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No Sugar in My Coffin (3)
아이작은 책상에 앉았다. 만년필을 들고 얇은 종이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적히는 글자들은 엄연한 제국공용어였다.
하지만 글자 자체는 알아보더라도,
문장과 문맥의 의미는 전혀 알아볼수 없었다.
일종의 암호문인 것 같았다.
[변화는 다시 기다리고 있다. 영향을 받지 않은 하나의 조끼.]
비슷한 내용으로 수십 장의 편지를쓴 아이작은 마지막 한 장 남은 종이를 잡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글을 적어 갔다. 이번에는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나 그라스미어 영주 허버트 챈들러아이작은 펜을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다시 움직였다.
[해골기사를 첸들러 가家의 영원한 귀빈으로 대접하며, 다음과 같은 특전을 내린다.]
1. 영주 전용 내성內域 대장간의모든 사용 권한을 영구하게, 상시허가한다.
2. 도시 내에서 A급 이상의 무기가 제작될 경우 먼저 해골기사에게보인다. 해골기사가 원하는 경우 그에게 조건 없이 즉각 양도한다.
3. <선조들의 전당>의 모든 물품을해골기사의 것으로 인정한다.
4. 내성 지하 전체와, 그곳에 묻힌 모든 물품의 권한을 해골기사에게양도한다.
5. 해골기사가 무언가를 요구할 경우, 영주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화수분>의 회원권을 통해서라도어떻게든 즉시 해결한다.
6. 해골기사는 도시 내에서 절대적인 치외법권을 가진다.
나는 계속 터무니없는 소리를 써내려가는 아이작에게 슬며시 말을 걸었다.
‘.그만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녀석은 15번까지 쓴 뒤에야 펜을 멈췄다.
하나하나가 차마 똑똑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뻔뻔한 요구였다.
= 목숨을 구해 준 거 아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랑 아들 목숨까지 살려 줬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바로 그 목숨을 네가 빼앗고 있지않았냐는 말을 속으로 삼키고 있을때, 아이작이 다시 말을 걸었다.
= 그런데, 년 이름이 뭐냐?
‘.없다.’
아이작은 팔짱을 끼었다.
= 야, 인간들한테만 숨긴 거잖아.
정말 없어? 그게 말이 돼?
‘.없다. 모른다.’
=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아이작은 팔짱을 풀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 야, 니 네크로멘서는 대체 어떻게 되어 처먹은 년이냐? 혹시 너보다 머저리냐?
‘.무슨 소리지?’
= 진명眞命을 개방해야지. 그래야 기량이 확 늘어나는 거 아녀. 그것도 몰라? 네놈 정도면, 생전에 이름깨나 날렸을 게 분명한데.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기스-제-라이의 다섯 듀라한도 모두 이름이 있었다.
동방의 길라우트.
견고한 오웨인.
심장을 부수는 안드레이.
민첩한 펜리르.
창백한 하멜라인.
정말 이름을 알게 되면 힘이 늘어나게 될까?
= 대체 얼마나 머저리 같은 년이기에, 검기를 쓰는 놈한테 진명 개방도 안 해 놨어?
루비아를 매도하는 소리를 듣자 내잘 못인 양 가슴이 아려 왔다. 아이작이 이리저리 서성대며 말했다.
= 무덤 위치나 정확히 불러 봐. 묘비 뒤져 보게.
‘에라스트 근방, 야산의 묘지다. 예전에 난 홍수로 전부 파헤쳐져 있을 터.’
그러자 녀석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잔뜩 묻어났다.
= 그런 허접한 데 묻혀 있었어?
제국 기사 묘역이 아니라?
‘.거짓은 아니다.’
= 정말? 거기가 어딘데? 도저히못 믿겠군. 너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가 그런 이름 없는 무덤에 묻혔다니, 터무니없는 소리다.
‘사실이라니까.’
나는 녀석에게 추가로 묘지의 위치를 좀 더 설명했다.
“킥킥.
아이작이 갑자기 음흉하게 웃으며 이를 딱딱 마주쳤다.
혹시 뭘 잘못 말한 건가 싶었다.
하지만 녀석이 내 무덤을 알아냈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상황이 나빠질 일이 있을까?
이미 날은 환하게 밝아 있었다. 새들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부지런한 참새들의 울음소리였지만, 아이작의웃음소리와 함께 들으니 어쩐지 수천 마리 까마귀가 동시에 우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그때 였다.
- 똑똑.
“기사님, 기침하셨습니까?”
밖에서 어린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
“예. 옛!”
잔뜩 기합이 들어간 대답이 들려왔다. 나에게 뭐든 잘해 주고 싶어 하던 어린 인간 여자였다.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하자 좋은침구를, 잠도 자지 않는다고 하자목욕물이라도 어떻게든 화려하게 준비해 주려고 했던 시녀다.
- 끼익.
아이작은 문을 열었다. 곁에는 레나가 서 있었다.
“어, 왔구나?”
커다란 가방에 담은 편지들을 레나에게 안겼다.
“이건.?”
“편지야. 목적지 다 써 놨어. 중요한 거거든? 너라서 믿고 맡기니까제대로 보내.”
아이작은 레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했다.
“예.! 알겠습니다.!”
레나가 무언가 몽롱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최면이 안 풀린 것 같아 안타까웠다.
“킥.
뒤를 돌아 나가는 레나를 바라보고아이작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최면에 걸린 레나를 비웃고 있는게 분명했다.
“저, 기사님. 영주님께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녀가 말을 걸어왔다.
“어, 그래. 년 저거 들어.”
아이작은 방 한쪽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루비아의 갑옷을 손으로 가리 켰다.
“알겠습니다!”
시녀를 따라가며 아이작이 내게 말을 걸었다.
= 짜식, 연기하네.
‘연기라고?’
= 그래. 레나라고 했나? 암시에 당하는 척 연기하고 있어. 너 같은 멍청한 놈에게는 과분할 만큼 눈치가 있는 아이지.
‘레나가.!’
= 그래도 내가 그거 하나 못 알아볼까 봐? 큭큭큭. 진짜로 당해 버린 놈들보다야 훨씬 낫지만 말이야.
잘 키우면 크게 되겠는데?
아이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레나는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고,
당하는 척 연기하고 있다.
추측컨대.
나를 구출해 낼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다.
아이작은 그런 레나의 심리를 전부파악하고 있다.
차가운 한기가 마음 밑바닥에서 차오르고 있었다.
레나가 날 구해 주려다 살해당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진다.
또다시 이런 상황인가.
이번 생에는 꼭 제대로 도와주려고 했는데. 연기를 하며 기회를 노리는 레나의 심정을 생각했다.
외로우리라.
나를 구하기 위해서 위태로운 외줄위에 올라타 있다. 살얼음판 위에서 연기를 펼쳐 내고 있다.
몹시 괴로웠다.
그런 마음과 별도로, ‘나’는 발걸음도 경쾌하게 영주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활짝 열린 집무실에 모두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은공!”
영주가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혈색이 밝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 건강이 많이 좋아진 모습이었다. 챈들러의 표정도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밝았다.
주술사가 죽으면 영주에게 충격이갈까 봐 초조해하던 게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벌레들이 모두 불타 사라지면서,
그저 건강해진 모양이었다.
“저와 제 아들을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베풀어 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집사, 챈들러, 크리스티나 모두 고개를 깊이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크리스티나를 흘끗 바라봤다.
더없이 자연스럽게 챈들러의 옆자리에 녹아들어 있었다.
가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더인정받은 모양이었다.
모두에게서 ‘나’를 향한 호감 가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 순간에도호감도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챈들러도.
크리스티나도.
최면은 풀린 듯했지만.
나를 다른 존재라고 의심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표정이다.
영주가 만면에 그득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입술을 살며시 혀로 축이며 말했다.
“이런 은혜에 대한 보답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이작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와 펜을 슬쩍 내밀었다.
빈 종이가 아니다.
어젯밤에 작성한 빼곡한 목록이 적혀 있었다.
맨 아랫부분만, 뭔가 쓰라는 듯 널따랗게 비워졌다.
“이것은.?”
“읽고 서명.”
“으홈, 나 그라스미어 영주 허버트챈들러는, 해골기사를 첸들러 가家의 영원한 귀빈으로 대접하며,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크흠,
다음과 같은. 특전을.
영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뭔데 그러십니까?”
“뭔지는 몰라도 은공께서 원하시는건데, 즉시 들어주십시오, 아버님!
아버님이 안 하시면 제가!”
천천히 목록을 읽어 내려가는 영주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마에 송글송글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종이를 들고 있는 손과 눈동자가 떨렸다.
“영주 전용 내성內域 대장간의 모든 사용 권한을.
- 꿀 적.
보고 있는 내가 괴로울 지경이다.
1번 조항부터 막히면 많이 힘들 것 같은데.
“아니, 이. 이런 걸 어떻게 다 알고 계시는 겁니까? 이게 무슨.
영주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실시간으로 바닥으로 빠져 홀러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건 없었다.
“아버님? 왜 그러십니까?”
“가만히 기다려 보거라. 이건. 밑천을 한 톨도 남김없이 다 탈탈 털어 달라는 말씀이오. 어떻게 이런 것까지 전부 아시는 거요?”
옆에서 종이를 바라보던 집사도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집사는 내게 수여하려고 했던 듯작은 상자를 들고 있었지만, 그 상자의 존재는 이미 스스로도 잊은 것같았다.
열다섯 개의 조항.
앞쪽은 주로 요구 사항이었다.
하지만 뒤쪽으로 갈수록 조항들이 제법 묘해지고 있었다.
은혜를 베풀지 않았더라도, 한 조항 한 조항을 읽을수록 거절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영주의 깊숙한 치부들.
가문과 도시의 은밀한 이야기를,
아이작은 기묘한 형식으로 엮어서뒤쪽 조항에 끼워 넣었다.
‘저런 건 다 어떻게 안 거냐?’
내 질문에 아이작이 대답했다.
= 어떻게 알긴. 내가 꿈을 꾸면,
저들은 내게 현실을 공유하지.
영주는 결국 식은땀을 홀리며 종이에 서명을 마쳤다.
나는 파렴치한이 된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쨌거나 아이작은이 모든 걸 내 모습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을 돌리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아이작이 곁에 선 시녀를 향해 말을 이었다.
- 철컥! 철컥!
그녀가 고이 들고 있는 갑옷.
루비아가 유블람에서 샀던 40로티짜리 갑옷을 손으로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갑옷을 들고 있는 어린 시녀도 내손 짓을 따라 앞뒤로 흔들렸다.
“이건 녹여 버려. 제대로 된 거 하나 주고.”
“알겠습니다. 바로 폐기 처분.
집사가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고갑옷을 잡았다.
‘안 돼!’
나는 갑옷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걸 녹여 버린다는 건 있을 수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그 꼴을 볼 수는 없었다.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루비아가 남겨 준 갑옷이었다.
다른 모든 물건을 잃는 일이 있어도 이것만은 지키고 싶었다.
아이작에게는 고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소중한 유품이다.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루비아가 나와 함께하고 싶어 했던 흔적이다. 함께 꿈꾸던 미래가 녹아있다.
내게 갑옷을 입히고 함께 도시에 들어가고 싶어 했고. 함께 대로를 걷고 싶어 했다.
그녀는 땅에 묻혀 썩어 가겠지만.
갑옷은 아직 깨끗하고 반듯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발휘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희망은 없다.
손끝에서 손으로, 팔로 힘이 들어갔다.
갑옷을 아무렇게나 잡고 흔들던 오른손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갑옷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처분. 합니까?”
집사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아이작이 당황했다.
“어라?”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어쩌시겠습니까? 명품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닙니다만, 충실히 잘 만들어진 갑옷이기는 합니다.”
집사는 갑옷을 슬쩍 훌어보고 품평까지 건넸다.
아이작이 내게 말을 걸었다.
= 너, 뭐 하냐?
‘안 돼. 녹이지 마라.’
= 딱 봐도 양산형이구만. 남부의지배자, 나 벨’호멧 아이작이 이딴 쓰레기를 걸쳐야 되겠냐?
‘.쓰레기가 아니다.’
= 품. 무슨 추억이라도 담긴 물건이냐? 해골 주제에 정말 가지 가지하는군. 건방진 놈. 안 버린다, 안버려.
- 달그락.
나는 힘을 풀었다. 마치 수십 일 동안 집중을 유지한 것 같은 정신적인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의식 저편의 새까만 무저갱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지만, 한 가닥 희망이 피어나는 걸 느꼈다.
잠깐이나마, 한 팔의 통제력을 발휘해 낸 것이다. 한 번 성공했으면 두 번도 가능하다.
아이작이 작게 투덜거렸다.
= 젠장할. 육을 빼앗았다고 해도,
역시 주인의 혼이 살아 있는데 통제권을 못 찾을 리가 없었구만.
‘.알면서도 내 몸을 벳은 거냐?’
= 네가 환령換靈에 저항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 너 같은 놈은 한 명도 없었다니까?
뱉어 내는 내용과 달리 꽤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아, 일단 이건 냄둬.”
“알겠습니다.”
“상자에 있던 건 뭐냐?”
집사가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바닥에 있는 상자를 주워 열었다.
안에는 그라스미어의 풍경이 작게 양각된 금속 메달과, 백금으로 된줄이 놓여 있었다.
“목걸이냐?”
“예! 그게.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기념품입니다.”
“흐흐흐. 정말 아무 쓸모없는 기념품을 주려고 했구만.”
“크흠.
아이작은 킥, 하고 웃고 손가락을두 번 튕겼다.
- 딱딱.
“뭐, 좋아. 불에 달궈서 망가뜨려도되고, 전기 홀려도 되겠고. 크기 적당하니 잃어버릴 염려도 적고.”
“무슨. 말씀이신지.
“도시 풍경도 새겨져 있고. 우리그라스미어 생각나게 말이야. 아주마음에 들어. 딱이야.”
메달을 받아 든 아이작은 다음 주문을 내놓았다. 영주로서도 상당히 반가운 요청이었다.
“그럼 간다. 말 세 필 준비해 놔.
가장 빠른 녀석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