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1)
지하로 내려가는 긴 계단이 드러났다.
잘 깎인 계단이 끝도 없이 늘어져있었다.
“가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동굴은 점점더 넓어졌다.
십여 분 정도를 내려갔을 때.
안쪽 어딘가에서 은은히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동굴 안에 이런 곳이 있다니.
탁 트인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펼쳐진 수풀.
그 뒤로 보이는 거대한 건물.
한 채가 아니었다.
큼지막한 녀석만 다섯.
여러 건물이 일정한 패턴에 따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와. 여기서 살아도 되겠는데요?”
레나의 목소리에서 설레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쪽 넓이만 해도 엄청나다.
단순히 넓기만 한 게 아니다.
절벽 가운데 있어, 밖에서는 극히 발견하기 어려운 입구.
문 역할을 하는 정교한 기관 장치.
완성되어 있는 커다란 건물들.
적당한 온도와 빛까지.
세계와 불화하는 자들이 숨어 지내기에 이만한 장소도 없을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사원은 수십 수백이 함께 살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수련에도 좋겠군.’
지금까지는.
줄곧 에라스트 근방 동굴 미로에서 수련했다.
발견되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다.
하지만 폭이 협소하다.
마법까지 습득한 지금.
마음껏 몸을 풀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사방 수백 미터가 훌쩍 넘는 이장소라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수련이 가능하다.
“이게 네 교단인가? 대단하군.”
나는 아이작을 약간 치켜세웠다.
실제로 감탄했으니까.
하지만 녀석은 가볍게라도 우쭐하지 않았다.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조가 점점 어두워졌다.
= 안쪽. 으로.
아이작의 안내에 따랐다.
무성한 수풀을 지나 사원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한층 더 고요했다.
풀벌레 소리조차 없었다.
사원 입구를 지나.
십여 분을 더 들어간 뒤였다.
“여긴가? 루-륨이 있다는 장소가?”
사원의 중심부.
십 층 높이.
족히 삼십 미터는 될 것 같은 탑앞에 도착했다.
우뚝 솟은 탑이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이작은 짧게 긍정했다.
= 그렇다.
“으음.
칼을 쥐고 탑을 향해 올라갔다.
여전히 어떤 기척도 잡히지 않았다.
- 저벅.
계단을 하나씩 밟을 때마다 차가운적막이 주위에 내려앉았다.
레나도 밤톨이도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딛고,- 구구궁.
돌로 된 문을 옆으로 밀어젖힌 순간이었다.
“아.
레나의 탄식이 들렸다.
곁에 선 그녀의 몸이 살짝 떨려왔다.
'무스.?w문을 여는 사이에 위쪽을 올려다본 모양이었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랐다.
탑 내부를 살폈다.
- 철컥.
몸이 굳어진 채 그 자리에 가만히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여기 있었네요.”
레나가 서서히 떨림이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다.
모두가 이 탑에 매달려 있었다.
= 이럴. 어떻게 이럴 수가.!
- 달그락.
-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우리가 들어간 탓일까.
탑의 공기가 작게 흔들렸다.
층층이 거꾸로 매달린 해골들이 텅빈 몸을 움직였다.
= 아. 아아.! 아아아아.I아이작의 감정이 출렁거렸다.
매달린 해골은 삼백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놈의 격렬한 반응으로 보아.
네 후손이냐는 질문은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 꿀꺽.
레나가 작게 침을 삼켰다.
“죽은 지 얼마나 된 건지는 모르겠네요. 백 년? 이백 년.?”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여신의 사제? 성기사들?
고위급 모험가?
몇 가지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혹시. 재의. 수도회일까요?”
레나가 속으로 생각한 내 의문을 읽는 것처럼 말했다.
재의 수도회.
사교도와 이단을 압도적인 폭력으로 절멸하는 무리들이다.
“아니, 방식이 달라.”
그들은 전부 부수고 태운다.
하지만 사원 건물은 멀쩡했다.
방화의 흔적도 없었다.
이건 너무 깔끔하다.
= 아래를. 아래를. 봐라.
아이작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아래로도 지하 2층 정도가 있었다.
“이게. 뭐죠?”
바닥에는 둘레를 따라 기괴한 글자가 새겨진 이중 원과, 원 안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무늬가 보였다.
= 이놈들이었나. 내 후예들이.
그 찢어 죽일 곰 새끼의 제단에.
제물로 바쳐지다니!
“곰. 이라구요?”
레나가 갸웃했다.
= 그래. 푸르손이다.
“푸르손이라고?!”
그 이름이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격한 반응에 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아이작이 말을 이어 갔다.
= 그래. 혼에 각인을 새기는 제사가 지내졌다.
“동의가 필요할 텐데.
내 말에 아이작이 쏘아붙였다.
= 왜 아는 척이냐?
= 효율은 떨어지지만, 산 채로 고문하면서 제물로 바칠 수도 있다.
내 후예들은. 마지막 숨소리 하나까지 푸르손에게 바쳐진 거다.
푸르손.
각인.
그 단어의 조합이 낯설지 않았다.
나도 T&T의 이너 서클에게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제안은 거절했다.
나도 레나도 모두 살해당했고.
하지만.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푸르손의 각인이 찍힐 수도 있었던 건가 싶어 섬뜩해졌다.
슬라임이 나름대로 날 배려해서,
깔끔하게 끝내 준 건지도 모른다.
슬라임이 준 목걸이를 버렸던 게 괜히 미안하게 느껴졌다.
= .일단 밖으로 나가라. 여기.
더 못 있겠다.
≪ ? , ,
ㅠ.
수많은 제 후예의 시체를 눈앞에 두고도 아이작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감정을 수습했다. 충격이 극에 달하면 오히려 냉정해진다더니 마치그 모양인 것 같았다.
놈은 우리를 탑 왼쪽 벽 앞에 세웠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단단한 벽이었다.
“뭐지?”
= 나를 손에 감아쥐어라.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말고. 천천히 앞으로 손을 내밀어.
“그냥 벽이잖아?”
= 통과에는 강렬한 자기암시가 필요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조금씩 내 지시에 따라라. 앞으로.
- 쑤욱!
놀랍게도 손이 안으로 들어갔다.
- 툭.
손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어떻게 된 거지?”
= 잡아. 그대로 당겨.
아이작의 말을 따랐다. 아무것도 없는 벽에서 쑥 하고 커다란 상자가 끌려 나왔다.
옆에 서 있는 레나가 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 흠. 너랑 어울리지 않는 똑똑한 인간이군. 보통 이런 건 지켜보는 녀석이 있으면 몇 번씩 실패하는데. 네 암시에 방해를 하기 않기 위해 신음도 안 흘리고 있었다.
“부끄러니까 닥치세요.”
= 크흠. 칭찬해 줘도 지랄이냐.
“불붙일까요?”
.상자나 열어 봐라.
상자의 외관은 몹시 수수했다. 재질은 금도 은도 아니었다. 직육면체로 된 커다란 납상 자였다.
tt ㅇ , ,
잡.
- 덜컥.
손만 가져다 대자 상자가 덜컥 열렸다.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건.
“하나, 둘, 셋.
1리터짜리 유리병에 담긴 루-륨.
모두 열두 병이었다.
= 한 병만 꺼내 가라는 소리는 안하겠다. 다 가져라.
나는 놀라서 숫자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열둘이 맞았다.
강철 골렘 여섯 기에서 빼낸 게전부 두 병인 걸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의 양이었다. 다시 한 번 감탄하며 녀석에게 물었다.
“이 많은 양을 어디 쓰려고 했던 거지?”
= 연구와 실험. 다 끝내고 남은 양이다.
나는 열두 병의 루-륨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한 병만 있으면 레나 시나리오를클리어할 수 있는 은빛 마력액을,
열두 병이나 가져 버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눈앞에서 열두 병을 보아 버렸지만, 이 마력액은 지금껏 열 번이 넘는 생을 반복하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던 귀한 물질이었다.
그때 였다.
레나가 끼어들었다.
“이렇게 협조하는 이유가 뭐죠? 복수. 인가요?”
= 당연하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을 절멸시키는 걸 도와다오. 그 버러지 같은 놈들이.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봉인되자 감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잘해 줬다고?”
= 전부 생매장시킬 수도 있었는데. 광산 노예로 대접해 줬다.
할 말은 많지만 안 하기로 했다.
레나도 같은 심정인 것 같았다.
= 내가 그릇을 찾는 걸 도와다오.
“새로운 그릇을 찾는다고요? 또 누굴 어쩌시려고.”
레나가 톡 쏘아붙였다.
= 너희에게 빙의할 생각은 없다.
일단 푸르손의 무리를. 그리고 놈들을 도운 배후를 캐고 싶다. 부탁이다.
“스승님에게는 무슨 이득이 있죠?”
= 내 지식을 전수해 주마. 일단은. 루-름 한 병을 열어 봐라. 지금 네 상황이 엉망이다.<혈관>만 있고, <피>가 돌지 않는 상태지.
“이건 레나에게 줄 건데.
“전 괜찮아요, 스승님.”
= 많이 써 봐야 세 병이다. 저 아이는 한 병만 필요한 거 아니야?
“으음.
이미 레나는 뚜껑을 딴 유리병을 내게 내밀고 있었다.
- 추르록!
아이작의 말대로 하자 루-름이 몸으로 홀러 들어갔다.
우우우어두우면서도 은은한 빛이 온몸에서 새어 나왔다. 두정골 쪽에서 시작한 흐름이 쇄골로, 갈비뼈로, 손끝발끝으로 퍼져 나갔다.
= 한 병 더. 이번에는 손끝부터 부어.
아이작의 말을 듣고 있는지, 옆에서 레나가 이미 딴 유리병을 내게 건넸다. 받아 들고 다시 왼쪽 손끝부터 부어 갔다.
어떤 폭발적인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따듯하게 몸을 포근히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빛과 열이 온몸을 아울렀다.
- 우우우웅.!
세 병째를 오른쪽 손끝에 부었을 때.
은은하게 새어 나오던 빛은 아예 자취를 감춰 버렸다. 하지만 몸 곳곳을 흐르는 어떤 기운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 기본적인 세팅은 끝냈다. 이제.
네 수준에서는 아무리 힘을 써 봐야소모량보다 자동으로 채워지는 양이더 많을 거다.
“자동으로. 채워진다고?”
= 그렇다. 아까 했던 짓을 그대로해 봐라.
- 파앗!
나는 앞으로 뛰쳐나가며 크게 칼을휘둘렀다. 검기를 유지한 채로, 한쪽의 돌담을 향해 냉기 폭풍을 발동시켰다.
- 우우응!
몸을 타고 도는 기운이 전해졌다.
- 사가가각!
아이작이 내 몸에서 사용했을 때보다 두 배는 강한 위력의 냉기 폭풍이 대검에서 뿜어졌다.
- 퍼걱! 퍼걱! 퍼거걱!
높이 3미터가 넘는 돌담이 엉망으로 난자되며 얼어 갔다. 인간 부대에게 사용했다면 수십 명을 즉사시킬 정도의 강력한 위력!
“으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힘이었다. 게다가 힘을 뽑아내는 데전혀 부담이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자연스러웠다. 힘의 출력이 전보다훨씬 강화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걸 온전한 내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스킬이 생긴 것도 아니지.’
기스-제-라이에게서 정수 흡수 스킬을 받았을 때와는 다르다. 죽고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루-름으로코팅된 이 회로가 몸에 남아 있을지어떨지는 알 수 없다.
‘원리를 알아내야 한다.’
이 회로에 대해 알아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아이작과 계속 동행해야 한다.
놈을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한다.
나 혼자 마음대로 결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레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멍하니 눈만 깜빡이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나.”
“.네, 스승님.”
“챙길 건 챙겼으니까, 바로 제국수도로 들어갈까? 이것만 있으면 바로 지부장이 될 텐데. T&T에서 제한 없는 정보 열람 권한을 갖는 거야. 어떻게 생각하지?”
“저, 사실은.
“뭐지?”
“조금 천천히 움직이고 싶어요.”
그녀를 최대한 배려해서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왜지?”
“절 그렇게 도와주시고 나면, 또떠나 버리실 지도 모르잖아요. 전 천천히 움직여도 좋아요.”
뜨끔했다.
아니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반쯤은 떠보는 질문을 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한층 그녀에게 미안한마음이 솟아올랐다.
“음. 혹시 원하는 거 있나?”
“제국 수도로 바로 가고 싶지는 않아요. 사실. 검술을. 배우고 싶어요.”
레나가 약간 부끄러운 태도로 눈빛을 아래로 돌리며 말했다.
그걸 원했던 건가? 물론 어려울 건 없었다.
= .놀고들 있군. 여기서 머물 거냐?
그렇다면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뭘 바라지?]
- 결계를. 교단의 결계를 복구해줘라. 내가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이렇게 된 꼴을 보니 비참하기 짝이 없군.
[흠.]
아이작의 후예들이 모두 제물로 살해당했지만, 놈은 아무도 없는 옛교단의 결계라도 다시 세우고 싶어 하고 있었다.
물론 나로서는 나쁠 거 없는 거래였다. 결계 술을 배워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