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매듭 (2)
밖으로 나가는 출구 앞에는 현재위치가 적혀 있다.
회색 통로는 단조롭다.
안에 있으면 여기가 어딘지 감도 잡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곳곳에 표지판이 있다.
출구 앞의 표지판과 제국 지도를 번갈아 확인했다.
‘.멀리도 왔군.’
제국 지도로 보면 걸어서 사흘씩 걸릴 거리를 벌써 도착해 버렸다.
이 통로는 은밀하다는 것 외에도 기동성에서 탁월하다.
상하좌우로 돌지 않는다.
어떤 장애물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일직선으로 지하를 뚫어 놓았다.
새삼 이 통로를 만든 인간들의 대단함이 느껴졌다.
이런 기술력을 가진 옛 인류.
그런 그들을 고문용 장난감으로 사육한 사도들.
‘사도라는 건. 어떤 존재지?’
다시 한 번 궁금해진다.
그런 내 질문에, 300년을 살아온인간인 트로핀 나냐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관련 기록이 궁금하면 황실 비밀서고를 뒤져 보라고.
물론 샤루니안의 기척도 못 느낀내가 황실에 숨어들어 간다는 건 꿈도 못 꿀 일.
‘황궁 전체가, 관측이 불가능하게 안개로 뒤덮여 있었지.’
나는 이리저리 상상을 뻗어 간다.
<사도>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건국제 세이론에게 갈가리 찢겨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던데.
남아 있다면 무엇을 위해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내가 그들에게 뭔가 얻어 낼수 있을까?
‘엘프도 멸종했다고 했지만.’
협곡에서 나타난 푸르손의 신도 가운데는, 분명히 엘프의 외양을 가진 개체도 있었다.
혹시 그 사도라는 것들도 어딘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지금 내 수준에서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 철컥.
그저 한 걸음씩 디뎌 보는 수밖에.
사다리를 타고 출구로 올라갔다.
나냐우가 알려 준 대로 뚜껑 안쪽의 손잡이를 조작해 열었다.
비밀 통로의 개폐 방법.
무척 민감한 정보다.
길드원도, 간부도 아닌 내게 여기까지 알려 줬다.
이건 분명한 호의다.
텅 빈 갈비뼈 안쪽이 조금 반응할정도의 호의.
내가 아닌 레나를 향한 호의라도, 반가운 건 마찬가지.
- 끼이이익.
통로 출구를 열었다. 작은 금속성소리가 울려퍼진다.
- 후우욱.
겨울밤의 공기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불쾌한 바람이 찐득이 사방에서 달라붙는다.
스멀거리는 까만 바람은 지독한 원념怨念이 쌓인 찌꺼기.
<사형수의 늪>
나냐우가 골라 준 몇 개의 출구가운데 일부러 여기를 골랐다.
인간의 거주지와 꽤 떨어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레나의 동생을 데리러 가기 전, 한 번 싸워 봐야 할 상대가 이 늪지대에있다.
‘탐지.’
이 장소는 악의로 가득 차 있다.
- 애애애애앵.!
온갖 질병을 다 가진 벌레들이, 흡혈 육식을 위해 활발하게 날아다닌다.
- 저벅.
한 발자국만 잘못 디디면 차갑고 찐득한 늪으로 빠져든다.
- 스스스슥
노란 눈을 빛내는 악어들이 먹이 근처로 빠르게 다가온다.
물론 나에게는 아무 해당 사항이 없다. 날벌레에 물릴 걱정 따위는 당연히 전혀 없다.
탐지 스킬은 이미 지형지물까지 모두 파악하는 수준에 이르렸다. 발을 잘못 디딜 걱정도 없다.
악어 같은 건.
[공포 Lv.l을 사용합니다!]
[대상: 3개체]
[체력이 0.19% 소모됩니다.]
[당신과 먹이 사이의 스랫 차이:
절대적.]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뜯어 부수려 달려들던 악어세 마리가 굳어 버린다.
- 툭.
나는 그중 한 녀석을 슬쩍 발로 걷어찼다.
“뭐가 이렇게 커?”
악어가 바르르 떤다.
유황불을 흉내 내던 노란 눈동자가 흐물흐물하게 힘을 잃어버렸다.
스킬의 강도를 살짝 낮췄다.
악어들이 가죽과 살점을 종이처럼 잡아 뜯을 수 있는 커다란 아가리를 조심스레 닫는다.
머리를 푸욱 수그리고 네 다리를 움직여 슬금슬금 물러간다.
그냥 내버려둔다.
저런 것들을 죽여 봐야 경험치도 거의 주지 않는다.
무시하고 걸어간다.
호수가 썩어 변한 커다란 늪 주위에는 수억 마리 날벌레가 산다.
그중 한 덩어리가 검은 바람이 되어 나에게 달려든다.
- 위이이이이이이잉.!
악어들처럼 쫓아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스킬로 저들 하나하나지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공포의 광역 오오라 같은 걸 사용할수 있다면 좋겠지만.
‘크라켄을 한 번쯤 더 흡수해야 가능하려나.’
- 파츠츠춧!
검 전체에 기운을 실어 넓게 칼을 휘둘렀다.
수만 마리 날벌레가 칼에 닿지도 못한 채 잿더미가 되어 스러진다.
‘레나는 이런 데 데려오면 절대 안되겠군.’
문득 엉뚱한 생각이 난다.
그녀는 인간을 잡아먹는 커다란 식인거미도 징그러워하지 않고 무척 잘잡았다.
하지만 이건 비위나 미감美感의 문제가 아니다.
난이도다.
피와 살을 가진 녀석들은 이곳에 발을 들이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도전일 터.
공기 반 날벌레 반인 이런 공간에 있다간, 자기가 뭘 들이쉬는지도 모르고 안팎으로 살점을 뜯기면서 금세 뼈만 남게 된다.
‘나야 뭐. 애초에 뼈밖에 없고.’
썩은 호수를 지나자 수풀이 훨씬더 빼빽해진다.
서로 얽히고설킨 잡목과 수풀은 오랫동안 시체를 먹고 자라서인지 억세고 질기다.
- 서걱!
물론 내가 휘두르는 칼날에 저항할정도는 전혀 아니다.
탐험용 넓적칼처럼 쓰고 있지만, 이래 백도 그라스미어의 3대 영주가 만들었다는 걸작.
2미터에 달하는 크기 덕분에 슬쩍가볍게 휘둘러도 넓은 길이 난다.
높의 중심으로 향할수록, 공기가 점점 더 끈적거린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이 장소가 던전은 아니다.
하지만 나냐우가 나에게 전해 준다양한 정보 가운데, 이 장소로 접근하면 높은 확률로 만나게 될 녀석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90% 이상의 랜덤 인카운터.
- 꾸룩.
‘그렇지.’
반가운 소리다. 오래지 않아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 꾸르르르르록.!
늪에서 끈적거리는 점액 덩어리가 솟아오른다.
시체 썩은 늪이 손, 다리, 얼굴을 갖추고 꿈틀거리며 늪과 땅의 경계쪽으로 기어 온다.
[늪의 악령과 만나셨습니다!]
[늪의 악령]
[랭크: C트리플 플러스]
[늪에 버려진 수많은 사형수의
악의와 원념이, 오랜 세월 쌓여서 만들어진 사악한 정령입니다.]
[고통과 악의를 전파합니다.]
[주위의 수원을 오염시킵니다.]
[난이도 판정: 절망]
보스급 몬스터의 등장이다.
난이도 판정을 눈여겨본다.
이번 생을 꽤 길게 싸워 오면서 레벨이 꽤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40 정도의 레벨로 이놈에게 덤비는 건 미친 짓인 모양이다.
- 꾸우우우우우우!
‘슬슬 난폭해지는군.’
크기는 하다.
팔 길이만 해도 무려 십여 미터.
- 후두두둑! 치익!
검은 점액이 연기를 내며 주위를 뒤덮는다.
‘공기 오염이라도 시키나?’
- 꾸루. 꾸루루,
하지만 악령은 아무 반응도 없는 나를 보고 당황한 눈치다.
“.뭐 하냐?”
슬쩍 녀석을 바라봤다.
피부와 호흡기에 데미지를 받아, 패닉에 빠져 울부짖는 모습이라도 기대했던 걸까.
- 부우웅!
반응이 없자 거대한 주먹이 똑바로 날아온다.
‘시작이군.’
- 파츠츠춧!
[검기 Lv.3을 발동합니다!]
연푸르게 물든 검으로 늪 정령의 거대한 왼팔을 베어 냈다.
- 꾸어어어!
끈적거리는 왼팔을 녀석이 다시 주워몸에 붙인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1미터가 넘는 얼굴로 웃는 표정을 짓는다.
부정형不定形의 적.
나도 예상한 바다. 어차피 놈은 연습상대에 불과하다.
[산성酸性 Lv.5를 발동합니다!]
- 치지지지지지직!
검기가 연초록을 띤다.
강한 부식성을 띠는 검기지만.
- 치익! 치이이익!
그라스미어의 대검은 아무렇지도 않게 버텨 낸다.
- 꾸어! 꾸우우어어어어!
한 번에 잡아먹으려 달려들었던 입 쪽이 녹아서 타들어 간다.
늪의 악령은 꽤 타격을 입은 듯 심하게 비틀거린다.
‘느낌이 오는군.’
레나 동생을 구하러 가야 하는데 엉뚱한 곳에서 늪 정령과 싸우는 이유는 간단하다.
보육원장 슬라임.
그 실체는 푸르손 계파의 간부.
충돌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꿈틀거리는 녹색 점액질이 단번에 내 갑옷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녹여버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반항할 엄두조차 못 내고 당했다.
‘반복할 순 없어.’
연습이 필요하다.
- 꾸워워어어어!
덮쳐 오는 오른팔을 연녹빛 검기로 지져 버린다.
악의와 원념으로 꿈틀거리는 늪이 부분적으로 소각된다. 이 녀석은 슬라임과 비슷한 부류.
이런 점액질 부정형 몬스터에게 어떤 공격이 얼마나 통할지 한번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멀쩡히 있던 늪의 악령으로서는 아닌 밤중에 흥두깨겠지만, 상대의 사정 따위는 봐줄 생각이 없다.
- 치이이이익! 퍼걱!
끈적거리는 시꺼먼 한 부분이 또다시 터져 나간다.
점액으로 된 악령의 몸에서 몇몇파편이 튀어나온다.
사슴 모양, 인간 모양, 나귀 모양, 작은 새 모양의 점액 덩어리들이 끈적거리며 밖으로 흩어진다.
‘이런 걸 먹었다는 건가?’
자그만 점액 덩어리들은 꿈틀대며 악령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악령은 커다란 손을 휘둘렀다.
그들을 다시 몸에 쓸어 모으려는 듯한 움직임이다.
물론 그대로 놓아둘 생각은 전혀없었다.
‘공포.’
부정형의 적.
그럼에도 공포가 먹힌다.
바다의 광망狂妄 크라켄의 권능이 새삼 대단하다는 게 실감된다. 악령의 움직임이 한순간 멈칫한다.
‘결빙.’
- 사가가각!
칼에서 싸늘한 냉기가 몰아친다.
동시에 화르록, 하는 소리와 함께 샤루니안이 준 부적이 타올랐다.
한 매듭.’
부적 팔찌는 마흔아홉 매듭이다.
생각보다 감당하는 용량이 크다. 이정도면.
슬라임과 본전을 치를 때 충분히 마법을 활용할 수 있을 듯하다.
- 까앙!
얼어붙은 점액 부분을 부쉈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악령이 울부짖는다.
하지만 내장 하나만 떼어도 죽어버리는 인간 따위와는 다르다.
압도적 재생력을 가진 트롤 같은 부류와도 차원이 다르다.
끊임없이 서로 뭉치며, 그 몸을 구성하는 재료 자체를 아예 전부 휘발시켜 버려야 한다.
한 번에 안 되면,
- 치이이이익!
조금씩이라도.
- 부우응!
내가 딛고 선 단단한 바닥을 늪의 악령이 연달아 물컹거리는 주먹을 휘둘러 공격한다.
악취를 풍기는 시꺼먼 점액이 꽤 불쾌하다. 하지만 이미 크기가 꽤 줄어든 상태.
이 정도라면 정면으로 받아쳐도 어디로 튕겨 나갈 염려 따윈 없다.
- 퍼엉!
최대로 뽑아낸 연녹색의 검기를 악령의 주먹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튕겨 난 검을 바닥에 댄다.
‘발도’
검집도 없는 대검. 하지만 스킬이라는 건 꽤 편리하다.
본령을 파악하고 있다면 기괴한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다.
- 끼기기긱!
얼어붙은 땅을 그어 가며 추진력을 얻은 뒤.
[참격 Lv.2를 발동합니다!]
- 퍼거거걱!
눈부신 연초록 섬광이 큰 반원을 그리며 공간 전체를 베어 나갔다.
- 꾸르르르르.! 꾸어어어.!
칼이 지나간 부위가 상하로 녹아내렸다.
악령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소멸되려면 한참 멀어 보인다.
‘검술만 갖고 싸우려면. 좀 지겹겠군.’
몇 번 검기를 더 뿌린 뒤, 나는 부적 팔찌의 매듭이 조금 더 타는것을 각오했다.
‘격발.’
화?르르르!
매듭 마흔아홉.
그중 넷이 불타 재가 되었다.
늪의 악령을 두 번 얼리고, 두 번태웠다.
아깝지는 않다.
소중한 정보를 얻었으니까.
‘얼린 뒤, 폭발시켜 부수는 식이면 되겠군.’
게다가 루-름의 흔적을 지워 주는 부적 팔찌도, 생각보다 그 소모가 심하지 않다.
마음이 꽤 가벼워졌을 때였다.
- 띠링!
[클리 어!]
[랜덤 인카운터:<사형수의 늪>의 악령을 처치했습니다.]
[난이도 판정으로 용사 포인트가 400% 가산됩니다.]
용사짓을 했다는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른다. 내가 타자를 착취했다는 명백한 증거다. 하지만 거기에서 씁쓸함을 느낄 생각은 없다.
원하는 상대를 지켜 주지 못했을 때의 참담함과 무력감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맛보고 싶지 않다.
그걸 위해서라면 기꺼이 착취의 사슬에서 싸워 나가겠다.
착취자로서의 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철저한 가해자가 되겠다.
마음을 다잡으며 눈앞에 떠오르는 반투명한 메시지들을 읽어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다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