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16)
산 위로 다가오는 자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인간이다.’
이족異族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축사로 오는 걸음걸이는 가볍기만 했다.
좀 더 자세히 그들을 관찰했다.
두셋씩 짝을 지어 와서, 그들의 공통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검은 얼룩.
이마나 목, 눈 아랫부분에 검은 얼룩 같은 게 묻어 있었다. 본 적 있는 얇은 얼룩이었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커지며 마구 꿈틀대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네크론 신사회.
그들의 문신이었다.
‘저놈들이 여기에 오다니.’
[뱀을 조심해라.]
[조각, 그림, 장식. 문신. 실제 뱀은 더. 나중에 알게 될 거다.]
레일리의 말이 떠올랐다.
나중에 알게 될 거라 했지만 정작하룻밤 만에 본인이 죽어 버렸다.
조심하고 말고도 없었다.
이럴 거면 좀 더 말해 주든지.
나는 속으로 가볍게 투덜거리며,
다가오는 녀석들의 대화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데 왜 우리 조만 먼저 왔어?
다른 놈들은 아직 자빠져서 자고 있는 거 아니야?”
“축사를 확장한다잖냐. 전쟁에 쓸 애벌레가 더 필요하다고.”
“뭐? 그럼 개네 올 때까지 우리도 일하지 말자. 애들 먹는 건 알아서 잘 먹잖아.”
다행히 엿듣는 사실은 모르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주위를 오가며 다른 ‘사육사’들의 말을 들었다.
“얘들이 그렇게 강해진다고?”
“그래. 성체는 위험해서 마법사들입회하에 훈련시킨다잖냐. 가죽을 종이처럼 쫙 뜯는다고 하던데.”
“후! 그래도 사육사를 잡아먹진 않겠지?”
“궁금하면 네 몸으로 한번 실험해달라고 하든지.”
전쟁.
벌레.
사육.
마법사.
그런 단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전쟁용 벌레를 사육한다니.
상당히 대규모인 것 같았다.
인간들의 전쟁에 이런 애벌레들이 끼어들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미래가 변하는 걸까?
알지 못했던 세계의 이면衰®에접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들리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
하지만 놈들 역시 일선 사육사에 불과한 듯, 알고 있는 정보는 꽤 제한적인 것 같았다.
나는 벽과 벽 사이에 몸을 붙이며 은밀하게 이동했다.
이 장소를 떠나기 전.
레일리의 죽음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한바탕할 것도 각오했지만.
내가 발휘하는 은신 스킬을 감지할 수 있는 녀석은 여기에 없는 것같았다.
‘정말 그냥 사육사들인가.’
녀석들보다 한 발짝 앞서서, 활짝문이 열린 냉동고로 향했다.
‘레일리.
입구 근처에 시체 두 구가 놓여있었다.
하나는 레일리가 보고 슬퍼했던 후작의 시체.
하나는 그보다 훨씬 상태가 좋지 않은 레일리의 시체였다.
‘온몸이. 꽉 조여 죽었군.’
몸부림친 흔적은 아주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어젯밤 벌어진 일은 꿈이 아니다.
레일리는 온몸이 꽉 조인 채로,
뼈가 모두 부서져서 죽어 있었다.
녀석에게 꽤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레일리가 아니면 이 장소를 알아낼 수도 없었다.
후작의 정수도 시간에 맞춰 흡수할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서 있지도 못했을 터.
레일리가 첫 번째 목표로 노려진 덕분에 내가 살아남았다.
‘그건 그거고.
[정수를 흡수하시겠습니까?]
이건 이거다.
레일리의 시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미약했다.
하지만 이제 흡수 자체가 가능한자가 많지 않은 내 입장에서는 이것도 놓칠 수 없다.
[은신 Lv.6을 흡수했습니다!]
[특전: 자취말소(C플러스)를 획득!]
- 은신 레벨 상승에 따라, 특전이 부여되었습니다. 은밀히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지형지물에 남긴 흔적이 깔끔하게 말소됩니다. 진정한의미의 은신은 이제 시작입니다.
레일리의 빛은 거기서 꺼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대단한 성과.
자취말소.
결국 후작도 저번 생에서 나의 ‘자취’를 따라 추격했다.
이 특전의 랭크를 올린다면.
황제 암살 현장에서, 보물을 잔뜩 갖고 유유히 걸어 나가도 후작이 나를 쫓아올 수 없다.
두 번 다시 그 상황이 반복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성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진작 흡수했으면 좋았을 스킬이군.’
그 순간이었다.
- 저벅.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은신 Lv.6을 활성화합니다!]
냉동고 한쪽 구석으로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 끼이익.
잠시 후.
닫힌 문을 열고 사육사 두 명이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의 손에는 긴 톱이 들려 있었다.
- 위이이잉! 위이이잉!
사육사 한 명이 연결된 긴 줄을 잡아당겼다.
톱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얼어 있는 걸 잘라야 해. 그래야 지저분하게 피가 안 튀거든.”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뭔가를 지도해 주는 모양새였다.
무슨 짓을 하는지 보고 싶었지만,
- 팟!
놈들이 레일리에게 톱을 대려는 순간 몸이 먼저 튀어 나갔다.
- 퍼벅!
압도적인 기본 스탯에 높은 체술 스킬까지.
이제 이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
축 늘어진 두 놈의 품을 뒤졌다.
안감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게만 져졌다.
- 투둑!
힘으로 안감을 확 뜯어냈다. 꽤나 익숙한 물건이 등장했다.
‘이건!’
정밀한 초상화가 그려진,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붉은색 카드.
아래쪽에는 네크론이라는 글자만 음울하게 새겨져 있다.
두 명의 안감에서 신분증을 모두 확인했다.
벤슨 프레쳐에게 봤던 것과 같은 신분증이다.
네크론 신사회.
그놈들이었다.
눈앞에서 신분증을 보니 한층 더확실해졌다.
놈들의 신분증은 벤슨 프레쳐의 것과 조금 달랐다.
첫 번째.
프레쳐의 것처럼 하나가 아니라,
두 장이 이어져 있었다.
초상화가 있는 것 한 장.
그리고 기괴한 뱀 모양의 도장이 찍힌 나머지 한 장.
‘뭐지? 일 잘하면 찍어 주기라도 하는 건가?’
좀 더 살폈다. 정교하게 도금된 테두리가 눈에 들어왔다. 프레쳐의 것보다 훨씬 고급스러워 보였다.
프레쳐보다, 내 공격에 기절해 있는 두 녀석이 높은 등급이라는 건 명확했다.
tt ㅇ , ,
답.
프레쳐의 망치에 몇 번씩 머리가깨지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를 일으킨 사령술사를 한 번도 지켜 주지 못했던 그때의 고통과 분노가 기억났다.
지금은 프레쳐보다 높은 등급의 회원을 손짓 한 번에 간단히 기절시킬 수 있게 되었다.
루비아와 함께할 때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 철컥.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눈앞의 상황을 해결 하는 게 중요하다. 사육사 두 명을 냉동고구석에 치워 놓았다.
이어 시체 두 구를 옆구리에 끼고 창고 밖으로 나갔다.
매장해 줄 생각이었다.
후작이나 레일리가 시체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졌는지 모른다.
비바람에 쐬어 없어지는 풍장이나 하얀 재가 되어 뿌려지는 화장을 선호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 물어볼 수는 없다.
어쨌건 네크론이 키우는 벌레들의 먹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흡수한 값이라고 생각해 줄까.
은신을 최대로 펼쳐 조심스럽게 축사지역을 빠져나갔다.
자취말소 특전 덕분인지 추적은 붙지 않았다.
산맥을 타고 한참을 이동했다.
[탐지 Lv.6을 발동합니다!]
대략적인 주변 지형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흐르는 냇물의 깊이와, 움푹 파이고 솟은 산의 봉우리들이 느껴졌다.
한참 산을 돌아다닌 끝에, 인적 드물고 묻기 좋은 곳을 찾았다.
높은 봉우리를 등지고.
앞에 맑은 물이 흐르는 야트막한 언덕을 발견했다.
이 정도면 적당하다.
‘검기.’
- 우우우응!
푸른 검기가 순식간에 검끝까지 솟아올랐다. 주로 칼날 부분에만 맺히던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였다.
- 우응! 우우우응!
검면을 넘실대며 흐르는 검기는 칼끝에서 허공으로 손가락 한 마디 정도나 솟구쳐 있었다.
이게 레벨 3의 검기.
슬쩍 바닥을 향해 휘둘렀다.
- 광!
강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겨울바람에 꽝꽝 얼어붙은 땅이 한번의 칼질에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깊이 속살을 보였다.
- 콰광!
다시 한 번 휘둘렀다.
굉음이 울리면서 흙덩이들이 하늘높이 솟아올랐다.
움푹 파인 땅이 보였다.
‘너무 자연 파괴인데.
어쨌거나 이번에는 매장 풍습을 존중해 줄 생각.
깊게 파인 땅에 후작을 던진 뒤,
레일리를 적당히 위에 엎었다.
그리고 다시 파낸 흙을 꼭꼭 눌러 덮어 줬다.
‘뭐, 이 정도면 됐지.’
비석이나 관은 없다.
하지만 지형을 보면 폭우에 쓸릴 염려도 없고, 워낙 고지대라 누가 와서 파헤칠 것 같지도 않다.
내 무덤보다 낫다.
녀석들을 묻어 주고 난 뒤 산으로 숨어들었다.
향상된 탐지 스킬 덕분에 으숙한 계곡이나 동굴 같은 걸 발견하기도 쉬웠다.
일 하나를 끝마치자, 새삼 차가운 긴장감이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어젯밤 레일리를 죽인 적은 정체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네크론의 제사장.
그렇게만 짐작해 볼 뿐.
언제 잡혀 으스러질지 모른다.
레일리처럼.
- 쉬이이익.!
어젯밤의 그 소리가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에 몸서리가 쳐졌다.
독사가 긴 혀를 넣고 안쪽을 깊이훌어 내는 기분이었다.
- 첨벙!
계곡물에 담근 다리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물 위에 떠 있던 조각구름 하나가 출렁거리며 흩어졌다.
계곡물이 다시 잔잔해지기 전에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튀는 게 좋겠어.’
너무 설쳤다.
필요한 일만 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황당할 정도다.
처음 수도에 올 때부터 푸르손의 신도들에게 쫓기는 처지였는데.
수상한 놈들이 삼삼오오 움직이고 있던 장례 행렬에선 꽤나 눈길을 끌어 버렸고.
레일리와 싸우며 마법 회로의 흔적을 잔뜩 남겼다.
황실과 네크론이 엮인 비밀스러운 사육장까지 와서 이 난리를 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망가야 한다.
더 나대면 곤란하다.
앞으로 일주일간 펜던트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이곳은 나에게 마경魔境 그 자체.
탈출 방법을 고민했다.
‘수도를 떠나려면.
정문으로 걸어 나가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확률이 높다.
푸르손의 신도들.
네크론 신사회.
황실.
지금 나는 그 세 집단에 전부 다노려지고 있다고 봐도 좋다.
‘후우. 나냐우 신세를 한 번 더져야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