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10)
흰 고양이의 푸른 눈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함정인가? 최면? 암시?’
하지만 5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몸이 풀렸다. 고양이는 평범한 인간여자로 변해 갔고, 푸른 눈에서도 서서히 빛이 사그라졌다.
“이게 무슨.
완전히 인간으로 변한 흰 고양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의는 없는 것 같군요. 자유의 길을 알고 있지만. 살려 보내도 될 것 같습니다.”
‘자유의 길이라고? 비밀 통로를 이야기하는 건가?’
그때 였다.
한쪽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던 나냐우가 피식 웃었다.
“예언자가 검증을 마쳤으니 다들 불만 없지?”
“나냐우, 애초에 예언자 아니면 그렇게 깐깐한 사람이 없어요.”
“그렇다니까.”
적대하는 자는 없었다.
밑에서 올라오는 레나의 손을 잡아끌어 올려줬다.
- 탁레나가 석실에 발을 디뎠을 때.
나냐우가 손가락으로 흑발 남자의 등을 쿡 찔렀다.
“어이, 현직.”
“깜짝이야!”
동굴에서 마주쳤던 남자가 어깨를 앞으로 웅크렸다.
“놀란 척하지 말고. 네가 해라, 페르산.”
“음. 음음!”
앞으로 떠밀려 나온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지.
T&T 7대 길드장 페르산이다. 다른 분들은 나냐우를 지지하는 제국과엠버의 길드 간부들이고.
‘저 녀석이. T&T 길드장?’
레나를 흘끗 바라봤다.
그녀는 놀라지도 않고 침착하게 있었다.
하긴 창립자인 나냐우와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주고받던 남자다.
T&T라는 조직의 분위기가 원래 그렇다고는 해도, 보통 인간이 아닌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크흠!”
한 번 헛기침을 한 길드장이 말을 이어 갔다.
“이곳은 제국 수도 비밀 본부지. 3층짜리 큰 선술집의 지하실이야. 저 바깔으로 나가면. 제1 가닛 스트리트.”
“가닛. 스트리트?”
“그래. 제국에서 제일 땅값 비싼 거리에 온 걸 환영한다, 친구들.”
제1 가닛 스트리트.
그 말에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없었다.
아는 이름이었다.
제국 수도의 지명중에서, 유일하게익숙한 이름이다.
‘레안드로 후작의. 장례 행렬이 시작되는 장소잖아?’
<등불>달리아크에서 얻은 정보.
장례 행렬은 분명 제1 가닛 거리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하지만 길드 장은 내 경악을 다른 뜻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서북쪽에 곧바로 황궁이 위치한 거리지. 의외로 인간세계에 대해 상식이 풍부한데? 살아 있을 때기 억이라도 있는 거야?”
부담스러운 태도에 손을 내저었다.
“별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지금 시간을 알수 있겠나?”
“한밤중이야. 한창 동쪽 거리에서 열심히 손님 모집할 시간이지. 지금어딜 가려고?”
한밤중.
아직 운구 행렬이 지나가기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달리아크의 문서에 따르면, 행렬은내일 점심때쯤 출발한다.
“지금 나갈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 잠깐만 남아 달라고. 지금당신과 관련 있는 얘기를 막 시작할참이니. 자, 그럼.
- 딱딱.
길드 장은 작은 돌로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지금부터 T&T 간부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길드장의 권한으로 첫 번째 안건을 우선 상정하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석실에 자리 잡은T&T 간부들은 모두 터널을 빠져나온 레나를 바라봤다.
따로 회의를 할 것도 없이, 앞서다 이야기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길드장은 말을 이어 갔다.
“안건은, 아시다시피 레나. 단원명부에 성은 등록하지 않았는데, 따로 있나요?”
길드장의 질문에 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좋아요. 룰북에 따른 레나의 지부장 승급 건입니다. 이의가 있는 분들은 말씀해 주십시오.”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없습니다, 라는 소리가 작게 몇 군데서 들렸다.
한쪽에 기대 서 있는 나냐우가 씩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흑발의 길드장이 말을 이어 갔다.
“좋습니다. 해당 T&T 단원의 지부장 승급을 허가합니다. 그런데.
어느 지부를 맡겨야 할까요?”
- 꿀꺽.
레나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걸로 끝인가? 이렇게 간단히?’
눈앞의 상황이 놀라웠다.
벌써 세 번이다.
그녀의 T&T 지부장 승급은 내가세 번을 죽은 끝에 도달할 만큼큰일이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이뤄질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레나의 침 삼키는 소리는 아주 짧은 시간만 회의실을 장악했다.
“나! 내가 원한다!”
“카타페스트의 지부를 맡아 줘!”
“제발 에나르드에 와 줬으면.
“나 혼자선 이제 한계야. 시비나스지부는 완전히 망해 버릴 거라고.”
탁자를 둘러싸고 앉은 T&T 간부들 모두가 다들 손을 들고 힘차게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가만히 침묵하며 뒤로 빼던 자들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급격한 태도 전환이었다.
“이게. 무슨 ?”
나는 벙한 채 페르산을 바라봤다.
흑발의 길드장은 씩 웃으며 말했다.
”요즘 다 인력난이거든.”
“인력. 난? 지부는 있는 건가?”
동굴을 함께 지나온 마법사가 차분한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저분들, 할줄 아는 건 싸움박질뿐이지만. 지위는 있어요. 믿을 만한 단원 수급이 영 어려워져서 그렇지.”
시조를 지지하는 간부들은.
푸르손과 완전히 관계없는 레나를꼭 자신의 직속 라인으로 만들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주위를 돌아봤다.
나냐우는 물론, 길드장과 마법사는 탁자 위의 경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 셋을 제외한 대부분은 치열하게 레나를 원했다.
처음 날 바라봤던 묘족_街族 여자가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내가 제일 필요해. 나는 엠버와 이곳을 동시에 오가야 되잖아? 한참 떨어져 있는 두 군데를 맡고 있는데 신경 써 줘야지.”
그러자 손목에 붉은색 가죽 보호대를 감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타인의 돈을 숨 쉬듯 털어 봤을 것같은 인상의 성마른 남자였다.
“유능한 비서가 필요하다. 믿을 수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멍청하고,
눈치 빠르고 셈 밝은 것들은 전부푸르손의 추종자들과 붙어먹었다.”
“사수, 이거 봐. 여기 있는 사람들다 똑같거든?”
얼굴에 십자 모양 칼자국이 있는,
각진 인상의 남자가 끼어들었다.
정보 길드보다 무투 길드가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의 인간이지만 왜 여기 있냐고 따질 이유는 없었다. 그가 혈기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결투다! 결투로 해결하자.”
모두 한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완전한 무시였다. 심지어 닥치라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자, 그럼.”
길드장은 계속 회의를 진행했지만,
시간이 지남에도 불구하고 다들 한 치도 양보할 기색이 없었다.
‘슬슬 감이 잡히는군.
이야기를 들을수록, 레나를 두고저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기 있는 자들은 정치적인 고려 같은 건 전혀 못 한다.
정보 길드 주제에 모략이나 음모,
장사 같은 일에 무척 약하다.
길드는 내팽개친 채, 수백 년 동안루-륨을 연구해 온 나냐우와 함께하는 자들.
이유는 간단하다.
나냐우와 비슷한 부류니까.
‘어휴.
회의 끝에 열 명 가운데 여섯이 양보했지만, 넷은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꽤 합리적인결론이 내려졌다.
“확인합니다. 그럼 레나 본인에게 결정을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레나,
이분들을 보아 주시겠습니까?”
“ ㅇ , ,
ㅍ.
“지금까지 회의 내용을 모두 들으셨을 터. 넷 가운데 골라 주십시오.”
그 순간이었다.
엠버와 제국 수도를 번갈아 지내서 불편하다고 했던 여자가 난데없이 변신을 시작했다.
처음 보여 준 모습과는 반대로.
인간 여자의 몸에서 갑자기 작고하얀 고양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예언자님.?”
“어이, 샤루니안!”
“당신 설마.
[시끄럽다.]
- 폴짝흰 고양이는 돌 탁자를 뛰어 넘어가더니 레나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뭘 하는 거지.?,
그리고 털이 보슬보슬한 머리를 숙여 레나의 손아래 가져다 댔다.
[쓰다듬어도 된다.]
“???정말요?”
[그래. 하지만 꼭 내 지부를 맡아줘야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흰 고양이가 둥글게 몸을 말았다.
[갸르릉.]
“저래도 되는 거요?”
“길드장, 저건 반칙 아닌가?”
“젠장.
“음. 각자 자기 어필은 자유롭게 하셔도 좋습니다.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레나는 의외로 고양이를 쓰다듬지 않았다.
‘동물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대신 낯선 환경에서 긴장해 굳어있는 밤톨이를 쓰다듬으며 고양이에게 물었다.
“이 장소를 담당하시는 분이죠?”
[.응. 샤루니안이라고 해.]
고양이는 레나가 자기를 만지지 않자 조금 자존심이 상한 듯했지만,
그보다 인력 섭외가 먼저라는 둣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 올 거니?]
다들 레나의 반응에 종긋 귀를 기울였다.
“네. 길드장님? 저는 이분으로 선택했어요.”
흰 고양이는 복실복실한 꼬리를 좌우로 흔들려다, 채신이라도 생각한건지 급히 멈췄다.
“하아.
“아이고.
아쉬움의 한숨이 탁자를 둘러싼 곳곳에서 새어 나왔다.
고양이는 이 사실을 굳히려는 둣,
레나에게 지부에 관한 정보를 자세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3층짜리 커다란 주점이야. 첩보가 많이 들어오는 곳이지. 사실, 주점 운영만으로도 힘들어서 정리도 제대로 안 되고 있지만.]
길드장 페르산은 레나와 고양이의 의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정식 임명식은 일주일 후에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레나는 T&T의 제국 제7 지부를 맡게 되었음을 공표합니다.”
- 땅, 땅, 따앙.
탁자에 돌 두드리는 소리가 지하실안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울림은참 길었다.
레나 시나리오 클리어에 애타게 마음 졸였던 시간들이, 그 소리에 모두 낡은 과거가 되어 버렸다.
작은 메아리가 모두 사라진 순간이었다.
띠링!
[레나가 T&T 지부장으로 승급했습니다.]
[B급 시나리오, ‘레나 이야기’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레나가 T&T에서 본격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올 것이 왔다!
나는 아래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차분히 읽어 나갔다.
[레나에게 ‘암흑가의 초급 간부’ 칭호가 새롭게 생겼습니다.]
- 레나와 일정 이상의 호감도를유지한다면, 그녀의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 범죄 참여 및 의뢰 등, 다양한활동이 가능해집니다.
이런 게 아니라도.
호감도가 떨어질 만한 짓은, 물론조금도 할 생각이 없다.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어둠 속의 조력자’ 시나리오가 활성화됩니다.]
[상시 발동 시나리오입니다.]
[레나의 영향력이 계속 커질 경우,
관련 이벤트가 생성됩니다.]
‘랭크나 클리어 목표는 별도로 나타나지 않는다.
‘딱히 목표는 없는 건가.?,
[시나리오 슬롯이 1개 추가되었습니다.]
[현재 슬롯: 2/3]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74.3%.]
동화율이 떨어졌다.
머리가 뜨거워지며 다시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메시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시나리오 클리어에 따라, 현재의경로 변경을 확정합니다.]
본 적 없는 글씨체로.
메시지는 기괴한 긴장을 만들며 허공에 적혀 내려가고 있었다.
“응? %%#@ 멍!!% &&[email protected]야?”
“생각 *#$&@# 잠겨 #[email protected]$.”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멀었다. 흐릿하게만 느껴졌다. 낮고 작은 소음에 불과했다.
“#승님? 스승님.?”
인식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에 뜬 반투명한 메시지 너머,
지금까지 나와 함께했던 레나를 바라봤다.
생생하게 실존하는 그녀를.
그녀에 대한 내 감흥을 털어놓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이만 나가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