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No Sugar in my Coffin (2)
- 서걱.
칼끝이 움직였다.
주술사 아이작.
그는 연푸른 검기를 두른 채 내뼈를 깎기 시작했다.
깊게 들어오는 칼날에 뼛가루가 연기처럼 떨어져 나갔다.
대체 무슨 목적일까?
이대로 죽음을 맞는다면 차라리 좋은 결말이다.
그러나 어렵게 몸을 렛은 뒤 자결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뼈도, 체력도 빠르게 깎여 갔다.
[체력이 0.17% 소모됩니다.]
[체력이.]
- 달그락.
갈비뼈 안쪽에 깊게 각인을 새긴 놈이 갑자기 칼을 멈췄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거울 앞에서 뼈를 이리저리 움직인다.
문양을 새기는 건가?
모든 통제권을 잃었지만 의식은 생생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똑똑히 보인다.
단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알 수 없는 복잡한 무늬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때 였다.
주술사가 내 의식에 말을 걸었다.
= 재밌네. 몸이 깎여 나가면서도반항이 없어?
‘.하던 거나 계속해라.’
= 의외인걸. 의식이 있으면서도,
소멸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
‘그런 척을 하는 걸지도 모르지.’
= 나는 금빛 새벽의 주主이자 왕의 성막을 담당하는 대제사장이야.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멍청아.
이놈이 정말 수백 년 전 남부를 지배하던 대주술사일까? 말투가 왜이 따위인지 알 수 없었다.
터무니없이 거만한 놈의 인격과,
나를 흥미로워하는 감정이 조금씩 느껴졌다.
하지만 기억 같은 건 홀러 들어오지 않았다. 주술사도 나와 비슷한 상태인 것 같았다.
다음 순간.
=<혈관>을 그렸으니.
“이제<피>를 부을 차례야.”
‘내’가 입을 열어 말했다.
그 단어가 어딘가 익숙했다. 은빛액체와 피라는 단어가 어쩐지 서로어색하지 않았다.
‘어디서 그 단어를 들었지?’
천천히.
기억을 되살려 보려 할 때였다.
- 달그락.
주술사가 바닥에서 유리병을 주워들었다.
- 찰랑!
준비된 은빛 루-륨을 망설임 없이 왼쪽 손끝에 그대로 들이부었다.
뼈가 깊이 깎여진 홈에 은빛 액체가 흘렀다. 부어지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솟아올랐다. 몸의 반신이 그대로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 치이익! 치이이익!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땅으로 흘러내려야 할 루-륨은 한 방울도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고 뼈에 달라붙어 흘렀다.
왼쪽 손끝에서 갈비뼈까지, 칼로 새겼던 각인.
마력액이 흐르는 각인이 하나로 이어져 반짝거렸다.
.회로?
문득.
잿빛 기사의 갑옷에 반짝이던 붉은 회로가 떠올랐다.
서로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열리고 닫히는, 반짝거리는 규칙.
그것만은 비슷하다.
- 저벅.
‘나’는 창가로 걸어갔다.
- 드르륵.
오른손으로 창문을 열었다.
새까만 밤하늘이 펼쳐졌다. 별도달도 없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그 밤을 향해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결빙.”
- 사각!
그 말 한 마디에, 아무것도 없던 손끝에서 푸른 냉기가 일렁였다.
- 사가가각!
창문 밖의 공기가 시시각각으로 손끝 주변에서 얼어 가고 있었다.
보고도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느긋하게 밖으로 손을 뻗어밤을 얼렸다.
이게 정말 ‘내’가 한 일인가?
눈앞의 풍경은 바뀌지 않는다.
‘내’ 손짓 한 번에.
가을밤에 짙푸른 살얼음이 낀다.
의식을 집중해도 풍경은 그대로다.
허상이 아니었다.
‘아무리 빙의된 상태라고 해도.!’
같은 몸이다.
아케인 하트는 고사하고 평범한 심장도 없는 몸.
결빙 스킬을 처음 흡수했을 때가 떠올랐다.
<결빙 Lv.l을 흡수합니다!>
<아케인 하트가 필요합니다!>
<‘결빙’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흡수합니다!>
<아케인 하트가.>
<스킬을 사용할 수 없.>
2레벨의 정수 흡수는 마법사들의 스킬을 흡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케인하트가없으면 마법은 쓸 수 없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진짜 마법.
실제하는 신비神秘.
보라색 로브를 입은 두 아쥬라의마법사가 보인 것과 같은 힘이, 내손끝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푸르게 얼어붙는 밤을 향해다시 한 번 작게 중얼거렸다.
“이중영창.”
역시 마법사에게서 흡수한 스킬이다. 더블 캐스팅은커녕, 캐스팅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았던 스킬.
[스킬 혼합이 가능합니다. 무엇을사용하 시겠습니까?]
‘게다가 마법 혼합이라니!’
하지만 주술사는 반투명한 메시지를 바라보지 않았다.
‘못 보는 건가?’
아까부터 떠오른 여러 메시지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역시. 내 눈에만 보이는군.’
반투명한 창들은 이번에도 오직 내 눈에만 보이고 있다.
의식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다행.
어쩌면.
이걸 이용해 반격을 시도해 볼 수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고민하던 ‘내’가 손을 앞으로 털어 냈다.
“뇌격雷擊.”
- 파직! 파지직!
손끝에서 샛노란 번개가 뻗어 나갔다. 번개 줄기가 푸르게 얼어붙은 공기를 타고 그물처럼 밤하늘에 뻗어 나갔다.
- 사각! 파지지지직!
냉기는 수십 미터를 뻗어 갔고, 샛노란 번개는 별이 되듯 저 멀리 솟구치다,
- 파지지직.
작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냉기와 번개의 조합.
마법으로 만들어 낸 차가운 폭죽.
밤하늘에 별빛 한 점 없었기에 더욱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서늘한 환희가 느껴졌다.
‘이건.!’
방금 내 몸에 행해진 건.
아케인 하트가 없어도 루-륨을 마력원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시술이 분명하다.
문득 막급한 후회가 몰려왔다.
‘자세히 봐 둘걸.’
아케인 하트가 없어도 누구나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는 기적.
그 기적의 현장을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고 놓쳐 버린 것이다.
스킬 습득이 아니다.
명백한 신체 변형.
뼈를 뚫고 루-륨이 흐르는 회로를 만들었다.
다시 회귀했을 때 이 상태가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잘 봐 두었어야 했는데, 주술사와쓸데없는 대화를 하느라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두고두고 후회할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부터라도 주술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관찰하자고 마음먹었다.
대검 근처로 걸어간 ‘내’가 대검을 잡아들고 중얼거렸다.
“검기.
- 우우우우응!
대검에서 연푸른 검기가 자연스럽게 피어올랐다. 내가 발동했을 때보다 자연스러우면 자연스러웠지, 못할 거 없는 능숙함이었다.
‘주술사라고 하지 않았나?’
의문이 라기보다는 한탄이었다.
원래 이 정도는 가뿐히 소화하는건지, 아니면 스킬이 있는 내 몸을벳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왠지 전자라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고 있었다.
‘나’는 검기를 피워 올린 검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격발.”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대검에 서린 검기에.
- 화륵!
점화되듯 화염이 치솟았다.
푸른 검기에 붉은 화염이 섞였다.
검기가 다섯 배는 부풀어진 것처럼 이글거렸다.
- 회■르르르르!
검염 劍炎.
그런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묵는 방의 천장이 높지 않았더라면, 당장 사방에 불이 옮겨 붙을 정도의 화염이었다.
절망적인 가운데서도.
이렇게 마법과 검술을 결합한다면 어쩌면 후작 같은 괴물과도 맞서 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작을 흡수할 때, 놈에게 마법에 관한 스킬은 없었다. 의외로 마법에 약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일단 이놈을 떼어 버릴 수 있어야 성립하는 이야기다.
“해제.”
주술사는 대검에 타오르던 화염을 꼈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걸었다.
= 음. 어이? 아직 있냐? 스킬 활용도 못 하던 몸을 개조해 줬는데.
뭐, 감사의 인사 같은 거 없냐?
이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보장만 있었어도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었을지 모른다.
드디어.
아케인 하트 없이도 마법을 사용할 실마리를 얻은 셈이니까.
마법까지 얻은 ‘이 몸’은 그 언제보다도 강해졌다.
하지만.
내 몸이 아니다.
강해지는 게 오히려 장애물이다.
이런 식이라면 죽을 확률도 크게 낮아진다.
회귀에 성공할 때까지.
몸을 되찾을 때까지,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 어이? 안 들려? 거기 있는 거다 느껴지는데. 불렀는데 없는 척하면. 콱 그냥!
‘.있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루-륨을 어떻게 사용한.
= 그냥 피라고 불러, 멍청아.
주술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혈관’을 그렸으니. 이제 ‘피’를부을 차례야.>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술사의 말투에서, 놈이루-름을 말 그대로 ‘피’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피라고?’
= 그래. 사도使徒의 피다. 세이론이 잡아 죽인 사도들의 피지.
착 가라앉은 주술사의 서술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생소한 말이었다.
루-륨.
마법 장치의 동력 액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대체 여기서 왜 사도가.
제국의 초대 황제인 세이론이 나오는지 알기 어려웠다.
‘사도의. 피라고?’
= 어. 나냐우 그 애새끼는 삼백 년전에 뒈졌는데, 왜 아직 T&T가 이걸 모으고 있는 거냐?
트로핀 나냐우.
T&T 두 창립자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이번 생에 들어서 처음으로 이름을 들어 본 인간.
그가 남긴 룰북에 쓰여 있는 대로레나와 루-륨을 수집하기로 했다.
그걸 어떻게 안 걸까.
하지만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다면,
주술사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자와. 서로 아는 사이인가?’
= 내가 도시 아흡 개를 지배할 때나냐우는 여덟 살이었어, 여덟 살.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고 대답이 나제대로 해.
동시대인인가.
역시, 놈도 나름대로 궁금한 게 있어서 나에게 말을 건 것 같다.
몸 안에 갇혀 있으니 불쌍해서 말동무를 해 준 것 따위는 아니다.
"한데 사도라는 게, 정확히 뭐지?
인간을 잡아 고문용 가축으로 기른 존재라고 들었다. 예전에 강림한 마왕들을 말하는 건가?’
나도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러자 주술사는 갑자기 맥이 쭉빠진 듯한 태도를 취했다.
= 뭐야.?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사도들이 마왕이라고? 하.
그냥 의식 째로 녹여 없애야겠네.
- 팟.
녀석이 나와의 대화를 끊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대주술사 벨’호멧 아이작.
짧은 순간에, 놈의 인성이 적나라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주술사가 몸에 새긴 각인을 다시한 번 점검하고 있을 때.
나는 녀석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중얼거렸다.
‘상태창.’
- 띠링!
[Lv.39(173)j[체력: 61]
[힘: 73]
[민첩: 71]
[지혜: 61]
원래 가지고 있던 스킬들이 주르륵 나열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열 번 넘게 죽어 가며얻어 온 귀중한 스킬들이다.
그 아래로.
낯선 스킬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결계에서 나올 때, 주술사가최면과 암시 스킬을 일행에게 사용했던 게 떠올랐다.
물론 나에게 그런 스킬은 없다.
놈의 혼이 들어오면서.
힘 자체가 옮겨붙은 것이다.
[최면 Lv.15] (영혼귀속)
- 피최면자의 가치관에 강력히 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암시성을크게 고조시킴니다.
지속 시간: 4시간[암시 Lv.15] (영혼귀속)
- 피암시자의 생각을 안내합니다.
최면과 결합된 높은 레벨의 암시는 신체 현상까지 간단히 일으킬 수 있습니다.
지속 시간: 4시간피암시자의 정신력에 따라 스킬 효력이 크게 좌우됩니다.
최면과 암시 스킬은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스킬 설명은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쿨타임이 24시간.
지속 시간은 4시간이다.
큰 힘을 발휘하는 만큼 나름의 제약이 있었다.
상태창이 없었다면, 절대로 몰랐을 정보들이다.
주술사는 결코 나에게 이런 약점들을 말해 주지 않았을 테니까.
‘놈도. 무적이 아니다.’
레나도, 첸들러도.
아침이면 원래대로 돌아오게 될 확률이 높았다.
나는 은근한 기대감을 가지고 다음스킬을 꼼꼼히 살폈다.
또 다른 약점은 없을까?
[결계작성 Lv.15] (영혼귀속)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결계 지역에서는 스킬 위력이 크게 상승하며.
[제사 Lv.20] (영혼귀속)
- 번제를 바쳐 힘을 회복합니다.
- 제물이 고통스러울수록 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 제사 특성 : 말파스의 대제사장-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말파스에게 가장 총애 받는 대제사장입니다.
- 영혼에 말파스의 각인이 새겨져있습니다. 당신이 지내는 제사는 모두 말파스에게 바쳐집니다.
- 말파스의 추종자들에게 호감도가 25 상승합니다.
-<새를 사냥하는 마왕>레라지에의 추종자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당신을 적대하고, 못을 박아 죽이려 할 것입니다.
녹색 옷을 입은 사수射手.
달콤한 사냥꾼.
활과 쾌락, 부패의 마왕 레라지 에.
직접 엮일 일은 전혀 없었지만, 존재는 알고 있었다.
‘.서로 원수진 사이인가. 차라리 놈들과 마주쳤으면 좋겠군.’
하지만 일행이 있다면 곤란하다.
어떻게든 레나와 헤어지고,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잡다한 스킬이 많았다.
하지만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주술사의 영혼에 귀속된 스킬들.
‘우울하군.’
지금은 물론.
다시 죽더라도, 내가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별다른 약점도 발견되지 않는다.
게다가 제사 스킬이 특히 마음에 걸렸다.
번제播祭.
제물을 태워 공양한다.
아이작은 제힘을 되찾기 위해서,
대체 얼마나 많은 학살을 ‘내’ 손으로 저지를 것인가?
산 제물들을 태우는 유황 냄새가,
벌써부터 커다란 방 안에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