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No Sugar in My Coffin (4)
“잘 모시라고.”
‘나’는 말들의 눈앞에 가볍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물론 아이작의 움직임이 다.
검지 하나의 움직임에 세 마리 준마의 눈동자가 멍하니 풀렸다.
최면.
간단한 손동작만으로.
높이만 160cm가 넘는 근육덩어리세 마리를 단번에 복종시킨다.
“이랴!
아이작은 그중 가장 큰 녀석의 위에 올라탔다. 강한 심장과 폐가 느껴졌다.
[승마 Lv.2가 작동합니다!]
이번에도 메시지는 나에게만 보이는 것 같았다. 말은 머리를 낮게 내렸다가 다시 높이 들었다.
순종의 표현이었다. 흔한 투레질도 없다. 진 밤색 갈기부터 꼬리까지 자르르 윤기가 흘렀다.
“가자!”
말 세 마리가 성문을 지나 넓은 가도를 달렸다. 에라스트 방면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왜 세 마리나 데리고 가는 거지?’
처음에는 짐을 실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이작은 곧바로 성문을 빠져나갔다. 물어 봐야 친절한 설명을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 다그닥! 다그닥!
말 세 마리가 일렬로 달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나는 녀석의 행보를 방해하지 않았다. 통제권을 되찾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고 아이작에게 가만히 몸을 맡겼다.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도록 했다.
멀어지고 있다.
레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전서구들에 편지를 묶어 보낸 걸 체크한 뒤, 놈은 그녀에게 더 이상신경 쓰지 않고 에라스트를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계속 멀어져라.’
간절히 기원했다.
놈이 레나와 영영 떨어지게 되면.
나는 이 작은 감옥에 갇혀 고통받더라도, 적어도 내 손으로 그녀를 해칠 일은 없게 된다.
서서히 공기가 식어 가고 있었다.
에라스트 성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하며, 하늘이 조금씩 감흥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이작이 문득 내게 말을 걸었다.
= 어이! 야!
= 거참, 조용하네.
‘.그걸 원한 게 아닌가?’
= 너, 지금 내가 그 여자한테서 멀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멋대로 생각해라.’
= 큭큭. 뻔하지, 뭐. 근데 그거 아냐? 지금 그 여자애, 뒤에서 진짜 열심히 쫓아오고 있을걸?
‘레나가. 쫓아온다고?’
= 쯧. 당연한 거 아니냐? 눈치도 없는 멍청한 놈 같으니. 말이 통할만한 타락 사제라도 섭외해서 열심히 쫓아오고 있을걸?
- 휘이이잉!
바람이 얼굴에 강하게 불어왔다.
좌우로 스산한 늦가을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저녁이 한밤으로 바뀌고 있었다. 붉은 노을, 그 빛마저 하늘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아이작의 말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정말이라면. 탐지해 봐라.’
놈이 탐지 스킬을 사용하면 나도 레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터다.
하지만 놈은 즉콕 비웃기만 했다.
= 멍청아, 척 하면 척이지. 눈치도 더럽게 없어가지고. 그걸 꼭 없어보이게 스킬까지 써야 되냐? 통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다 알아.”
‘그녀를. 어쩔 셈이지?’
녀석의 말대로 레나가 오고 있다면, 알고 기다리는 쪽이 훨씬 유리한 싸움을 할 게 분명했다.
= 딱 보니 마음에 들더라고. 마약유통 관리하고, 걸리적거리는 애들숙슥 담그고. 이런 용도로 딱이야.
‘그녀가. 널 알아챘다고 하지 않았나? 협조하지 않을 텐데.’
= 네가 이 몸에서 아예 사라지면,
그 아이는 겉으로나마 ‘너’인 날 따를 거야. 다른 놈이 든 줄은 알지만 따를 수밖에 없는 그런 배덕! 절망!
난 이런 게 너무 좋더라.
결계에 수백 년을 갇혀 있어서 저렇게 된 걸까? 원래부터 맛이 가있는 녀석인 것 같았다.
어떻게든 내가 몸을 다시 탈환해야했지만, 아이작도 잔뜩 경계하는 것같았다. 손끝 발끝조차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 다그닥! 다그닥!
세 필의 말은 어느새 몹시 익숙한 장소에 접어들고 있었다.
에라스트 근방 ?>산의 초입.
처음 루비아를 만났던 묘지가 있는 곳이다.
아이작은 두 청부업자가 블루 마일 로를 타고 올라왔던 산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경사와 어둠 때문에 속도는 조금 느려졌다.
하지만 말발굽 소리는 내 어지러운 마음과 달리 여전히 경쾌하다.
묘지까지는 금방이었다.
= 이거 완전히. 개판이네?
묘지에 도착한 아이작의 감상이었다. 에라스트 ?>산의 공동묘지. 그때는 겨울이었고, 지금은 늦가을.
10개월 정도가 지났다.
묘지 주변의 풍경은 한층 더 심해져 있었다. 내 무덤이 어디였는지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관이 사라진 무덤이 절반이었고,
비석이 제대로 꽂혀 있는 무덤도 반이 넘지 않았다.
= 이건 뭐. 묘지 관리 같은 건 전혀 안 하나 봐?
‘그렇겠지.’
에라스트는 지금쯤 전쟁 준비에 한창일 터다. 내년에 심을 씨앗조차군량이라고 빼앗아 가는 환경에서,
연고자도 없는 무덤의 정비를 바랄 수는 없었다.
= 그래서 니 무덤은 어디지?
‘글쎄. 보다 보면 알 수 있을지도.
일단 뒤져 봐라.’
물론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네크론 신사회의 두 청부업자를 죽인 뒤, 내 관에 쑤셔 박아 놓았다.
시체 두 구가 들어 있는 무덤이내 무덤이다. 놈에게 사실대로 말해줄까 잠시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고민이었다.
아이작이 여기저기를 뒤져 봤지만 어디에도 그런 무덤은 없었다.
= 뭐야? 어디야? 하긴 워낙 개판이니 모를 만도 하겠군.
다른 무덤의 시체는 그대로인 걸보면, 아무래도 누군가 놈들의 시체만 수거해 간 것 같았다. 물론 네크론 신사회일 확률이 높았다.
= 뭐, 그래도 이 정도 범위면 충분하겠는데?
‘무슨 소리지?’
= 네 이름을 밝히는 거 말이야.
아이작은 묘지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관과 비석, 암석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쿵!
가운데 커다란 암석이 놓였다.
옮기는 입장에서 보니 분명한 어떤 규칙이 느껴지고 있었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봤다면 알기 어려운 미묘한 규칙성이었다.
= 소멸되기 직전이니까, 잘 배워놓으라고. 원래 죽기 직전에 배워야팍팍 잘 꽂히는 법이거든.
‘.소멸이라고?’
= 그래. 진명眞名과 함께 의식을 완전히 소멸시킬 거거든. 정체성을 뽑아낸 다음에 죽일 거야.
= 이것 봐. 반응이 없으면 힘들어.
겁 안 나? 생각해 봐. 완전히 사라진다고. ‘너’가 아예 없어지는 거라니까?
전혀 겁나지 않았다.
이 사태를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차라리 반가운 심정이었다.
의식이 소멸된다느니 뭐니 해도,
이대로 죽으면 다시 시작할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어. 두려워하질 않는군. 역시생각대로야.
더 말을 섞어 봐야 놈에게 말려들것 같았다. 침묵을 고수하고 감각을 집중했다.
아이작의 확신대로라면, 레나가 언제 이 장소로 도착할지 모른다.
통제권을 찾을 준비를 해야 한다.
레나가 다치기 전에 내 쪽이 먼저자살이라도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놈은 무덤 주위의 지형을 재배열한 뒤로는, 묘한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 저벅.
놈은 묘지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갔다.
메달을 암석 위에 놓고, 내게 말을걸었다.
= 좋아. 마음이 바뀌었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은 그라스미어의 풍경이 새겨진 메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 년여기 들어갈 거야. 나랑 정신이 이어져서 말이지. 한참 데리고 놀다 질리면, 깊은 바닷속에라도 던져 주지.
‘.소멸시킨다지 않았나?’
= 큭큭. 왠지는 몰라도 너, 그거안 무섭잖아? 그럼 절대 안 하지.
- 달그락! 달그락!
나는 발의 통제권을 찾으려 노력했다.
절벽에서라도 뛰어내릴 작정이었다.
심해에 파묻히면 탈출의 희망 따위는 없다. 대체 얼마나 오래 갇혀 있어야 할까? 금속 메달이 바닷물에다 부식될 때까지일까?
그때가지 내 의식이 버텨 줄까?
차라리 죽겠다.
죽는 게 훨씬 낫다.
그 무력감과 절망감은 상상하기도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놈도 대비하고 있던 둣 쉽게 통제권을 내어주지 않았다.
“으하하하.! 이건 반응하네?”
아이작은 아예 입을 열어 함부로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 퍼걱! 퍼걱!
꾸준히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이 정도 범위면, 하나면 되겠지.
그래도 넉넉히.
- 히히힝!
아이작은 말 두 마리에게 최면을 걸어 저울 그림 위에 서게 했다.
제물로 바치는 것 같은 모양새다.
저것 때문에 말을 세 마리나 끌고 온 모양이었다.
작업은 마무리 단계로 향하고 있었다. 암석 위에 놓은 메달을 중심으로 커다란 육망성. 그리고 그 안에 겹쳐지듯 그려진 오망성.
“아흐. 진짜 귀찮네. 뭔 장막 하나 뚫는 데도 별 지랄을 다. 빨리 힘을 되찾아야 되는데.
아이작이 중얼거리며 마지막 획을 그어 갔다.
“어쨌거나. 이제 네 정체를 한번 알아보기로 할까?”
문양이 완성되는 순간.
- 우우우응.!
그 속으로 주위의 어둠이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내 몸도 그에 따라 앞으로 쏠리는 기분이었다.
“이우 아닌(누구나 그러하듯이).
낮고 장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어둠 전체가 응응 울리며 주문을 읊어 간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미 비바스 보카네트 미안 노눔(제 이름을 부르며 삽니다).”
때론 타닥타닥 타 들어가고, 때론축축하게 적셔지는 주문이 어둠 속에서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언어지만,
의미가 생생히 와 닿고 있었다.
“시 티에 엔테리기타 볼바스(여기 묻혔던 이가 찾아와).
그 순간이었다.
- 투두두두투두두두투두두두두 !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십 발의 작살이 나에게 날아들었다.
아이작이 바로 탐지 스킬을 발동했다. 소대 수준의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놀랍게도 적은 단 한 명.
누구인지는 정해져 있다.
익숙한 기척의,
= 호오? 살짝 일찍 왔네?
레나였다.
- 촤아악!
수십 발의 작살은 모두 꼬리에 쇠그물을 장착하고 날아들었다.
레나가 날 잡아서 끌고 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내가 다치지 않게 하려는 그녀의 마음이 느껴져 괴로웠다.
차라리 폭탄이나<그라스미어의 불>
같은 걸 썼으면 좋았을 거다.
안타까웠다.
부서져서 죽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기라도 할 텐데.
물론 레나가 그 사실을 알 리가만무하다.
‘.젠장.’
게다가 그녀가 마음먹고 폭탄을 날린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는 쉽게 죽어 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몸 안쪽에 마력 회로가 새겨졌다.
하룻밤 사이, 본의 아니게 훨씬 더강해져 버린 것이다.
“검기.
- 우우우응!
“결빙. 질풍.”
[더블 캐스팅 Lv.l을 시전 합니다!]
[결빙 Lv.l & 질풍 Lv.l을 혼합사용합니다.]
[놀라운 숙련도입니다!]
[혼합 스킬 - 냉기 폭풍 Lv.l을획득하셨습니다!]
아이작은 대검을 위에서 아래로 크게 내려쳤다.
처음 보는 메시지가 허공에 마구 떠올랐다. 하지만 자세히 볼 겨를은 없었다.
‘안 돼!’
레나에게 향하는 공격이다.
검기 위에 타오르는 바람과 냉기의 힘은 보기만 해도 위협적일 정도였다.
팔을 막을 수는 없다. 마법은 익숙하지 않다. 막을 수도 없다. 내가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검기 해제!’
- 부응!
대검이 휘둘러졌다.
그 끝에서 푸르게 어둠을 에는 냉기 폭풍이 쏟아져 나왔다.
다행히 대검에 피어오르던 연푸른 검기는 사라져 있었다.
기세를 한풀 꺾은 것이다.
- 휘이잉!
폭풍은 눈앞으로 짓쳐 오는 십여 가닥의 작살 그물을 하얗게 얼리고그 자리에 떨어뜨려 바닥에 붙였다.
서로를 휘감은 바람과 냉기는 잠시더 나아가다, 앙상하게 마른 나무한 그루를 반쯤 사르록 얼리고는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매서운 바람이 나아간 앞쪽에는 곳곳에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레나는 요행히 몸을 다른 곳으로 피한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런 공격을 구사할 수 있다는 걸봤으니, 이제 조심한다면 상황은 좀더 나아질지도 모른다.
- 끼릭. 끼리 리릭. 끼리 리릭.
어둠 속에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작살을 쏘아 낸 병기를 다시 감는 소리 같았다.
아이작은 반격하지 않았다. 그저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결계 작동."
[<결계: 악몽>을 작동합니다.]
- 덜커덩! 덜커덩! .광!
무언가 거대한 것이 비탈길로 굴러가 이리저리 튕기며 비참하게 부서졌다.
마치 수레에서 루비아의 시체가 버려지는 소리를 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가슴에 차올랐다.
‘이런.!,
레나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병기는 비탈길에 밀어 버린 것 같았다.
탐지 스킬에 그녀의 맥박이 잡혔다.
거친 숨소리와 잔뜩 긴장된 기색이또렷이 느껴졌다.
- 저벅.
레나가 밤의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스름한 달빛에 온몸에 착용한 특수 장비들이 보였다.
‘도망가.!,
도망가라고 외쳤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걸까.
빠르게 눈동자가 흔들리며, 꽉 쥔 손과 깨문 입술에서 작게 핏줄기마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레나는. 놓아줘.’
아이작이 나를 비웃었다.
= 멍청한 놈, 도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저 아이는 이 일이 끝나면 내 총애를 받을 터.
- 털썩.
아이작이 대검을 내려놓았다.
다시 자세를 잡고 결계가 된 묘지가운데에 섰다.
“르우벤 엔 라 소르토 데 느보, 미프레가스 포르 노바 볼로(느보의육망성과 르우벤의 오망성 안에,
새 그릇을 놓고 기원합니다).”
“리 도니 알 씨 티오 노반 바존(여기 이자의 이름이 새겨질 그릇이 있사오니).
“본령本領을 드러내어, 새기소서!”
겹쳐 그려진 오망성과 육망성에 일제히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 파지직! 파지지직!
진하게 피어오른 붉은 기운이 번개처럼 허공에서 방전되기 시작했다.
K주D兄: 진명탐색>을 작동합니다.]
[<주況: 영혼봉인>을 작동합니다.]
- 휘이잉! 치릭!
어둠 속에서 솟아 나온 붉은 사슬이 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