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5)
단호하게 끊어 내는 대답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조금 더 알아보겠다거나.
가지고 있는 정보 목록을 조회해보겠다거나 하는 이야기조차 없다.
일말의 여지도 없는 거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궁금해 하는 동안.
“그럼 들어가겠소이다.”
장막 뒤의 상대는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공간. 홀로 남겨진 나는 두루마리를 풀었다.
후작에 관해 읽는다.
무슨 정보가 적혀 있을까?
혹시 이 도시에 녀석이 머무르고 있지는 않을까?
나를 쫓아오고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사이, 내 손은 어느새 두루마리의 봉인을 뜯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두루마리에 적힌 첫 줄을 확인하자 팽팽한 긴장이 순식간에 툭 끊어졌다.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출생: 1118년, 향년 29세 / 사망 작위: [前]대상조 [前]관내후소속기관: [前]푸른 사자 기사단총단장 / 전투원수元的기사단 내 석차: 번외番外부모: .
거주지: .
취미: .
하지만 아래에 적혀 있는 것들은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출생: 1118년, 향년 29세 / 사망사망.
사망.
사망.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의 이름과 그 아래 적힌 사망이라는 글자를 나는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봤다.
하지만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물론 동명이인일 가능성은 없다.
바다로 나가서 크라켄이라도 다시한 번 사냥한 걸까?
그자가 죽었다는 게.
누가 그를 죽일 수 있었다는 게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자세한 사항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황실에 대한 반란을 꾀하던 중,
은밀히 살해당한 뒤 자살로 위장.>
두루마리에는 후작의 간략한 신상정보와 함께.
일이 처리된 뒤 국장이 치러지는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사망은 놀랍게도 사흘 전.
국장은 사흘 뒤에 치러진다.
서두른다면 장례가 치러질 때를 맞춰서 갈 수 있다.
= 자살 당했네.
아이작이 툭 내뱉었다. 그 웃기는 조어를 가만히 곱씹다가 녀석에게 물었다.
[반란을 꾀했다면. 공공연하게 처형하는 게 정상 아닌가?]
국장國葬.
인간들의 국가에 공로가 큰 자가 죽었을 때 치르는 예식이다.
반역자에게 그런 예우를 갖춘다는 건 명백히 괴이한 일이다.
= 큭큭큭. 고민하다 선택한 거지.
제국을 대표하던 4대 검주 중 한명이니까. 공식적으로는 한 영웅의비극적 자살로 만든 게지.
= 게다가 푸른 사자 기사단 총단장이잖아? 황실 반역죄로 처형하면 밑에 애들이 안 불안하겠어? 전쟁을 앞둔 상태에서 말이야.
[대체 왜? 누가? 자살했다고 하는 것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
정말 이 남자가 반역을 꾀했을까?]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아이작이 기묘하다는 듯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 이유야 만들면 되지. 말수 적고외톨이인 녀석이라며?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면 안 믿고 어쩔 건데?
[그런가.]
= 근데 얘한테 관심 있는 이유가 뭔데? 팬이냐?
물론 아이작에게 사정을 설명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나저나.
후작이 죽었다면, 쫓기고 있다는 느낌은 순전히 착각이었던 걸까.
“후우.”
국장이 치러지는 날짜와 장소를 머릿속에 제대로 집어넣었다.
- 화?르르!
적당히 구긴 종이가 화로 속에서 타올랐다. 불꽃이 허공에 어지럽게 튀어 올랐다.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후작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물론 지금 곧바로 제국 수도로 달려갈 생각은 아니다.
레나도, 다른 말들도 쉬어야 한다.
그런데 후작이 죽었다면.
그가 아니라면 누가 날 쫓아오고 있다는 이야기일까?
- 저벅.
나는 미행을 확인하기 위해 같은 골목 모퉁이를 세 바퀴 돌았다.
물론 쫓아오는 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감각에 걸리는 녀석도 없었다.
‘.역시 착각이었나?’
- 끼이익.
나는 마지막으로 길가의 주점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 새로 들어오는 자들 중에서 분명히 추적자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비회원 숙소 구역에서 들어갈 수있는 주점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불이 켜져 있으면, 영업합니다.>
꽤나 긴 간판을 단 주점.
권태가 눈가에 묻어나는 퇴폐적인인상의 바싹 마른 여자가 카운터에서 물 담배를 피고 있었다.
여자가 초록색 눈동자를 깜빡이면서 나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카운터 뒤쪽.
인간 서넛도 들어갈 수 있을 것같은 큰 새장에, 팔색조 두 마리가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가게 안쪽을 돌아봤다.
여러 가지 무늬가 직조된 반투명천들이, 천장에 매달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구분했다.
서넛이 모여 한눈에도 비싸 보이는 술을 기울이는 일행도 있었고,
비스듬히 누워 테이블에 커다란 물 담배 항아리를 놓고 피우는 자들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메뉴판을 보고 맨 위에 있는 물 담배를 주문했다.
“딸기 맛으로.”
“곧 준비해 드릴게요. 테이블은 이쪽이에요.”
가격은 30위젯.
동화 세 개를 먼저 지불한 뒤.
긴 갈색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온 여자를 따라갔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이걸 쓰세요.”
여자가 초록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카운터에서 가져온 일회용 담뱃대를 건넸다.
자연스러운 척 입에 물어 보았다.
= 품. 거꾸로 끼웠잖아.
제대로 바꿔 물고 입구를 가만히 바라봤다. 탐지 스킬을 활성화한채 입구를 집중해서 지켜봤다.
갈비뼈 사이사이를 딸기맛 연기가 가득 메운다.
시간이 지나간다.
하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내 주위에서 수상한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두 시간이 넘게 지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투명한 유리 항아리를 바라봤다.
달콤한 연기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던 항아리엔 액상이 이미 반 이상 줄어들어 있었다.
= 해골 주제에 물 담배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굴지 말라고.
그때 였다.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입구 주위를 바라봤다. 회색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누군가가 내 쪽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혹시 날 미행하던 녀석인가?’
나는 회색 후드를 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드를 쓴 수상한 자는 그 사이바깥으로 사라졌다.
녀석을 따라 입구를 나가려 할 때였다.
“고객님, 계산하셔야 됩니다.”
카운터를 보는 여자가 눈을 깜빡이며 내게 흰 손을 내밀었다.
“계산? 들어올 때 하지 않았나?”
“방금 나간 분께서 손님이 이제 여기로 와서 자기 테이블까지 계산할거라고 하셨는데요?”
“무슨. 들어오는 게 아니라 지금 나가는 거였나?”
“저분, 두 시간이나 계셨는걸요.”
“총 9로티 10위젯입니다.”
여자가 초록색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뭘 얼마나 처먹었길래.!”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외쳤다.
내가 주문한 물담배의 30배가 넘는 금액이 청구됐다.
“너티 볼드에 골든 시럽 다섯 스푼추가, 달 모아 브리냑에 샤토 엠플세 방울 추가. 세쿠어 에일에 노블스위티 여섯 스푼 추가.
“많이 달게 드셨어요. 전부 최고급품만 주문하셔서.”
“헛소리. 난 나가겠소.”
“네? 가신다고요? 돈을 안 내고가시면 곤란한데요.
카운터 여자는 어딘가 약에 취해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앉아 있는 사이 뭐라도 흡입한 걸까.
“그리고 저분이 이걸 전해 달라 고했어요.”
여자가 내게 쪽지를 내밀었다.
바로 펼쳐 보니 적당히 휘갈겨 쓴 글씨로 황당한 말이 적혀 있었다.
<곧 나에게 감사하게 될 거야.>
무슨 소린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괴하게도.
어디선가 이 글씨체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낯익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순순히 카운터에 돈을 내어주지는않았을 것이다.
나는 계산서에 적힌 대로 빠르게 돈을 지불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소란을 일으키면 내가 곤란하다.
회색 후드를 쫓는 게 급했다.
탐지 스킬을 최대로 활성화한 채로상대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해 봐도 여자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범위 안에서 사라질 수는 없었다.
[아이작?]
놈의 조언이라도 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하다.
‘안 부를 때는 시끄럽더니.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다.
방금 밖으로 나간 회색 후드는 내감각을 완전히 따돌린 것이다.
나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왜 나한테 돈을 내게 만들었을까.
뭘 감사한다는 걸까.
의문에 빠져 주위를 계속 살폈다.
내 바로 뒤에 있을 수도.
담장 건너 있을 수도 있다.
지붕 위에서 나를 내려 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날 쫓던 게 정말 그 회색 후드였다는 말인가?
대체 누굴까?
정보가 부족하다.
답답했다.
‘정보가. 빨리 레나를 T&T에서 키워 줘야겠군.’
어둠 속의 조력자를 키워야 한다.
레나의 시나리오를 서둘러 달성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레나와 함께 길을 떠났다. 밤새 배회했지만, 끝내 회색후드는 찾을 수 없었다.
흘끗 레나를 바라봤다.
“푹 쉬었나?”
“네!”
레나는 어제와 달리 피부에 제법윤기가 흘렀다.
짙은 피로감에 찌들었던 어제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자고 가길 잘했군.’
밤톨이는 레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에 쏙 들어간 채안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 다그닥! 다그닥!
우리는 이틀 동안 말을 달렸다. 중간에 있는 다른 던전들을 들를 수도있었지만, 수도까지 가는 길을 조금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푸른 갑옷의 기사.
후작의 장례식을 내 눈으로 참관하고 싶었다.
레나를 한시라도 빨리 T&T 지부장으로 만들어서, 열람하게 하고 싶은 정보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은밀한 욕심도 있었다.
두루마리에 적혔던, 후작이 죽은 날짜가 정확하다면.
이틀 안에 도착하면, 다시 한 번 후작의 정수를 흡수할 수 있다.
정수 흡수 기준은 점점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후작 정도라면 문제없다.
이번에는 녀석에게 어떤 스킬을 흡수할 수 있을지 은근한 기대마저 들고 있었다.
달리아크를 떠난 뒤.
두 번째 보는 석양이 서서히 지기 시작할 무렵.
“스승님!”
- 히히히힝!
레나가 말의 달리는 속도를 천천히 늦추기 시작했다.
“뭐지?”
“이대로 직진하면<좁은걸 협곡>을지나야 해요.”
“좁은걸 협곡?”
“네. 건 국제 세이론이 천 년 전에 지나면서 좁다고 투덜거렸던 협곡이래요. 슬슬 수도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나네요. 세이론과 관련된 지명도나 오고.”
“저 협곡은 길이 하나밖에 없고 좁아요. 누군가가 매복해 있으면 당하기가 쉬운 위치죠.”
“돌아가면 얼마나 걸리지?
“나흘 더 걸려요. 좀 더 무리하면 아슬아슬하게 사흘 반 정도예요. 빨리 가야 될 이유가 없다면.
레나는 아무래도 협곡을 통하기 싫은 것 같았다.
하지만 고민할 것도 없다.
그때가 되면 후작의 정수를 흡수할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다.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바로 협곡으로 간다.”
먼저 말을 달렸다.
한 시간 정도 말을 더 달렸다.
평원이 끝났다. 험한 산악 지대가 우리를 맞이했다.
“여기지?”
“맞아요. 이 산을 넘으면 곧바로 제국 수도예요.”
시나리오 달성이 눈앞이다.
후작의 장례식이 눈앞에 있다.
지형은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을 정도로 좁고 험해졌다.
“들고 가지 않는 이상 못 데리고가겠군.”
우리는 다섯 마리 말을 전부 평원 쪽으로 멀리 풀어놓았다.
좁은 길을 달리다시피 움직였다.
수도에 빠르게 도착하는 게 중요했다.
조금씩 더 깊은 협곡으로 걸어갔을 때였다.
“.스승님! 매복이에요.”
망원경을 들고 주위를 꼼꼼히 살피던 레나가 낮게 말했다.
“사방에 넓게 퍼져 있어요. 수도 쪽에서 나와서 기다린 것 같아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앞쪽 숲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탐지 범위 바깥에서 기척이 계속하나둘씩 추가됐다.
“포위가. 얼마나 넓게 된 건지 잘감이 잡히질 않을 정도예요. 점점 조여 오고 있어요!”
나를 꾸준히 따라왔던 게 아니다.
“이게 무슨.
마치 내가 그물망에 스스로 몸을 던진 것 같은 모양새다.
이 정도 포위망을 칠 만한 상대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에게. 그런 가치가 있나?’
레나의 관측에 따르면 적은 분명앞쪽에서 충원되고 있다.
협곡을 지나면 곧 수도가 나온다.
수도에 있는 세력이 움직였다는 이야기다.
“아이작이 뭔 짓을 한 거 아닐까?
수상한데. 너냐?”
하지만 놈은 달리아크의 주점에 들른 이후 내게 제대로 된 말을 걸지 않고 있었다.
= .글쎄.
“이 새끼가.
대답은 모호했다.
레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일단 빠져나가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