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No Sugar in My Coffin (5)
사슬이 길게 자란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메달에서 솟아오른 붉은 사슬이 암적색 빛을 뿜으며 뼈 마디마디를 죄어 가고 있었다. 갈비뼈 하나하나에 전부 얇은 사슬이 감겼다.
- 치리릭! 치리릭!
온몸을 묶는 사슬이 진홍빛 불꽃을 튀겼다. 하지만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체력이 떨어진다는 메시지조차 없었다.
[접근을 불허합니다.]
[결계 작동이 강제로 중지됩니다.]
[주술 폭주. 측정할 수 없는 역풍.
봉인의 사슬이 시전 자를 구속합니다.]
‘주술 폭주라고? 무슨 소리지?’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79.4%.]
진홍의 사슬이 묶고 조이는 건 내 몸이 아니었다. 그 안의 무언가다.
= 이건 마, 말도 안 돼.!
사슬이 강한 묵음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발버둥치는 내 안의 무언가를 촘촘히 묶었다.
그리고 질질 끌고 돌 위에 놓인 메달로 가져갔다.
= 히, 끄, 끄, 끄아아아.!
갈비뼈를 타고, 척추를 타고 놈의 비명이 마구 울려 퍼졌다.
공포와 경악이 짙게 밴 비명은 거듭될수록 작아지고 있었다. 그리고곧 들리지 않았다.
- 펑!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돌 위의 메달에 붉은 글씨가 새겨졌다. 무덤가에 맴돌던 불길한 검은 기운도 한번에 사라졌다.
“히히 힘?”
제물로 놓여 있던 적갈색 준마가 가볍게 투레질을 했다. 다른 두 마리 말도 모두 멀쩡히 살아 있었다.
- 달그락.
두 손을 움직였다. 다리를 움직였다.
손가락을 하나씩 꼼지락거렸다. 목을 한 바퀴 돌렸다.
나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아이작은 없었다.
몸의 통제권이 완전히 되돌아온 상태였다.
하지만 멍하니 여유를 부릴 때는아니었다. 정적 가운데 한 가지 소리만이 들렸다.
- 저벅.
레나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앙다문 채,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던 그녀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악몽에서 깨어나는 건가?’
안쪽이 상한 건지, 그녀의 입에서 핏줄기 한 가닥이 홀러내렸다.
- 달각! 달각!
레나 곁을 맴돌던 밤톨이가 나를향해 한달음에 뛰어왔다.
녀석이 작은 몸으로 깡총거리며 빠르게 뛰어왔다.
날 곧장 알아본 것 같았다.
아이작이 내 몸을 차지했을 때도 바로 알아봤는데, 다시 내가 몸을 되찾자 또다시 알아본 것이다. 그 모습이 마냥 신기하고 기특했다.
자세를 낮춰 손을 내밀자, 밤톨이가 곧장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경계하며 계속 곳곳이 꼬리를 세우고 있던 녀석이,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힘차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 띠링!
녀석의 머리 위에 반투명한 상태창이떠올랐다.
[<밤톨(늑대 Lv.ll)>이 히든 업적<주인 알아보기>를 달성했습니다.]
[<밤톨>의 지능이 1 상승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의 <밤톨>은당신의 영혼까지 알아봅니다.]
[<뼈의 군주>의 숙련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숙련도가 30%를 달성했습니다.]
[통제하에 있는 상대에게 보너스스탯을 (1) 부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통제 아래.]
‘보너스 스탯 부여.’
망설일 것도 없었다. 곧바로 밤톨이에게 스탯을 부여했다.
[부여 대상을.]
[<밤톨>의 지능이 1 상승합니다.]
스탯이 자동으로 분배되었다.
[밤톨이가 매우 행복해합니다!]
호감도 상승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장이 빠르군.’
나는 녀석을 안고 레나에게 다가갔다. 악몽이 걷힌 둣 레나가 새롭게 눈을 떴다. 그녀가 내게 안겨 꼬리를 흔드는 밤톨이를 바라봤다.
“스승. 님? 돌아오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늦가을 밤공기가 유난히 맑고 상쾌하게 느껴졌다.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내가 해야 할 말이었다.
“알아봐 줘서 고맙다.”
“다시. 못 보는 줄 알았어요.”
내 팔에 기대 오는 그녀의 몸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 다친 거 아닌가?”
“괜찮아요. 꿈 자체는 별거 아니었어요. 그냥 깨어나기 위해 노력하는게 힘들었죠.”
- 딸깍.
그녀는 팔에 장착되어 있던 포션을열고 꿀꺽 삼켰다.
후작이 가지고 다니던 엘 릭서 같은건 아니었지만, 자양강장의 효과는 충분한 듯했다.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레나가 한결 나아진 안색으로 물었다.
“어떻게. 벗어나신 거예요?”
“나도 모르겠어. 아까는 뭘 가져왔던 거지?”
“기동형 노포奪砲를 변형한 게<전당>에 있었어요. 눈여겨봐 뒀다가 가져왔죠.”
“들고 온 건가?”
“아니요. 마차에 실어서요.”
레나가 저 아래를 가리켰다.
좁아지는 산길 아래쪽.
희끄무레한 마차 윤곽이 달빛에 비치고 있었다.
올 수 있는 데까지는 어떻게든 올라온 것 같았다.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였다.
“말만 다섯 마리군.
어딜 가더라도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 달각! 달각!
아직 행선지도 정하질 않았는데,
밤톨이는 자기가 안내하겠다는 듯몇 걸음 앞에서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 가니?”
- 저벅.
레나가 밤톨이를 안아 들기 위해,
앞으로 한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 야.!
머릿속에서 작은, 그러나 필사적인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뒤쪽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여기야! 여기라고!
“스승님, 저거. 멸리는데요?”
레나가 암석 위를 가리켰다. 금속메달이 작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라스미어의 풍경이 새겨진 메달. 의뢰를 해결해 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영주가 준 메달이지만, 별 가치는 없어 보이는 물건.
“깜빡했군.”
돌아가 메달을 바라봤다. 메달은전과 달라진 모습이었다.
‘벨. 호멧. 아이작?’
그라스미어의 풍경이 새겨진 기념메달에는 주술사의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메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한층더 또렷하게 들렸다.
= 가지 마! 가지 말라고! 날 이렇게 두고 가지 마라! 여기 있다간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
- 달각! 달각!
밤톨이가 암석 위에 올라가 홁 묻은 앞발로 메달을 마구 밟았다.
= 이 개새끼가. 안 부수고 봐줬더니. 감히 누구에게.!
“좀 닥쳐 줄 수 없나?”
= 으으. ? ? ? 아아.J“누구랑 얘기하시는 거예요?”
레나는 메달에 새겨진 붉은 글씨를 천천히 눈으로 읽었다.
“설마.
달빛이 메달 위를 비추고 있었고,
글씨 자체가 약하게나마 빛을 내기에 읽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아이작? 그 주술사 말이죠?”
= 그래! 나다!
하지만 레나에게는 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여기 갇힌 모양인데.”
“호호호. 정말요?”
- 달그락.
레나가 밤톨이가 마구 짓밟던 메달을 손으로 들었다.
“놓고 가면 절대 안 되겠네요.”
= 당연하지!
“후환은 제 손으로 없애야죠. 가서 용광로에 녹여 버려요. 아니면 염산 통에 던져 버려야 되나?”
= .그게 무슨 소리야!
“아, 없애면 혹시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겠죠? 불안하네.”
“그건 모르겠군.”
“늪에 던져서 버리거나, 바닷속 깊이 빠뜨리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겠어요. 제가 잘 알아볼게요!”
???야! 안 돼! 재 말 듣지 마!
[꼭 그렇게 해 달라는 말로밖에 안 들리는데.]
= 나는. 난 널 제대로 도와줄 수있다고! 내 권능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느냐? 원하는 게 뭐냐?
[글쎄다.]
녀석의 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레나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늪에, 바다에 빠뜨린다고?’
삼백 년의 차이를 두고 있는 두 인간이었지만, 서로 하는 말이 상당히 비슷하다.
둘은 혹시 비슷한 성격이 아닐까?
어딘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은.
나는 레나에게 녀석과 있었던 일을 대부분 털어놓았다. 한참 동안 모험을 겪은 것 같은데, 말하기 시작하니 금방 끝나 버렸다.
감탄과 탄식을 거듭하며 듣던 레나가, 문득 품에서 특수한 문양이 새겨진 은촛대를 꺼냈다.
뾰족한 침에 양초 하나를 끼울 수있는, 원형의 간결한 촛대였다.
“그게 뭐지?”
“예메라의 촛대예요.”
“참회의. 여신 말인가?”
“맞아요. 잘 아시네요.”
근위대 시체 한 구에게, 예메라의 교리를 흡수한 적이 있었다.
<고통이 없으면 참회도 없다.>
<온몸으로 죄를 지었거든 온몸으로 고통을 받아 적으라.>
<반성은 비명과 함께 시작된다.>
<시시한 고통은 구원이 아니다.>
레나가 은촛대에 작은 양초 하나를 끼우며 말을 이었다.
“축성된 물건이에요. 파문된 주교에게 받아 왔어요. 이걸로 주술사를 협박하려고 했지만. 일이 해결되어버렸네요?”
- 화르록!
작은 양초가 환하게 타올랐다.
“.뭘 하려는 거지?”
“써먹긴 해야죠. 스승님과 정신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셨죠?"
“응. 일단은.”
“고통을. 느끼는지도 알아보실 수 있겠네요?”
그녀의 말투가 어딘지 서늘했다.
= 뭐야! 예, 예메라 그 미친년의 촛대는 또 어디서 난 거야!
다급한 아이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문제지?]
= 그거 꺼! 끄라고!
굳이 놈의 말을 전해 주지 않았다.
끄라고 해서 레나가 끌 리도 없다.
그녀는 즐거운 듯 양초로 메달을 그을리기 시작했다.
= 끄. 끄아아아악! 으아악! 히, 끄,
끄아아악.!
머릿속에서 놈의 비명이 시끄럽게 울렸다.
불쌍할 정도였다.
“고통은 느끼는 것 같은데?”
레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다행이네요. 이걸 산다고 아편굴을 통째로 내줬거든요. 효과는 확실한 물건인가 보네요.”
“탈출할 기미는요?”
= 끄아아아아.! 히, 히익, 그만!
“.딱히 없는 것 같군.”
아이작의 비명이 이어졌다.
레나는 계속 메달을 이리저리 그을려 갔다. 아무래도 실험이 목적은 아닌 것 같았다.
양초 하나가 다 녹아 없어졌을 때였다. 모든 걸 잃은 듯 흐느끼는 아이작에게 말을 걸었다.
[야.]
: 흑흑. 혹흑흑,
[어이.]
= 이럴 수가. 내가 이런 치욕을 당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나를 가두려고 한 거 아니었나?
왜 네가 갇힌 거지?]
= 내가 할 말이다! 내 주술이.
이렇게 장난처럼 튕겨지다니.!
봉인 단계도 아니었다.! 이름.
고작해야 네 이름을 찾으려고 하는 단계에서 튕겨 나갔어.!
그때 였다.
“스승님? 그놈이랑 얘기 중이세요?”
“아, 일단.”
레나가 새 양초를 꺼내서 은촛대에 꽂는 동작을 취했다.
“구울까요?”
= 안 돼! 안 된다고 해!
≪ ?., ,
.?
= 제발. 부탁이다.
“잠시 보류하자.'
“네, 스승님.”
레나가 양초를 촛대 침에서 멀리 떨어트렸다. 하지만 양초도 촛대도손으로 잡은 채로 있었다.
나는 아이작에게 말했다.
[네 말도 못 믿겠고, 솔직히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녹이다가 바다에 가라앉히는 게 딱일 것 같은데.]
= 너. 원하는 게 뭐냐? 원하는 게 뭐든 들어줄 수 있다. 지금쯤 내 추종자들이 편지를 받았을 거다. 내교 단을 찾아가. 너 안에 내가 있다고 말해! 수천수만의 교도가 네 손짓에 복종할 거다.
“.그렇다는데?”
레나에게 놈의 말을 털어놓았다.
“흐음. 고민되네요.”
= 고민할 게 어딨나! 당연히 날 데려가야지!
“거참, 시끄럽네.”
“구울까요?”
아이작은 금세 조용해졌다.
나는 레나와 잠시 상담했다.
처분한다면 이곳에 두는 것보다 역시 우리 손으로 폐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 달그락.
나는 그을린 메달을 잡고 대검 가드 부분에 슬쩍 걸쳐 놓았다.
- 철컥.
배낭을 뒤졌다.
빈 병을 레나에게 보여 줬다.
몸에 전부 부어 버린 탓에 루-륨은 텅 비어 있었다.
단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작이 내 몸의<회로>를 만드는데 전부 써 버린 것이다.
“.미안하다.”
“뭐가요?”
“네가 써야 할 물건인데. 놈을 막지 못했어.”
레나가 수도에 가져가야 할 물건.
T&T의 지부장이 되는 데 사용해야할 은빛 액체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게. 힘든 일을 당하면서도 계속 절 생각해 주셨다는 게 감동이에요.”
레나가 다짜고짜 나를 와락 껴안았다. 몸이 가볍게 떨렸다. 그녀의 떨림을 느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메달이 발아래로 떨어졌다.
밤톨이가 메달을 밟고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내가 안다!
바닥에서 밟히고 있는 아이작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레나에게 어정쩡하게 안긴 채 대답했다.
[뭘 안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