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51화 (151/458)

152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9)

“.같은 편?”

“그래.”

나는 트로핀 나냐우를 바라봤다.

슬쩍 떠보듯 그녀에게 물었다.

“레나는 길드 정식 단원일 텐데?”

아예 모르는 척 물었다.

길드의 사정이 대충 짐작은 간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당사자의 상세한 설명은 언제나 많을수록 좋다.

나냐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길드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온몸의 피를 루-륨으로 대체할 수있는 방법만 계속 찾아다녔지.

나냐우는 잠시 말을 끊었다. 숨을 들이쉬었다.

붉은 피 대신 은빛 마력액이 몸에 돌고 있는 여자지만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게 새삼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문득 레나가 끼어들었다.

“그사이. 길드를 다른 녀석들 이장 악했군요.”

나냐우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돌아보니 어느새 마왕의 신도들이 T&T를 삼켜 버렸더군. 대부분의 멤버는 아직 내가 살아 있는지도 몰라.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셈이지.”

“에이, 시조.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건 아니잖아요. 시조가 존재를드러내면, 셋 중 한 명은 확실히 당신 편을 들 거예요.”

이번에는 입과 눈가에 점이 찍힌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마법사의 눈 밑에 찍힌 점은 꽤 특이했는데,  찍혔다기보다 번지는 먹처럼 엷고 넓게 퍼져 있었다.

“안 돼. 그러면 길드에서 재앙에 가까운 내전이 일어날 거야. 후손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은 정말 끔찍하겠지.

“완전히 준비를 마친 다음, 한 번에 압도적으로 엎어야겠네요.”

레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지금 하려고하는 거라고! 나냐우, 이 친구 섭외하길 정말 잘했는데요?”

흑발 남자가 끼어들었다.

T&T의 시조는 남자를 무시하고 곧장 레나에게 말했다.

“먼저. 레나, 가져온 루-륨으로일 단 지부장 등급을 내주지.”

나냐우가 이마를 덮은 긴 은발을 슬쩍 뒤로 넘겼다. 하얀 손을 들어 넘어간 머리를 뒤로 묶었다.

차가울 정도로 깨끗한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저런 피부가 루-름의 효과일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길드를 다시 찾아가는 대로 그 이상의 지위를 약속한다.

그게 룰북을 찾은 목적 아니었나?”

‘드디어!’

그 말에 주먹이 쥐어졌다.

매력적인 제안이다.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레나의‘시나리오’ 클 리어가 이제 눈앞.

하지만 단번에 승낙할 줄 알았던 레나는 의외로 약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자, 나냐우는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네게도 같은 제안을 하지. 입단절차는 간단하고. 루-륨은 충분히 가지고 있을 테니까.”

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확인해야 할 게 몇 가지 있었다.

“너희는. 누구를 섬기지?”

푸르손의 적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엉뚱한 마왕의 노예라면그쪽도 곤란하다.

나냐우의 대답은 명쾌했다.

“아무도.”

“각인 같은 건 없는 건가?”

“그딴 거 없다.”

사슴 아에자르에게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라 물었다.

“의심 없는 믿음 같은 건. 안 가져도 되겠지?”

“의심은 믿음의 일부잖아. 그게 무슨 소리지?”

그때 였다.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하시죠. 분명 우리가 제일 늦었을 거예요.”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회의에라도 참석하는 건가?’

나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길이 같을 테니까.

너희도 수도로 가는 중이었지?”

“그렇다.”

“그럼 이 길이 최고지. 걸으면서천천히 생각해 보고 대답해 줘.”

우리는 이동하기 시작했다. 곧게 뚫린 땅속으로 걸어가는 일은 꽤 묘한 느낌이었다.

터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졌다.

단순한 비밀 통로가 아니라 안에서인 간들이 한참을 지낼 수 있는 요새 같았다.

나냐우의 무리는 앞으로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의논할 시간을 주기위해서인 것 같았다.

나는 T&T 합류에 대해 생각을 정리했다.

저들은 푸르손과는 달랐다. 힘을 준다고 꼬드기지 않는다. 각인이나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가져온 루-륨을 대가로 약속한 걸 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터무니없이 강하다.

앞으로도 이 정도 급의 존재들과‘같은 편’이 되어 지낼 기회가 많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합류한다면 더 넓은 세계로 한 발짝 발걸음을 떼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녀석들과 친분을 맺고 또 다시 정을 준다면.

루비아와 레나의 경우처럼 마음을 계속 옭아 멜 가능성이 높았다.

레나는 밤톨이를 안은 채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표정이 밝지 않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혹시. 뭐 감이라도 안 좋은 건가?”

얼굴을 보다 보니 문득 불안해져서 물었다. 번번이 맞았던 그녀의 감을 더 이상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협곡에 매복이 있을 거라는 것마저 예측했으니까.

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걱정이에요.”

“아직 저들의 세력이 약한 게 걱정인가? 하지만.

마왕의 세력은 어차피 10년 뒤 반드시 패퇴한다고 이야기를 꺼내야하나 멈칫하던 순간.

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지부장이 되면. 스승님은 저를 떠나실 거죠?”

“.떠나다니?”

“시조와 함께하게 되면, 저를 여기 두고 떠나실 거잖아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을 굳혔다.

자꾸 실패했던 문제.

레나를 지부장으로 만드는 일은 이제 손만 뻗으면 된다.

계속 나를 따라다니던 시나리오.

번번이 죽으면서도 이렇게 클리어에가까워진 건 처음이다.

물론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큰 변화가 없다고 하면.

이들과 레나를 합류시키고, 슬쩍빠지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저를. 어딘가에 안착시키려고 하시는 거 알아요. 이유는 몰라도 저에게 책임감을 느끼시는 것도요. 그렇지만 제가 지부장이 되면 그것도 끝이겠죠.”

그녀가 말을 이어 갔다.

“궁금해요. 대체 왜. 저한테 그런 책임감을 갖고 계시는 거죠?”

나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뗐다.

“.너와는 이번 생에서만 만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시나리오 클리어.

어쩌면.

이제 레나와 영영 헤어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루비아를 땅에 묻기 전으로 돌아가지못하듯,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수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미친 취급을 받더라도, 레나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다.

“.뭐라구요?”

레나는 경악했다.

나는 몇 번의 회귀를 거듭하며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녀를 처음 만난 동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던전에 갇혀 멍하니 있던 나를 레나가 구해 주려 했던 일.

거미굴에서 레나를 기절시킨 후,

그라스미어의 불에 타 죽었던 일.

푸르손 일당에게 둘러싸여 슬라임에 녹았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레나는 매번 나를 어떻게든 도우려고 했다.

루비아와 기스-제-라이에게, 비록그녀들이 믿지는 않았지만 회귀에 대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레나에게도 한 번은 제대로 이야기를 해 주는 게 그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멍하니 눈만을 깜빡였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 우리의 걸음은 한층 더 느려진 상태였다.

나냐우와 다른 두 인간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지만, 어차피 길은 하나밖에 없었기에 앞으로 가는데 지장은 없었다.

“.그래서 원장님 쪽으로 정보를 캐지 말라고 하신 거군요.”

십여 분 정도를 침묵하던 레나가 꺼낸 말이었다.

‘.설마 믿는 건가?’

의외였다. 처음으로 회귀를 믿어주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온몸의 피를 루-룸으로 바꿨다는 나냐우라는 존재를 목격해, 현실 인식이 조금 더 말랑해진 탓일까?

하지만 레나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수수께끼를 푼 기분이에요.”

“.수수께끼라고?”

“네.”

레나는 가벼운 숨을 뱉으며 말을이었다.

“왜 스승님께 더 기대고 싶은지.

왜 그렇게 도와드리고 싶은지. 왜자꾸. 그런 꿈을 꾸는지.”

꿈.

인간은 꿈을 꾼다.

얄은 잠에 들 때면 현실의 그림자들이 물결처럼 밀려든다고 들었다.

레나는 그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 본 적도 없는 장소들에서, 스숭님과 함께하는 꿈을 꿨어요. 비웃으실 게 뻔하다고 생각해서 말씀은 드리지 않았지만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동굴에서 잠꼬대를 하며 깨어나던 레나.

전생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능력치가 보정되기도 했다.

‘설마, 기억도 계승된다는 건가?’

별도의 세계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들이 분명히 조금씩 겹쳐 왔는지도 모른다.

“으음.

잠시 침묵하던 레나가 내게 말을걸었다.

“될게요. 지부장.”

“왜지?”

“스승님이 잠시 떠나도, 언젠가 다시만 난다는 확신이 생겼으니까요. 이번 생이 아니라면 다음 생에서라도.”

“말씀대로 제가 조금씩 변화한다면. 길드의 핵심이 된 채로가 더 좋을 테니까. 그러면. 다음 생에서는 제가 스승님을 도와드릴 위치에 있지 않을까요?”

마음 어느 한구석이 꾹꾹 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도움이라면 내 쪽이 훨씬 더 받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회귀를 말하지 않고 있었는데도, 내게 기만당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했다. 높은 호감도의 영향일까.

꾹꾹 눌리는 마음은, 터질 듯 터지지 않고 그저 무겁기만 했다.

시원하게 한번 원망이라도 받았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고통스럽지 않다는 둣, 아무것도 슬프거나 참고 있지 않다는 듯이 시원스럽게 다시 웃으며 말했다.

“이번 생에 움직인 만큼. 다음 생에 쌓인다니 무척 고무적인데요. 길드 장을 목표로 할까요?”

- 달. 그락.

발걸음이 흐트러지지 않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히 걷는 일은 아쉽게 실패했다.

한 시간쯤 더 걷자, 멀리 앞서가던 나냐우가 내게 다가왔다.

“어때? 논의는 다 끝났어?”

레나가 입을 뗐다. 자신감에 넘치는 말투였다.

“절 지부장으로 만들어 주시면 후회하지 않게 해 드리죠.”

“아주 좋은 자세야.”

나냐우가 씩 웃으며 나를 봤다.

“그쪽은?”

“직접 몸담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레나가 당신들과 합류한다면. 나는 그녀와 친구다. 같은 친구와 같은 적을 가지겠지.”

“뭐, 좋아! 다시 말했지만 언제든 문은 열려 있다고. 그나저나.

미소를 띠고 어깨를 한 번 으쑥해보인 나냐우가 문득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이 동굴, 멋지지 않아?”

말투에서 자랑스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러했다. 무엇보다 땅굴은그 거대함만으로도 인상적이었다.

끄덕임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라는둣, 그녀는 즐겁게 말을 이었다.

“천 년 전, 과거 사도에게서 피하려고 인간들이 판 거야. 세상에 흩어진 루-륨을 찾다가 내가 발견한 장소지.”

놀라웠다. 이런 대규모 땅굴을 판다는 건 웬만한 노동력과 기술력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껏 접한 던전 따위와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다. 아이작의 무덤보다도 수십 배는 넓었다.

‘이런 공간을 만들 힘이 있는데.

사도에게서 피해야 했단 말인가?’

의문이 들어 곧바로 나냐우에게 물었다.

“세이론 이전 시대의 인간들은.

단순한 가축처럼 전해지고 있던데.

이 정도 힘이 있는데도 그냥 당하고 살았다고?”

나냐우가 장난꾸러기처럼 피식 웃었다. 그러고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그쪽 기록이 더 궁금하면 황실 비밀 서고나 뒤져 봐.”

“근처에도 가기 전에 몇 번씩이나 부서지겠지만 말이지.”

안 가르쳐 준다는 이야기일까?

땅굴 위를 흘끗 바라본 나냐우는,

저 앞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다 왔어.”

빛.

기다란 사다리 한 줄 위로 뻥 뚫린 작은 구멍이 보였다. 나냐우가 먼저 가볍게 몸을 날렸다.

빛의 구멍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것 같았다.

지금껏 곳곳에 박혀 있는 야광주와는 다른 느낌의 빛이다.

‘바깥인가.?’

나는 레나와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장의 빛을 향해 올라갔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이 지하 터널 안쪽에서 레나와 좀더 걷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래에 묻어 둔 채 위로 올라갔다.

- 철컥.

철제 사다리는 튼튼했다. 함부로 올라가도 삐걱거리지 않았다.

한 칸 한 칸이 서로 잘 복제된 사다리의 마지막을 차분히 올라갔다.

빛의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고, 몸을 올렸다. 레나가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주위를 빠르게 돌아봤다. 호젓이 넓은 석실이 눈에 들어왔다.

나냐우와 흑발 남자, 마법사를 포함한 십여 명의 느슨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경계하는 자는 없었다.

모두가 인간은 아니었다.

‘모임이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이거 였나.’

묘족强族도 있었다. 인간의 옷을 걸치고 리본 넥타이를 했지만 얼굴과 손발은 그대로 흰 고양이였다.

푸른 눈동자를 빛내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무 생각도 할 틈 없이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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