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⑷
“이제 곧 도착이에요!”
레나가 손을 들었다.
가지고 있던 망원경을 내리고 내 쪽을 바라봤다.
과연 저 멀리 도시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그라스미어보다 엇비슷하거나, 조금 더 큰 도시였다.
서서히 지는 해가 도시의 성벽을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저기가 아만인가?’
물론 나는 처음 방문하는 도시다.
아만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점점 가까이 다가가자 도시의 모습이 조금씩 더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작의 말대로 서쪽 사막 지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인 둣, 도시전체를 감싸고 있는 성벽의 양식이 조금 독특했다.
= 300년 만에 오는 아만인가_아이작이 과거를 회상하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 감회가 새롭군.
나 역시 그러했다.
예전에 와 본 적은 없으나, 이런인간의 대도시들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다시 회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더라면.
완전히 부서진 채 전혀 움직이지못하고 있을 것이다.
기스-제-라이가 내게 전해 준 정수 흡수 능력이 없었더라면.
이런 곳에 올 수 있었다고 해도,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성문에길게 늘어선 줄은 없었다.
대신 경비병들이 창을 곧게 세우고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다가오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신분증을 제시하셔야 합니다.”
“여기요.”
레나는 그라스미어의 영주가 만들어 준 가짜 신분증 두 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완벽합니다.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투구를 벗어 보라는 말도 없었다.
아만의 영주도 다를 게 없다.
그라스미어의 무기 공급에 살살 눈치를 보는 처지인 것이다.
- 다그닥! 다그닥!
순식간에 그라스미어의 특사가 된 우리는 당당하게 다섯 필의 말을 몰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문장은 성문 양쪽을 다 활짝 열고 우리를 도시로 들여보냈다.
슬슬 해가 지는 탓인지 주위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레나는 주위를 빠르게 살피며 앞장서 나를 달리아크로 안내했다.
담이 조금씩 높아지고.
골목의 폭은 반대로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전부 부숴 버리지 않는 한 대검을 휘두르기 불편할 것 같다.
‘탐지.’
탐지 스킬을 써서 사방을 다시 한번 빠르게 촘촘히 훑었다. 하지만수상해 보이는 기척은 없었다.
누군가 나를 따라오는 기척도 전혀없었다. 레나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오던 중 바람이 불었을 때.
바로 옆으로 오는 바람이, 무언가투명한 장애물을 지나 불어오는 것 같았을 때.
그때도 기척은 전혀 없었다.
‘후우.’
= 뭘 겁먹고 있냐? 갈 거면 빨리들 어가든가. 결계 처음 봐?
“뭐?”
나는 놀라서 그만 소리를 내어 아이작에게 대답해 버렸다.
= 그래. 그렇게 가르쳤는데 한 번에 못 알아보냐?
“결계라고?”
내 말에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 해치는 결계는 아니다. 감정을 안정시키고 평화로운 기분이 들게 해 주는 결계지. 들어가면 된다.
≪ ?.≫
"W.?
나는 아이작의 말을 레나에게 전달해 줬다.
“그냥 얌전하게 만드는 결계라 고하는군. 넌 어떻게 하고 싶지?”
레나가 어깨를 으쪽했다.
“저 안쪽을 철저한 안전지대로 만들고 싶은 건가요? 왠지 저 녀석들 의도대로 따라가고 싶진 않네요.”
“그럼 어쩌지.
= 결계의 신인 나를 두고서 대체무슨 걱정이냐? 내가 시키는 대로 걸어라. 먼저.
우리는 말에서 내린 뒤, 아이작의말에 따라 한 걸음 한 걸음을 패턴에 따라 걸었다.
한 발자국.
다시 한 발자국.
아이작의 설명은 꽤 복잡했다.
교단에서 결계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더라면, 지시가 무슨 말인지도 알아듣지 못했을 듯하다.
놈의 교단 결계를 복구해 주며 나 역시 은연중에 많은 배움을 얻은 것이다.
아이작은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가라고 말하기도 하고, 왼쪽 돌담에 붙어서 계속 같은 곳을 빙빙 돌게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삼십 분 정도를 들어가자결국 골목은 여관 입구로 통했다.
- 화르록!
얼핏 보기에도 서른 채가 넘는 건물이 이어진 거대한 여관.
그 마당에 몇 개의 커다란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회원이십니까?”
하얀 가면을 쓴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물었다.
마당에 서 있는 건 그 여자 하나였지만, 건물 안쪽 사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기척이었다.
= 눈동자를 흐려라. 멍한 척해. 결계의 영향을 받은 척!
“아니요. 그냥 하룻밤 머물려고 왔어요. 괜찮. 을까요?”
“비회원 구역은 이쪽입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나의 연기가 훌륭했던 걸까.
아니면 적당히 넘어갈 생각인지,
여자는 별말 없이 우리를 여관 한쪽으로 안내했다.
= 여기도 전부 결계다. 흔들리는 횃불을 쳐다보지 말고 걸어라.
아이작의 말은 레나에게도 전해지는 채였다. 여자가 안내한 곳으로 가자 약간 멍한 표정의 인간들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 결계에 영향 받은 녀석들이지.
[네가 만든 결계냐?]
= 흐하핫. 아니다. 이건 300년전에도 있었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결계지.
[누가.]
=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모른다고 일일이 다 묻지 마라. 내가 네가 정교사냐?
아무래도 모르는 걸 내가 물어봐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 찾을 게 있다고 하지 않았냐?
빨리 경매에나 참가해 봐라.
가면을 쓴 여자는 정보 경매에 참가하는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밖에 다른 건 전혀 말해 주지 않은 채 우리를 놔두고 돌아갔다.
나는 여자가 안내해 준 방 밖으로 나와 주변을 천천히 돌아봤다.
가면을 쓴 자는 우리를 안내했던 여자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얼굴을 드러낸 손님이었다.
“일반인들인가.”
= 다들 하나같이 멍청한 표정들을 짓고 있군.
“레나, 방값은?”
“일단은 후불이에요. 합쳐서 나갈 때 청구한다고 하네요.”
장소 외에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가 버린 여자 대신, 레나에게 다시 한 번 경매에 대해 들었다.
회원권을 가진 판매자가 중개자 역할을 하는 달리아크에 정보를 위탁한다.
달리아크의 경매 담당관이 정해진 기간 동안 정보를 가지고 있다가,
그 시기에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자에게 정보를 판매한다.
일정 이상의 가격을 부른 자에게 팔아넘기거나.
중개인 외에는.
누가 뭘 팔았고, 누가 뭘 샀는지전혀 알 수 없다.
나는 여자가 알려 준<경매장>으로 혼자 들어갔다.
경매장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작은 건물이다.
오직 한 명만 입장하는 게 그곳의 철칙이었다. 레나도 나를 따라 들어올 수 없었다.
밤톨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이작은.
메달이다.
그냥 적당히 덜렁덜렁 들고 가면 상관없는 존재다.
나는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별일 없겠지? 레나에게.]
= 달리아크는 모든 종류의 폭력이매우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정보 상들과 암살자들이, 한 군데서는 편히 마음 놓고 쉬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곳이 바로 여기지.
[누가 만든 거냐?]
= 한 번에 하나씩 해, 무식한 놈.
[그건 모르는군.]
그때 였다.
“정보를 사러 오셨소이까.”
장막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멍한 척해라.
“"?으음. 그렇소.”
= .연기 하나 제대로 못 하냐.
반대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말을이었다.
“인간이 아니고. 결계에 영향을 안받으셨군.”
“.!”
나는 놀라서 몸이 굳었다.
[어차피 다 꿰뚫어 보고 있는데?]
= 없어 보이게 쫄지 마라. 달리아크를 운영하는 놈들이 먼저 폭력을쓸 일은 없을 거다. 300년 전처럼 전통이 유지된다면.
과연 아이작의 말대로였다.
“뭐, 인외人外라도 상관은 없소.
비폭력 원칙만 잘 지켜 준다면야.”
빠르게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투구도 벗지 않았다.
하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는 단한 번에 내 정체를 알아챘다.
진짜 강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제국 안에서 <중립적인>지역을 운영한다는 게 강한 힘을 요구하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장소에, 온갖 정보 상인및 암살자들이 쉬러 온다는 걸 생각한다면.
위험한 자들에게 평화를 준다?
그러면 그 모두를 짓밟을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야, 재가 너 쳐다본다.
아이작이 나를 재촉했다.
장막 뒤의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으흠. 정보를 사러 왔는데.
“처음이로군.”
“그렇소.”
“본인이 직접 원하는 건가?”
= 누구 똘마니냐고 묻는 거다. 네가 직접 원한다고 해. 안 그러면 말이 길어질 수 있으니까.
“그거야. 당연하지.”
“당연, 하다? 호오.”
장막 뒤의 목소리가 잠시 침묵 을이어 갔다.
상대가 어떤 자인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나이도.
성별도 명확하게 읽어 내기가 어려웠다.
어떤 강한 조직에 속해 있는 녀석일까?
네크론? T&T? 아니면.?
하지만 달리아크가 특정한 인간 조직에 속해 있는 장소라면.
적대 조직의 인간들이 편하게 쉴리가 없다.
장막 뒤에서 나를 살피던 상대가 하나씩 질문을 시작했다.
정보를 팔기 전에, 간단히 조사를해 보려는 것 같았다.
[원래 다 이러냐?]
평범한 인간이면 그냥 팔았을 확률이 높겠지. 해골이니까 하는 고생이라고 생각해라. 내가 시키는 대로 대답하면 될 거야.
십여 분이 흘렀다.
상대가 던지는 질문을 아이작이 시키는 대로 모두 대답했다.
상대는 적당히 안심한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어떤 정보를 원하지?
가장 신선한 정보는 중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거야. 위치가 위치다 보니, 특히 수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알기가 쉽지.”
아만에서 제국 수도까지는 닷새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다.
“나는.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에 대해 알고 싶소.”
“레안드로 후작? 푸른 사자 기사단의 마스터를 말하는 건가.”
“그렇소.”
“음. 좋아. 그 정보는 최근에 들어왔군! 운이 좋은 친구야.”
대답은 즉각적이다. 머릿속에 전부장부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정보는 드물게 딱 정가를 매겨서 파는 녀석이라네. 구질구질하게경매를 붙을 필요도 없지. 돈만 내고, 바로 가져가면 그만이야.”
“???얼마요?”
“80세이론일세.”
= 하. 저 새끼가.!
[비싼 거냐?]
= 당연히 바가지지!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대충 팔아넘기라고 가져오는 정보다. 떨거지 같은 정보일 게 뻔한데 그걸 80세이론을 받아 처먹는다고?
“너무 비싼데.
“정가제일세.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보가 중요한 거 아닌가?”
하지만 황제의 마차에서 금괴 몇개라도 주워 왔으면 몰라도.
80세이론.
지금은 그리 간단히 지불할 수 없는 금액이라는 건 확실하다.
나는 머릿속으로 간단히 셈을 굴려보기 시작했다.
1세이론은 100로티.
80세이론은 8, (X)0로티.
루비아가 산 것 같은 풀 플레이트메일을, 200벌은 살 수 있는 금액.
“싫으면 나가시게. 제국 4검주에관한 정보라네. 살 사람은 많아.”
[어떡하지?]
= 후우. 꼭 살 거라면 그걸 써라.
[그거?]
아이작은 영주가 만들어 준 증서를 상대에게 보여 주라고 했다.
장막 뒤로 증서를 보여 줬다.
상대는 그걸 하나씩 차근차근 훑어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증서는 진품이고. 그라스미어의귀빈이셨군. 그럼 청구는 그쪽에 해도 되겠어. 이런 증서를 만들어 줄 정도면. 신용은 충분하니까.”
“ ?.≫
*급".?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아이작에게 말을 걸었다.
[그라스미어 영주는 이런 녀석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거냐? 너무 그쪽에 다 던지는 느낌인데.]
= 그걸 왜 네가 걱정하지? 그냥당장 정보만 얻으면 되는 거지.
아이작의 사고방식에 할 말을 잃어가고 있을 때, 장막 뒤의 상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잠시 기다리시게.
- 쿠구구구궁.!
바닥이 꺼지는 소리 같았다. 장막저편의 단단한 돌바닥 어딘가에서땅이 꺼지고 있는 것이다.
아이작이 내게 말을 걸었다.
= 쫓아갈 생각은 없냐? 가서 다빼앗아 보든가.
물론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다.
아이작도 진심은 아닐 거다.
아무 대비 없이 저기 몸을 던지는 건 멍청한 짓이다. 온갖 기계, 마법함정과 결계가 빼곡할 거다.
방금 전의 인간 한 명도 만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30분쯤이 지났을 때.
- 쿠구구구.!
바닥에서 올라온 상대가 나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내게 건넸다.
밀랍으로 면 전체가 봉해져 있는 두루마기 였다.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에 관한 가장 신선한 정보일세. 판독관이80세이론을 불렀으니 그만한 가치는 있을 거야. 잘 활용하시게.”
- 화르르!
옆 난로에 불이 켜졌다.
“여기서 읽고 태워 버려도 되고,
가져가도 상관은 없네. 그럼 10분후 퇴장해 주게나. 허용된 시간이거기까지 니까.”
나는 두루마리의 봉인을 뜯기 전,
장막 뒤의 상대에게 물었다.
“이야기하게.”
“캐빈 애슈턴에 관한 정보는 갖고 있소?”
“없네.”
대답은 즉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