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8)
“이제 믿겠나?”
우리는 나냐우의 은빛 핏방울을 홀린 듯 바라봤다.
손끝에 흐르는 루-륨이, 반드시 그녀가 트로핀 나냐우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도 레나도 모두 묘하게 납득하고 있었다.
달리아크의 주점 이후, 지금까지계속 침묵하고 있는 아이작의 말이 떠올랐다.
<나냐우 그 애새끼는 삼백 년 전에 뒈졌는데, 왜 아직 T&T가 이걸 모으고 있는 거냐?>
나는 그녀의 손가락 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몸속의 피를. 전부 루-룸으로 대체한 건가?”
나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냐우의 손끝에서 솟아난 은빛 피는 현실과 꿈의 접면을 흐르는 것같았다.
어찐지 그녀의 발화를 신뢰하게 만드는 강력한 효과가 있었다.
나냐우가 날 보며 말을 이었다.
“던전에 남긴 말파스의 흔적들. 그건 다 어떻게 된 거지?”
“그게.
잠시 멈칫하고 있을 때였다.
= 아. 八I발、" 아■여I 영혼을_ 다 바친다고 부르짖어도 연결조차 되질 않는군. 이런 개씨발.
내게 한 마디도 걸지 않고 있던 아이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야? 너, 뭐 하고 있었냐?]
= 다 망해서 기분 더러우니까 말 걸지 마라. 마왕을 부르는 대신 너 같은 병신 새끼를 꼬셔 보는 게 나았는데. 이런 개 같은.
조용히 있는 사이.
아이작은 나 몰래 무언가를 시도해본 모양이었다.
꽤나 필사적으로.
안타깝게도 정신이 탈탈 털릴 정도로 실패한 모양이지만.
“으흠.?”
나냐우가 갸웃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도움이 필요한가?”
“아니오. 잠시.”
아이작은 메달 안에 갇혀 있다.
도움이 필요한 건 녀석이지 내가아니다.
트로핀 나냐우.
그가 아이작의 편이 아니라는 건명백해 보인다.
여기서는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한상황이다.
‘이야기나 해 볼까.’
[어이.]
= 어쩌라고?
[무슨 사정이 있는 거냐?]
= .난 널 이용하려고 했다.
[알아. 굳이 말 안 해도 돼.]
어떻게 이용했는지가 궁금했다.
놈은 내 마음을 읽는 것처럼 다음대사를 이어갔다.
= 루-륨 회로에 말파스의 인장을 새겨 넣었지. 힘을 발휘하면 그 흔적을 남기도록 말이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짐작 범위다.
푸르손의 부하들에게 쫓길 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 푸르손의 던전에서 힘을 쓰는 것만으로도 놈의 제사가 훼손되지.
내 교단을 멸망시킨 놈들과 너를 부딪히게 만들려고 했다.
- 놈들을 죽일 수 있을 때까지 죽이면서, 널 단련시켜 주려고 한 거야! 푸르손 놈들이 이렇게까지 함정을 치고 있는지는 몰랐다!
[날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냐? 네가 죽으면 나는 이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진다. 완전히 묻혀버리는 거라고!
전부 거짓말일까?
나는 아이작에게 물었다.
[그걸 지금 와서 말해 주는 이유가 뭐지?]
= 나냐우에게 의존하지 마라!
[못 믿을 타입인가?]
= 저 새끼가 300년 동안 도대체뭘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씨발. 지금 극적으로 나타나서 널 구출할 필요가 있었겠냐? 진작에 빼내 줬으면 됐지. 이거 전부 다 짜 고치는 거야. 쇼하는 거라고. 같은 패거리야.
[음.]
내가 약간 흔들리는 것 같자.
아이작은 한층 빠르게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 그라스미어 영주의 정신을 공유하면서 얻은 정보가 있거든. T&T길드는 사실 처음부터 푸르손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진 거야!
‘거짓말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과거를 회상했다.
레나와 함께 녹아 죽었던 때.
우리를 둘러싸고 회유하려 했던 제국 3본부장 레트릭 아에자르와T&T의 간부들을 떠올렸다.
힘이 강하고 자리가 넘쳐 난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자신이 엄연히 ‘길드 내의계파’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푸르손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계파 따위에 그칠 리가 없다.
나는 모르는 척 말했다.
[그런가?]
아이작은 강하게 날 밀어붙였다.
= 그래! 그런데 창립자 나냐우가 너를 구출한다고? 이게 말이 되는 거라고 생각하냐?
= 지금부터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해. 아주 중요한 시점이다.
여기서 발 한번 잘못 디뎠다간.!
‘차단.’
나는 아이작을 차단했다.
녀석의 말에는 듣다 보면 자꾸 솔깃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에게 회유당한경험이 없었다면, 지금보다도 더 마음이 흔들렸을 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류를 지적한다고 해도 아이작은또 다른 논리를 내세웠겠지.
어쨌건.
눈앞에 주어진 상황만 놓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작이 나를 함정에 빠뜨린 건아무리 봐도 명확한 사실.
회색 로브.
자기를 트로핀 나냐우라고 말하는 여자는 나를 구했다.
간단하게 가기로 했다.
- 짤그랑.
그라스미어의 전경이 새겨진 금속메달을 나냐우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기념품인가?”
나냐우가 이리저리 메달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럴듯하게 만들어지긴 했군.”
나는 태연한 척 질문을 뱉었다.
“아이작이라고 알고 있소?”
그 순간.
- 짤. 그랑.
금속 메달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아이작의 발악인가?’
스스로는 필사적인 것 같았지만 그 움직임은 극히 미미했다.
바닥에 놓으면 제 무게를 감당치못하고 그저 가만히 있을 정도의 힘으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작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나냐우의 몸이 흠칫 굳었다.
“???300년 전의 대주술사 아이 작말인가? 모를 리가 없지.”
메달이 조금씩 더 떨리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메달을 향했다.
나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 녀석이, 여기에 갇혀 있소.”
아이작을,
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벨’호멧 아이작.
놈의 말을 하나하나 진위를 감별해가며 들을 자신이 없었다.
나 혼자였다면 모를까.
레나와 함께 있는데, 나를 위기에 처하게 만든 녀석이 괘 씹했다.
흑발의 미남자가 머리를 살짝 옆으로 젖히며 끼어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나는 남자와, 마법사와, 나냐우를한 번씩 바라보고 말을 시작했다.
“처음에.
내 진명眞名을 찾아 무덤에 갔던 일은 제외하고.
성에서부터 아이작과 있던 일을 슬쩍 각색해 털어놓았다.
몸속에 새겨진 루-름 회로까지도 전부 말했다.
사실에 거짓을 아주 조금 섞어서.
이야기가 쓸 만했던 모양이다.
“오오.r다들 탄성을 지르며 놀라워했다.
‘이거 어째 속여 먹기 쉬운 부류들 같은데.
가장 놀란 건 트로핀 나냐우.
“맙소사. 그 아이 작이.! 이런 작은 메달에 갇힌 신세가 됐다니.
확인해 봐도 되겠나?”
이번에는 내가 놀랐다.
‘봉인을 확인할 수 있는 건가?’
하긴 혼을 봉인할 수 있다면.
혼이 봉인된 걸 확인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겠다 싶었다. 태우고 얼리는 것만 마법은 아닐 테니까.
“.그런 게 가능하다면.”
나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루네아?”
“네, 시조.”
눈과 입가에 검은 점이 찍힌 마법사가 두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후우우., ,
마법사는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눈의 초점을 메달을 향해 차분히모으며, 마법사가 작게 중얼거렸다.
“봉인감정.”
- 스르르륵.
지팡이에서 나온 하얀 기운이 메달을 살살이 훌었다.
마법의 냄새가 피어났다.
차가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메달의 숨구멍 하나하나가 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은밀한 그곳을 하얀 기운이 자꾸 부드럽게 쓸어 갔다.
‘저런 게 마법인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10분쯤 지났을 때.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나온 하얀 기운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결과가 나온 걸까.
“아.:,
살짝 벌어져 있던 루네아의 입이한 층 더 벌어졌다.
놀란 나머지 숨도 제대로 못 쉬는 표정 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최소한. 마왕급 이상의 봉인이에요! 봉인만 보면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을 정도예요.”
“호오.
옆에 서 있던 흑발 남자가 작게 탄식하며 팔짱을 풀었다.
“세레네티 타워의 수석 마법사가 손댈 수 없는 봉인이라.
“페르산, 쓸데없이 시비 걸지 말아요. 별거 아닌 봉인에 아이작이 갇혀 있다면 그게 더 수상하겠죠. 봉인만 보면 확실해요. 환영幻影이나암시 하나 못 빠져 나와요.”
트로핀 나냐우는 문득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법사에게 물었다.
“봉인만 보면?”
“네. 봉인만 보면요. 하지만.
마법사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갔다.
“봉인의 원인을 부순다면 어떻게 풀릴 방법이 나올지도 몰라요.”
“봉인의. 원인이라고?”
“봉인한 존재나, 관련된 한 축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는 거죠.”
레나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스승님을 함정으로 몰아넣었던 거군요.”
‘아이작, 이 개새끼가.
“이거. 봉인이 너무 흥미로운데가지고 연구해 봐도 될까요? 어차피 제가 뭘 해도 풀리지는 않을 것 같고, 이렇게 저렇게 실험해 보는 재미가 각별할 것 같아요.”
“으으. 저 영체靈體를 가지고 또 무슨 잔인한 짓을 하려고.
순진한 눈망울로 이야기하는 마법사를 보며 흑발 남자가 소름 끼친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마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기회를 주실 거죠?”
눈과 입가에 점이 있는 마법사는,진심으로 아이작이 봉인된 메달을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그냥 넘겨 버릴까?’
레나를 치료해 준 인간이다. 게다가 봉인의 수준까지 점검할 수 있는 레벨의 마법사.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레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 잘 다뤄 주실 거죠? 이건 예메라의 촛대인데.
마법사는 무슨 말인지 다 안다는 듯 자비롭게 웃었다.
“아하! 축성된 물건은 저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영체가 느끼는 고통은 실험의 중요한 요소죠. 빼놓지 않고 다룰 거예요.”
“루네아, 그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자고.”
나냐우가 마법사를 제지하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봉인은 확인됐고. 이제 회로를 좀 확인해 봐도 될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그것도 저 마법사가 하는 건가?”
나냐우가 고개를 저었다.
끝 부분에 보랏빛으로 포인트를 준 그녀의 은발이 찰랑거렸다.
나냐우는 터키색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할 거다.”
나냐우의 따듯한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
몸 안의 루륨이 반응했다.
몸이 저절로 움찔거려 힘을 줘서 버텨야 했다.
“편하게 있어.”
- 우우우우응.!
뼈에 새겨진 회로 안에 흐르는 3L의 액체가 진동하며 발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공명共鳴.
놀라운 경험이었다.
내 몸을 한차례 점검한 나냐우가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역시 아이작의 작품이군. 이렇게 정밀한 회로를 설계할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지.”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도 나냐우의 능력이 놀라웠다.
“어떻게. 손만 대도 이런 게 가능한 거냐?”
나냐우 대신 옆에 서 있는 흑발의 남자가 대꾸했다.
“시조는 300년 동안 루-륨만을 연구했어. 몸 안의 피를 전부 그걸로 바꿔 넣기 위해서. 그 정도를 못 할까 봐?”
“흐음.
그때 였다.
어색한 침묵 사이로 레나가 끼어들 그녀는 300년 전, 자신이 속한T&T를 만들어 낸 시조를 향해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저. 그런데 왜 저희를 구해 주신 거죠? 계속 기다리거나 추적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요.”
하지만 셋 가운데 아무도 레나의 태도를 탓하지 않았다.
“그게. 말이지.”
나냐우가 머리를 살짝 긁적이면 서레나를 향해 말했다.
“같은 편을 모집하고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