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패치워크 (9)
모두 멍한 상태로 나를 바라봤다.
“스승님. 이걸 그냥 다 이해하시는 거예요?”
“그게.
쏠리는 시선에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아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말하긴 했지만,
설계도를 알아본 건, 크라켄 뱃속에서 죽어 바다 밑에 가라앉은 별빛청여우 덕분이다.
스킬이 자연스럽게 발동돼 모두를 당황시킨 것 같았다.
“아. 설명해 주지.”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했다. 알 필요 없는 부분은 제외하고, 전투에서필요한 부분만 말했다.
띠링, 띠링 소리와 함께 레나의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챔들러와 크리스티나, 진네이의호감도도 연달아 올랐다.
한창 설명을 이어 갈 때였다.
- 똑똑.
누군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진네이 유베 님, 전언이 왔습니다.”
“내게 전언이.?”
“예. 자신을 17호 회원이라고 소개한분이 성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듣자 진네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아무래도 당장 가 봐야할 것 같구려.”
챈들러가 유베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가져와 주신 물건에 대한 사례금은 상회를 통해 보내 드리겠습니다.”
유베는 고개를 끄덕이곤, 나가기 전내 쪽을 보며 아쉬운 눈빛을 깜빡 빛냈다.
“이렇게 일찍 떠나게 되어 섭섭한걸. 꼭 한번 연락 주시오. 절대 후회는 안 하실 거요. 나보다. 훨씬쓸 만한 친구들을 소개시켜 줄 수 있소이다.”
“쓸 만한 친구?”
유베가 문으로 향하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카드를 기억해 주시오!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용무가 끝나면 꼭!”
그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허겁지겁 밖으로 빠져나갔다.
“급한 일인가 보군.
하지만 세 사람은 곧 다시 집중했다.
나는 설명을 이어 갔다.
“결국 여기, 여기, 여기에 충격을 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관건은 어느 정도의 힘으로 골렘에게 타격을 주고, 얼마나 빠르게 피할 수 있느냐.
“설계도상 관절의 회전 반경은.
물론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하지만 머릿속에 상대를 꼼꼼히 그려 보는 것만으로도 실전에서 큰 도움이 된다.
갑자기 사라지긴 했지만.
진네이가 구한 설계도는 골렘의 공격반경과 패턴까지 꼼꼼히 보여 준다.
철저한 회피.
그리고 핀 포인트에 반복해서 타격을 누적시키는 게 중요하다.
챈들러나, 크리스티나, 레나 가운데누군가는 한순간에 으스러져 핏물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설명으로는 부족하겠지. 내일부터 대련이다.”
내 말에 챈들러가 대답했다.
“연무장을 준비해 놓겠소이다. 일단 오늘은 부디 편히 쉬고 계셔 주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하는 사이 미리 준비가 다 되어 있었던 둣 집사가 나를 안내했다.
나름대로 극진히 대접하려는 듯했지만, 성 자체가 워낙 검소하게 지어진 덕분에 화려한 연회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커다란 특사용 방을 전 부나와 레나가 차지했다. 집사는 우리의 시중을 제대로 들기 위해 무척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갑옷은 벗으셔도 됩니다. 믿을 수있는 시녀들만 들이겠습니다.”
“내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건가?”
“첸들러 가문의 저주도 아는 시녀들입니다. 어차피 가까운 자들에게는 숨길 수도 없으니, 철저히 믿을 수있는 사람들만 대대로 고용하지요.”
“그런가.”
- 철컥.
갑옷을 벗어 놓았다. 식사가 곧 준비될 거라고 말하며 집사가 물러났다. 그런데 레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인간의 감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뭔가 침울해 보였다.
“무슨 일이지?”
레나는 눈꼬리를 처연히 늘어뜨렸다. 그녀의 모습은 무척 가련했다.
도저히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어서 말해 봐.”
레나가 풀이 죽은 채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스승님이 저만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나 봐요. 필요하긴 하지만, 다른사람들에게 차분히 설명해 주시는 모습을 보니 뭔가 괴로워서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이었다.
몸을 돌려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냥 기분이 그랬다는 거예요.
죄송해요. 스승님은 저만의 것이 아니니까요.”
레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뭐라도한마디 해 줘야 할 것 같았지만 결국 당연한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냥 의뢰를 달성하기 위해서야.
네 승급을 위해서기도 하고. 알고 있지 않나?”
레나가 조금 풀어진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라리 지부장 따위 된다고 하지말 걸 그랬나.
“그런 말 하지 마. 신경 쓸 필요는없다. 결국 내 제자는 너 하나뿐이니까.”
그때 마침, 문을 연 시녀들이 식사를 날라 오기 시작했다.
“헤에.
잠시 침묵하던 레나가 실없는 웃음을 홀렸다.
아마 향긋한 스프 냄새를 맡자 기분이 좀 나아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정갈하고 커다란 식탁에, 메이드들은 음식을 내오면서부터 무척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앞에 선 단발머리의 시녀가, 이마에서 식은땀을 홀리며 물었다.
“저. 드시지는. 않으시죠?”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가 가져온 스프 그릇을 통째로 레나에게 밀었다. 레나 앞에 스프 그릇 두 개가 놓였다.
“저, 곁들일 식전 주를 준비했는데.
시녀가 옆에서 백포도주 병을 들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술도. 안 드시는 거군요.
“네가 다 먹어.”
나는 레나 앞으로 와인 잔도 옮겨주었다.
침울했던 그녀의 표정은, 놀랍게도급격히 풀어지고 있었다.
“이거. 이거 뭐예요? 뭔데 이렇게 맛있어요?”
“베르무트로 간을 한 카즈아린 스프입니다. 이건 피스타치오 버터를 바른 뒤 숯불에 구운 바닷가재고.
단아한 식기에 담긴 메뉴들이 차례차례 나왔다. 가짓수가 많지는 않아도 음식 하나하나가 무척 신경 써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나는 음식이 올 때마다 슬쩍 레나 앞으로 밀어 놓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입꼬리가 숨길 수 없는 기쁨으로 실룩거렸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래.”
레나는 나오는 음식들을 알뜰살뜰하게 하나씩 다 발라 먹었다.
‘저게 다 어디로 들어가는 건지 모르겠군.
“이것도 너무 맛있네! 맛있어.!”
그녀는 음식을 내주는 시녀 두 명과도 번갈아 눈을 마주치며, 연신맛있다고 밝게 웃어 보였다.
‘무슨 일 생기면. 일단 먹여야겠어.’
한편 시녀들은 내 앞에 아무 접시도 안 놓이는 게 아무래도 영 불편한지, 꽃이나 장식이 놓인 예쁜 접시를 내 근처에 놓기 시작했다.
시녀들이 어쩐지 쩔쩔매는 것과는반대로, 나는 레나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가 끝나 갔다. 레나는 무릎 위로 올라온 밤톨이를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아까 그 상인은 어디 간 걸까요?
정말 당황하면서 나가던데.
그때였다. 식사를 다 내온 뒤 밖에 나가 있던 시녀가 들어왔다.
“저, 침구류는 최고급으로 준비했습니다!”
“침구류? 왜?”
그러자 어린 시녀가 무척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잠도. 안 주무시는. 건가요.?”
- 달그락.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의 표정이 점점 더 무너진다.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그럼 목욕물은! 목욕물은 허브를 띄워서 온천수로 준비해 드릴게요!”
“얼른 한다고 하세요. 울겠어요.”
레나가 옆에서 작은 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목욕? 꼭 해야지. 계속 기다렸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할게요!”
어린 시녀는 잔뜩 기합이 들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시녀는 레나와 나를 서로 다른 탕으로 안내했다.
‘레나는. 언젠가 온천에 같이 가자고 했었지.’
물에 잠겨 있으려니 레나와 보냈던 여러 생이 떠올랐다.
<들어올래요? 목욕으로 안 끝나도 좋고.>
<사양하지.>
<흑맥주 풀고 목욕하면 진짜 괜찮은데. 싫어요?>
그때의 그녀는, 거미굴 안에 남겨 두고 나 혼자 불에 타서 죽어 버렸다.
<지금 저랑 같이 가는 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될지도 몰라요.>
<그깟 길드, 별로 상관없는데.>
<알지도 못하는 기만자의 호의에기대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때의 레나는 슬라임에게 녹아 사라졌다. 그때와 지금의 레나. 같은 사람이면서도 같지 않다. 관계도, 상황도 달라졌다.
그때의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어쩌면 반복되는 다른 모든 것도.
‘.씁쓸하^.,
밖으로 나오자 갑옷이 반들반들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구석구석 먼지하나 없었다. 무언가 이거라도 해놓아야겠다는 필사적인 각오가 느껴졌다.
“아까 그 이가 닦아 놓은 거예요.”
먼저 나온 레나가 뽀얀 얼굴로 갑옷을 가리켰다.
“대단하네.”
이름이라도 알아 놓을까 싶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그 이름 모를 어린 시녀도, 전화戰火나 마왕 강림의 제물이 되어 바쳐질 거다.
구해 줄 힘 따위는 없다.
그런 여유는 없었다.
아침이 밝았다. 집사는 우리를 성뒤의 개인 연무장으로 안내했다.
“경비대가 집결하는 성 앞의 연병장과는 별도로, 가문에서 사용하는 곳입니다. 연무장 쪽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창문도 뚫려 있지 않지요.”
레나가 끼어들었다.
“뭘 해도 비밀은 보장된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챈들러가집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신경 써 줘서 고맙네.”
“모두 도련님의 것인데 뭘 그러십니까. 부디 목표하시는 바를 이뤄주십시오.”
연무장은 그늘지고 폐쇄된 곳에 있었지만, 관리의 흔적이 느껴졌다. 무척 넓었고, 다양한 연습 장비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가운데에는 커다란 천으로 덮인 무언가가 있었다.
“저게 뭐지?”
챈들러가 가운데로 걸어갔다.
“두 달 전, 귀하의 꿈을 꿀 때부터아버지게서 이날을 생각하며 준비해둔 물건이지요.”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연무장 한가운데 놓인 천을 걷었다.
“와.”
크리스티나가 작게 탄식했다. 레나도 말없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곳에는 3미터가 넘는 골렘 모형4기가 서 있었다.
“안은 못 만들어도, 모양은 흉내 낼 수 있소. 그게 우리 장인들의 기술력이지.”
“비밀이 새어 나갈 걱정은 안 했나?”
“그냥, 강판을 이어 만든 모형일 뿐이라오. 새어 나갈 비밀이랄 게있겠소이까?”
“실전 연습이 되겠네요.”
레나가 벌써 칼을 겨누며 거리를 가늠하고 있었다.
“자. 그럼.
챈들러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 쪽을 봤다. 챈들러뿐이 아니었다. 레나와 크리스티나까지 내게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뭐 어쩌라는 것이지?’
레나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첸들러, 크리스티나도 레나를 따랐다.
어쩔 수 없이 골렘 앞으로 다가갔다. 챈들러는 일단 강판으로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실제 골렘이 어떻게 움직일지. 어디를 쳐야 하는지는 역시 내가 도와줘야 한다. 설계도를 보고어제 하루 설명한 걸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이건 그냥 교육보조재에 불과하다. 독학용은 아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구조도를 보고 파악한 골렘의 취약점을 연습용 검을 들어 하나씩 지적했다. 낡은 철검은 이미 집사에게 맡겼다. 제대로 된 무기는<선조들의 전당>에 들어가서 받기로 했다.
날 없는 연습용 검이었지만 아주 단단하고 밸런스가 잘 잡혀 있었다.
자루를 잡는 느낌도 아주 좋았다.
끼기를 쳐라. 핀에 타격을 누적시켜야 몸이 무너지는 구조다.”
열 마디 말보다 한 번 보여 주는 게 나을 듯싶어 먼저 시범을 보였다.
- 과직!
날 없는 연습용 칼이 그대로 강판을 뚫고 들어갔다. 3미터가 넘는 골렘 모형이 요란하게 앞뒤로 흔들렸다. 칼을 뺀 뒤 그대로 뒤를 돌아 다른 골렘의 관절 부위를 찔렀다.
손잡이까지 뚫고 들어간 칼을 빼며골렘을 발로 차 쓰러트렸다.
- 까강! 까가강!
챈들러가 마련한 골렘 세 구가 순식간에 쓰러졌다.
여섯 쌍의 눈에서 뿜어내는 열기가 한층 더해진 느낌이었다. 어쩐지 부담스러워, 쓰러트린 골렘들을 괜히 다시 일으켰다.
실단 이렇게 감을 잡자는 거지.
스승님.
?왜 그러지?”
실력을 숨기고 계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