지금 아버. 지라고 한 건가?’128화 패치워크 (8)

챈들러의 ‘아버지’는 나를 향해 힘겹게 걸어왔다. 지팡이를 짚은 팔이 작게 떨렸다.

노인의 주름은 오래된 기억과 시간이 쌓여 깊게 파인다.

그 아래에는 켜켜이 쌓인 지혜와 통찰이 들어차거나, 뻔뻔함과 욕심이 자리 잡는다.

하지만 걸어오는 노인, 그라스미어영주의 모습은 어딘가가 부자연스러웠다.

달랐다. 천천히 쌓인 기억과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름살은 깊었지만, 강제로 시계추가 잡고 흔들려진 모습이었다.

‘잡아먹었군.’

억지로 돌린 시겟바늘. 그 아래로 쏟아지는 생명력을 누군가 입을 벌리고 털어먹었다.

“아버지! 안 누워 계시고.r챈들러가 달려가 노인을 부축했다.

“널 구해 줄 분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

가까이서 본 영주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몸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흐리지 않았다. 총기와 결단이 살아 있었다.

“버터스 챈들러라고 합니다. 불민하나마 그라스미어의 영주를 맡고 있습니다.”

노인은 깍듯한 존댓말을 구사하며 저자세로 나왔다.

‘독특한 인간이군.’

그는 대도시의 영주이며 백작의 위位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억지로 꾸민 티는 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며 존댓말을 쓴다고 해서, 그의 권위가 손상되다는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그라스미어 백작인가. 당신이 무덤 속 주술사에게 생명을 빨아 먹히고 있는 거요?”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꿈에서 본 그날 뒤로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부담스럽군.’

홉수한 제국 예법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약간 부담스러운 태도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이라고 해 봐야영주를 부축한 시녀 한 명 정도다.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익숙한 건가?’

백작은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넓은 성의 복도를 지났다. 면적에 비해 관리인과 경비의 숫자는 적다.

하지만 한 명 한 명이 책임감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지나가는 영주에게 존경이 담긴 눈빛으로 웃으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흔한 혐오나 공포, 알맹이 없이 텅 빈 동경의 시선은 없었다. 대우가 좋은 모양이었다.

응접실은 햇빛이 들어 밝았다.

가로세로 20미터 정도 되는 커다란 방이었다. 휑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치품 따윈 전혀 없었다.

나는 백작과 마주 앉았다.

“송구합니다만, 제가 꿈에서 뵌 분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투구를 벗어 달라는 이야기였다.

챈들러의 질문과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주위를 슬쩍 돌아봤다.

“여기 있는 인간들은.

“모두 믿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 철컥.

투구를 벗었다. 마스커레이드는 쓰지 않았다.

“아아아.

백작은 깊게 탄식했다. 그의 손끝이 떨렸다.

“제가 꿈에서 뵌. 그분이. 그분이 맞습니다.!”

“흐음. 이번엔 내가 하나 물어보지.

지하의 주술사가, 어떤 식으로 생명을 빨아들이는 거지?”

구체적으로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챈들러도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백작은 뒤로 돌며 상의를 벗었다.

탄탄한 몸에 강제로 시간이 지나간 흔적이 깊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척추를 보십시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심각했다.

척추 근처에 촘촘하게 구멍이 뚫려있었다.

비슷한 크기의 깊고 작은 구멍들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빼곡했다.

노인의 둥이 묘하게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탐지 스킬을 썼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것들이 척추를 중심으로 무수히 움직이고 있었다.

‘.벌레인가?’

챈들러와 크리스티나는 물론, 인간죽이기를 나뭇가지 꺾는 것보다 못하게 생각하는 레나조차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아버지.r보다 못한 챈들러가 달려들어 다시상의를 입혔다. 백작이 작게 기침 을하고 아들에게 말했다.

“기괴하냐? 저분이 아니라면, 이제네가 이런 꼴이 되어야 한다.”

백작이 다시 나를 바라봤다.

“이렇게 등에 관을 꽂고 벌레를 넣습니다. 눈으로 안 보이는 크기의 녀석들입니다. 낮 동안 척수를 빨아들이지요. 그리고 매일 밤마다 가사상태에 빠진 주술사에게 기어가서.

쿨력!”

기침이 이어졌다. 듣기만 해도 고통이 느껴졌다. 백작은 몸을 들썩이다 힘겹게 말을 이었다.

“흡수한 생명력을 다시 주술사에게 불어넣습니다.”

“주군.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이런 거였습니까. 충격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게.”

“그래.”

“화가 납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 주술사를 반드시 제 손으로 짓이겨 버리겠습니다.”

흠칫할 정도의 살기였다. 영주가 작게 웃었다.

“건강한 호위를 뒀어. 좋군.”

그때 였다.

기침이 서서히 잦아드는 백작을 흘끗 바라보더니,  레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심각한 상황이란 건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확실히 해 둘 게있어요.”

“크흠, 말하게.”

“아드님이 말씀하시더군요. 가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드린다고. 백작님 뜻인가요?”

“물론이지! 뭐든 다 내드리고, 다해 드려야지. 바로 내 아들을 구하는 일인데, 어찌 망설이겠나.!”

하지만 레나는 질문을 전혀 늦추지 않았다.

“그건 챈들러 가문의 가주家主이자 동시에 그라스미어의 영주領主로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쿨럭. 무슨 소린가?”

“이를테면, 영주의 권한으로 그라스미어 무기 창고를 스승님에게 완전히 개방하겠다는 확약이겠죠?”

“으홈.”

백작의 기침이 거짓말처럼 및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막 숨이 넘어갈 것 같던 그가 갑자기 10년은 더 젊어 보였다.

“허허허.

그라스미어 백작, 허버트 챈들러가 작게 웃었다.

“동정해 주지 않는군.”

“동정이라뇨. 굉장히 재밌는 말씀을 하시네요. 제가 어떻게 감히 백작 각하를 동정하겠습니까?”

“허허허헛.

기침은 온데간데없었다. 착 가라앉은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뭐가 필요한가? 제시해 보게.”

“글쎄요. 그냥 말씀을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에요.”

백작은 나를 바라봤고, 나는 레나를 흘끗 바라봤다. 어차피 해 줄 퀘스트인데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기도 했지만, 레나는 무척 진지했다.

“얘기는 저랑 하시죠, ‘영주’님.”

“기력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무기 창고는 곤란해. 황실에서 선점한 물건이야. 그걸 주면 우리가 곤란해지네.”

“군대를 무장시킬 계획은 없어요.”

“하핫, 그렇다면 문제 있나? 가져갈 수 있을 만큼 가져가게. 영주로서 내 확실히 서약하지.”

“그럼 먼저 <선조들의 전당>부터이용할게요.”

“아니 자네. 어디까지 알아본 건가?”

“기본만 했는데요, 영주님?”

“허허허허.

백작이 뒤로 몸을 기대며 웃었다.

웃음소리 뒤에서 혈기 왕성한 젊은이가 비쳐 보이는 듯했다.

“장사를 해도 잘하겠군. 재밌는 친구야. 자네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올 때가 됐는데.

노파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챈들러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였다.

- 털썩.

레나와 대화하며 잠시 기운을 차리는가 싶던 영주가 눈을 감고 픽 쓰러 졌다.

“아버지!”

챈들러가 소리쳤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주를 살폈다. 하얗게 뜬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집사와 시녀가 뜨거운 수건을 영주의 손발 에두르고 마사지를 시작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라스미어의 잘 정비된 도로를 생각했다. 걱정 없이 망치를 두드리던 대장장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강박적일 정도로 검소한 성 내부와,

사용인들의 존경 어린 눈빛까지.

‘명군明君인가.’

백작은 주술사에게 꾸준히 생명을 먹혀 왔다. 세금을 걷을 때도, 행정을 지휘할 때도,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 의자 위에서도. 백작의 등에서는 매 순간 벌레가 꿈틀거린다.

그때마다 백작은 진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노예라는 진실을.

허황된 굴레로 아무리 자신을 둘러도, 자각할 수밖에 없는 피착취자로서의 삶이다. 그게 백작을 조금 더성숙시켰는지도 모른다.

“한 번 쓰러지시면 다음 날에나 일어나십니다.”

시녀가 백작을 주무르며 말했을 때였다. 문득 밖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호출을 확인한 집사가 조심스럽게 챈들러에게 말했다.

“손님이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누구지?”

“오늘까지 부탁받은 물건을 구해 오셨다는데, 여기로 들일까요?”

“.그분인가? 드디어 오셨군. 그렇게 해 주시오.”

“모시겠습니다.”

나는 투구를 고쳐 썼다. 곧 집사의 안내를 받아 한 남자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첸들러가 앞쪽으로 나가 남자를 맞았다.

“오랜만입니다. 이쪽은 우리와 함께하는 분들이니 주저 없이 말씀하셔도 됩니다.”

챈들러가 옆으로 물러서며 레나와내 쪽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들어온 자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입을 열었다.

“당신은.!”

성에 들어오기 전에 본 인간이다.

내게 금빛 명함과 정체불명의 새까만 카드를 준 남자.

언제든 자신이 묵는 여관으로 찾아오라던 남자.

진네이 가문의 가주, 유베. 그가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본 그분이구려.! 역시 범상치 않은 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여기서 뵙게 될 줄이야!”

“두 분, 구면입니까?”

챈들러가 끼어들었다. 진네이가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뵌 적은 한 번밖에 없지만, 계속구면으로 지내길 바랐던 분이지. 아,

공자님. 실례했군. 물건은 여기에.”

- 툭.

진네이 유베가 품에서 커다란 두루마리 몇 장을 꺼냈다.

레나가 슬쩍 두루마리를 보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이거 설마.?”

“오, 뭔지 알고 계시나?”

“내가 못 구한 건데.!”

레나가 분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후. 내가 못 하면, 다른 사람도 하면 안 되나? 그거 되게 특이한 사고방식이네?”

레나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하지만 책상 위에 놓인 두루마리의 가치를 인정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게 뭐길래?”

내 질문에, 챈들러 형빈이 대신 대답했다.

“골렘 설계도요. 저 아래에서 주술사를 지키고 있을 놈들이지. 이번에 놈들을 부술 작정을 했으니. 알아볼 필요가 있어 구했던 거요.”

진네이를 바라봤다.

나에게 골렘 던전의 존재를 처음 알려 준 자가 이자다.

챈들러 가문의 사연을 알면서도 전설이라고 했으니, 나를 은근히 떠봤을 확률이 높았다. 이 건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 얼마큼 아는 건지.

혹은 나에게 이 사건에 대해 넌지시 홀린 건지도 모른다. 나를 괜찮게 보고서. 나와 시선이 마주친 녀석은, 날 보고 눈을 찡긋거렸다.

‘.적응 안 되는 친화력이군.’

녀석은 두루마리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설명했다.

“뭐, 설계도는 있는데. 안타깝지만 멈추는 법은 못 구했소이다.”

이어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설명서는 구했지만, 희한한 고어로 되어 있고.”

급하게 앞으로 다가온 챈들러가 두루마리를 서둘러 살폈다.

그는 곧 안색이 굳어지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전혀 못 알아보겠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모르겠군.”

곁에 선 레나는 이미 다른 한 장을 집어 들고 세세히 한 부분씩 뜯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그녀는 인상을 작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이거, 구했어도 곤란했겠네요.”

진네이 유베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지. 설계도가 있다고 일이해 결되는 건 아니라네. 모르는 자는 봐도 이해하기가 힘들지. 시간 맞춰구해 드리긴 했지만, 이럴 것 같아 가져오면서도 마음이 좀 불편했지.”

“혹시 추가로 정보를 부탁드려도 되겠소? 기한은.

챈들러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을 때였다.

진네이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런데. 성 앞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하나 찾았지요.”

“그 방법이 대체 뭐요?”

모두의 시선이 진네이 유베의 입으로 옮겨 갔다.

나에게 황금 명함과 새까만 카드를준 상인은, 과장된 몸짓으로 내 쪽을 향해 양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바로 저분.”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여섯 쌍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골렘도 기계지. 기계 쪽에 놀라운 식견을 가지신 분이지요.”

과장된 말이다. 헛소리다. 성문에서몇 마디 섞은 것 가지고 녀석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그런 능력은 없다.”

고작 기계공학 레벨 3일 뿐이다.

별빛청여우가 쓰던 말도 안 되는 도구들이 떠올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게<기계>라면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미 협조가 약속된 것 같은데. 한번 봐주시지요.”

“부탁드리오.”

“봐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모른다니까. 너희들이 모른다면 내가알 리가.

어쩔 수 없이 테이블로 다가가 두루마리를 바라봤다. 골렘에 대한 설계 설명도다.

군데군데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여러 장의 두루마리를 겹쳐 보니 대부분 짐작이 갔다. 언어는 읽을 수 없어도 구조는 읽혔다. 골렘의 작동 원리와, 약점과, 마력액을 추출하는 방법이 머릿속에 흡수됐다. 나는 궁금해졌다.

근처에 선 좌중을 둘러보고 물었다.

“뭘. 모르겠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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