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11)
“이만 나가 보지.”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는 없다.
레나는 T&T 지부장에 등극했다.
모두가 그녀를 원하는 의외의 모습까지 확인했다.
수도로 온 두 가지 주요 목적 중하나는 달성이다.
이제 다른 하나를 실행할 차례.
‘정수 흡수.’
다시 한 번.
레안드로 후작을 홉수한다.
이번에는 크라켄도, 바다도, 레드 플레이크도 필요 없다.
이미 죽어 있으니까.
사망했다는 날짜에서 아직 7일이 지나지 않았다.
내일까지 정수 흡수가 가능하다.
협곡을 정면으로 돌파한 것.
서둘러 수도로 달려온 건 이유가 있었다.
더불어 가능하다면, 후작이 죽은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었다.
누가 그 괴물을 죽였단 말인가?
앞으로의 전생 과정에 있어 분명중요한 정보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명식 때. 오실 거죠?”
레나의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가야지.”
정수 흡수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운구 행렬을 따라가는 도중, 혹은그 행렬의 끝에서 흡수하면 된다.
- 달그락! 달그락!
나가려는 걸 알아챘는지, 긴장하고 있던 밤톨이가 달려들어 다리를 물고 흔들었다. 토닥토닥 쓰다듬었지만 좀처럼 달래지지 않는다.
“안에 있어.”
검지 뼈를 천천히 흔들며 암시를 보냈다. 아이작에게 배운 방법이다.
그가 시키는 대로 말들에게 최면을 걸던 때를 떠올리며 손가락을 흔드니 효과가 있었다. 밤톨이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저.:
레나가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지?”
깊은 눈 속에 안타까움이 보인다.
레나는 품을 뒤적여 뭔가를 꺼내 건넸다.
“이거, 받아 주세요.”
주머니에서 나온 건 펜던트였다.
대단한 보석이 붙어 있지도.
딱히 아름다운 형상이 새겨지지도 않았다.
줄마저 낡아 있다.
그곳에 있는 거라고는 세월의 흔적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펜던트의 의미를 안다.
어머니가 전해 준 소중한 유품.
“저한테는 의미 있는 물건이에요.
가져 주시면 제가 행복할 거예요.”
저렇게 이야기하는데 안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신경 써서 갖고 있지.”
“.받아 주셔서 고마워요.”
줄을 감아쥐어 든 순간이었다.
- 띠링!
경쾌한 효과음이 울려 퍼졌다.
허공에 뜬 반투명한 푸른 창에 메시지가 빼곡히 떠올랐다.
[계승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레나의 펜던트]
- 가짜 보석이 박힌, 레나가 건네준 오래된 펜던트. 상품으로써의 가치는 없지만, 그녀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간직하는 물건이다.
[시나리오 클리어에 의해, 다음의 능력이 임의로 부여됨.]
- 히어로급 이하의 스킬 숙련이15% 빠르게 상승합니다.
- 일주일에 한 번, 높은 확률로<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해 준다.
‘.뭐라고?’
평범한 낡은 펜던트.
다른 생에서도 동굴의 시작 지점에서 펜던트를 받은 적 있다.
그때는 이런 능력이 없었다.
낡고 오래된 고물에 불과했지만.
‘터무니없군.’
터무니없이 엄청난 부가 효과를 가지는 아티팩트가 되어 버렸다.
히어로급 이하의 스킬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숙련도를 15%나 빠르게 상승시켜 준다.
간접적으로나마 접한 스킬 중에, 이 특전의 혜택을 못 받는 건 에픽스킬인<정수 흡수>와 유니크 스킬인<뼈의 군주>정도다.
‘게다가<올바른 판단>이라니.
임의로 발동되는 건지, 의식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위기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건, 사실상 일주일마다하나씩 충전되는 목숨 여벌을 가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 정서를 반영하는 물건에 특별한 힘이 부여되기라도 하는 걸까.
‘계승 아이템이라니.!’
물론 물어볼 대상은 없다.
시나리오와 퀘스트에 관련된 이런 메시지들이, 오직 나에게만 뜬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손에 쥔 펜던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이, 친구. 나도 줄 게 있는데.”
벽에 기대어 있던 나냐우의 목소리가 멍하니 잠겨 있던 의식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뭘 또 준다는 말인가?
묘하게 기대감 어린 시선을 보내버린 탓일까.
나냐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어, 별건 아니고. 설마 그 상태로 나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녀가 나를 아래위로 훌었다.
시선을 내려 갑옷을 돌아봤다.
나냐우의 말대로 입고 나갈 만한상태는 아니었다.
포위망을 돌파하며 달려온 터라,
곳곳이 찢기고 뚫려 안이 휑하게 드러나 있었다. 인간이 빼곡한 곳에서 입고 걸었다간 혼자 전쟁을 치뤄야할 판이다.
“대신 이걸 입어 봐. 눈짐작으로 골랐는데, 아마 맞을 거야.”
언제 챙긴 건지 그녀의 손에 은빛의 갑옷 세트가 들려 있다.
금속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얇고활동성이 좋아 보인다.
관절 부위마다 제대로 잘 구부러지게 되어 있는 은빛 판금.
tt ㅇ , ,
ㅍ.
“황실 감찰 국에서 입는 옷이야. 입고 나가면. 경비한테 시비 걸릴 일은 없어서 편할 거다. 고위 귀족 자제들이 경력 쌓는 조직이거든. 아무도 안 건드려.”
- 철컥.
나냐우가 내게 갑옷을 안겨 줬다.
받아 들고 훌어봤다. 깨끗하다.
“문양 같은 건 없나?”
“없어. 그 디자인에, 문양 없는 게 특징이지. 보면 웬만한 놈들은 다 알아서 길거야.”
“아, 이것도 받아.”
그녀는 수도 곳곳에 상세히 나와 있는 두루마리 지도까지 건네줬다.
감찰국, 작전 비밀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건.
받아 든 지도를 펼쳤다.
거미줄처럼 퍼진 수도의 뒷골목이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감찰국은 잘 뚫어 놨거든. 우리위치는 지금 여기고.:
나냐우는 지도 한쪽을 새하얀 손가락으로 쳤다. 주점이라고 표시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손가락을 조금 서북쪽으로 옮겼다.
- 톡톡.
“아쉽게 여긴 없어.”
“없다니?”
지도에 표시된 곳은 공원이었다.
다른 장소보다 조금 덜할 뿐, 이런저런 지도 기호가 그려져 있었다.
“공원인 거 같은데.
나냐우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황궁이야.”
보안 때문이라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외부로 도는 지도는 아니지 않나. 황실 감찰 국이 쓰는 지도인데 황궁을 이런 식으로 숨겨버린다고?”
나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들은 모두를<외부>자로 생각하니까.”
“.그들?”
몸에 피 대신 루-륨이 도는 은발의 여자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지금 확실히 말해 줄 수 있는 건별로 없어. 더 궁금하면 같이 알아보자고.”
명백하다. 함께하자는 제안이다.
나냐우는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겪는 인력난은 아까 회의에서 충분히 체감했으니 이해는 된다.
에둘러 거절했다.
“.나도 지금 여기서 대답하기는 곤란하군. 이건 고맙게 받지.”
나를 위기에서 구해 준 뒤, 선물까지 안겨 준다. 배려가 느껴졌다.
스스로 깨닫고 있을지 몰라도 마음의 빚을 지우는 데 탁월한 행동이었다. 그녀에게 칼을 들이대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도 처음이지? 안내 붙여 줘?”
“괜찮은데.
“소중한 예비 단원인데 안내도 못 붙이니 서운한걸. 그럼 쭉 올라가.
방이 나올 거야. 거기서 느긋하게 쉬고 가도 되고.”
예비 단원이라.
역시 어딘가에 속할 생각은 없다.
‘대신 뭐라도 도울 일이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저 막연할 뿐이었다.
새 갑옷과 지도를 든 채 계단을 올라갔다.
- 드르륵!
계단 끝에서 옆으로 문을 밀었다.
청소 도구와 각종 물품이 쌓여 있는 커다란 방이 나왔다.
‘직원용인가.’
열어 놓은 문을 객실 안쪽에서 다시 살펴봤다. 손잡이는커녕 아무 무늬도 없는 평범한 벽이다.
감쪽같았다.
누군가가 지하 터널을 발견하고,
그중 한 출구에 주점을 세워 놓은 것 같았다.
‘나냐우가 한 걸까.
객실에서 곧 갑옷을 갈아입었다.
갑옷은 날 위해 맞춘 것처럼 몸에딱 맞았다.
- 끼이익.
안에서 잠긴 두꺼운 문을 열었다.
놀랍게도 밖은 무척 떠들썩했다.
상들 리에가 천장에서 은은한 빛을 뿌렸다. 밤이 늦었는데도 경쾌하게 떠들며 술잔을 기울이는 인간들이 많았다.
‘안에서는 조용했는데.
명색이 정보 길드 지부답게 방음은 무척 잘된 건물인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앞치마에 고양이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이, 나에게 자연스레 눈인사를 했다.
길드 멤버인 듯하다.
주점 안에는 크고 작은 고양이 조각과 그림이 많았다.
샤루니안이라는 묘족.
아래에서 봤던 녀석은, 아무래도저 좋을 대로 주점을 운영하는 모양이었다.
밤을 떠들썩하게 지새우고 있는 인간들을 일별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것이. 제국 수도.?’
넓었다. 그라스미어와도 비교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밤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은은한 빛을 내는 등이 스무 걸음마다 설치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장치들.
마법이 적용된 탓일까.
기계공학 스킬을 발동했지만 원리파악이 어려웠다.
휘적휘적 보도를 걷는 인간들이 많았다.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인간들의 발소리가 저벅저벅 울렸다.
화려한 거리에 홀려 이리저리를 돌아다녔다. 서북쪽으로 갈수록 인적도 불빛도 점점 더 드물어졌다.
그때 였다.
“정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두 인간이 양쪽 골목에서 튀어나왔다.
달빛을 은은히 반사하는 롱소드로나를 겨누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남자를 바라봤다. 상대의 정체는 모른다. 쓸데없는 말은 먼저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짧았다.
침묵은 그들이 나를 아래위로 바라보는 순간 끝났다.
두 남자는 호들갑을 떨며 머리를 꾸벅 숙였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감찰국원이시군요! 외궁外宮 숙소 쪽으로 돌아가는 길이십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탐지.’
주위를 훌고, 골목 저편을 바라봤다. 서쪽 북쪽으로 열 걸음마다 빼곡히 배치된 남자들이 보였다. 가만히 서 있는 걸로 보아 행인은 절대 아니다.
‘다들. 경비병이군.’
서 있는 자세,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만만한 자들은 아니다.
만만하게 느껴지면 더 위험하다.
기운을 감추고 있는 거니까.
“항상 수고가 많소.”
나는 은화 몇 닢을 두 녀석에게 슬쩍 찔러줬다. 혹시 뭐라도 들을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녀석들은 고개를 저었다.
“이크! 감찰 국에서 왜 이러십니까.
장난이 심하십니다.”
‘???이게 아닌가.’
놈들은 나를 경계하는 기색이다.
액수의 문제 같지는 않았다.
“흐음.”
나는 자연스러운 척 뒤를 돌았다.
서북쪽으로 더 가려면 위험부담이클 것 같다.
어차피 이쪽은 후작의 장례 행렬동선에도 없다.
‘돌아갈까.
다시 남동쪽으로 돌며 머릿속으로 동선을 그려 보았다.
아예 은신 스킬을 사용한 채였다.
동쪽 거리로 갈수록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잘 통제되지 않는 거리인둣,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인간이 많았다.
- 훌쩍!
몸을 날려 건물 위로 올라갔다.
- 팟!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여기가 행렬이 지나는 장소.’
관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때까지의 걸음을 하나씩 세어 보았다.
‘스물일곱 걸음.’
‘슬퍼하는 인간들에게 섞여 앞쪽으로 가면. 열세 걸음까지 줄일 수 있다.’
흰 꽃이라도 뿌리는 무리들에게 섞여 천천히 걸으면서 정수 흡수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갑옷이 있는 이상 일이 좀 더 쉬워진다.
경비병들에게 섞이면 그만.
뭔가를 확인하는 척하면서, 더 가까이 가도 감찰국원으로서 대충 얼버무리면 된다.
‘쉽다.’
성공할 수 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시체 보호 따위. 누가 큰 관심이 있을까.
운구 행렬에 접근할 동선을 몇 번이고 꼼꼼하게 확인했다.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장소들을 머릿속으로 전부 외웠다.
‘이곳. 그리고 저곳.’
이동 시간을 계산하며 걸었다.
- 팟!
다시 위로 올라갔다. 높은 건물의 옥상 위에서 아래를 조망했다.
마지막 확인이다.
각양각색의 지붕들이 보인다.
분 냄새와 술 냄새, 유블람에서 맡았던 아편 냄새가 위로 연하게 올라왔다. 욕망과 망각의 냄새였다.
도시는 작은 숲 같았다.
나무를 타듯 이 옥상에서 저 옥상으로 이동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동쪽 거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보였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그곳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월광 욕을 즐기던 고양이는 나를 바라보곤 꼬리를 세웠다.
- 갸르릉.
‘경계하는 건가?’
신경 쓰지 않기를 바라며 멍하니 달을 바라봤다. 오늘은 반달이었다.
피곤해 보이는 반달이 한숨처럼 구름을 내뱉었다.
다시 맞은편 옥상을 보니 고양이는 사라져 있었다.
“가 버렸군.”
가장 높은 장소를 선선히 양보해준 건지도 모른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옥상으로 몸을 솟구쳤다.
고양이가 앉아 있던 자리에 착지했을 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얇은 종이 묶음을 발견했다.
여섯 장 정도의 두께였다,
거리를 뒹굴다 바람에 실려 날아왔다고 보기에는 상태가 좋았다. 더럽혀지지도 구겨지지도 않았다.
<시대의 거울>
‘신문인가? 거창한 이름이군.’
≪ㅇ , ,
ㅍ.
내용을 쪽 훌어보니 전형적인 황색잡지였다. 동선 정리도 마친 김에 집어 들고 읽어 보기로 했다.
<충격! 황실 기사단의 프리마돈나이사벨 백작, 레안드로 후작과 나눈 사랑과 죽음>
비밀 임무 중 사망한 이사벨 백작의 죽음.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레안드로 후작. 단독 입수! 레안드로 후작이 주변에 밝혔던 참담한 심정과 고백.
첫 번째 기사부터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짐작하고 있던 두 사람의 사연이지나 치게 자세하고 구구절절하게 적혀 있었다.
그렇지만 별로 쓸모 있는 정보는 없었다.
수도 기사단의 ??? ??.
‘이사벨은 나를 먼저 유혹했지만,
레안드로 후작과 잘되자 모른 척.’
거액의 유산은 이제 누구의 것?
후작의 혼 외자를 자칭하는 소년 등장, 하지만 얼굴은 영 딴판!
두 사람이 생전에 계획한 비밀 결혼식을 알아보자!
대신 영혼결혼식이라도 올려 주자는 사교계 여론 쇄도.
아니, 전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 외에도.
제국의 황족, 귀족, 상류층 등의 인간들에 대한 정보가 마구잡이로저 좋을 대로 적혀 있었다.
종이가 아깝다고 생각하며 슥숙 넘겨 갔다.
마지막 장을 펼쳤을 때.
신문 아래에 적힌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발행자 - 캐빈 애슈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