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매듭 (4)
수첩을 앞으로 넘겼다.
왼쪽 위에 인간들의 이름이, 옆에는 각각의 등급이 기록되어 있다.
‘레나, A등급, 10세이론.
다시 그 문장에 눈에 간다.
처음 봤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넘겼던 기록이다.
사냥 장부.
레나의 이름이 대체 왜 여기 적혀있었던 걸까?
한 가지 가설이 머릿속을 스친다.
루비아와 함께 있을 때는 레나가 사냥당해 있었고, 동굴에서 만났을 때는 탈출해 있던 거다.
그렇다면 얼핏 맞아떨어진다.
레나가 대부분의 인간은 그저 자신을 착취하려 한다고만 말하던 게 연이어떠올랐다. 그 착취에, 노예로서의 생활이 포함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간을 혐오했던 게.
- 철컥.
고개를 흔들었다.
곧 생각을 지워 버렸다.
어쨌건 레나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는 이상 멋대로 짐작할 필요는 전혀없다.
물론 여기 적힌 인간이 그냥 같은 이름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으. 으으어.
수첩을 펄럭이고 있는데, 옆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소년이 있는 것도 깜빡 잊었다. 험하게 맞아 멍든 얼굴이 보인다. 얼굴에 공포가 가득하다.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기로 했지만, 레나도 혹시 이런 꼴을 겪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년이 한층 더 가엾게 생각됐다. 녀석을 바라보고 말을 걸었다.
“이 정도면 도와준 건가?”
“히끅!”
소년이 딸꾹질을 하며 덜덜 떤다.
도와달라고 자신감 있게 외치던 녀석이 보이던 태도로는 어색하다. 고맙다고 귀찮게 달라붙을 줄 알았는 데, 예상외의 모습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곧 상황을 이해했다.
소년의 발치에, 그가 말한 ‘악당’들의 몸이 참혹히 짓이겨져 있다.
물론 구해 주길 바랐을 거다.
하지만 정작 압도적인 폭력의 맨살을 마주하자, 고마움보다 공포를 먼저 느껴 버린 게 아닐까.
어깨 갑옷이 몸 절반을 으깨 버린 검은 머리 남자의 시체가 소년의 가장가까이에 있다. 놈의 시체는 내가 봐도 좀 징그럽다.
쇼크가 너무 심했던 탓일까? 하얀수정체가 안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와있다. 소년은 몸이 굳은 채 이만 딱딱 부딪친다.
‘버리고 갈까.’
역시 버리고 갈까 했지만, 덜덜 떠는 모습을 앞에 놓고 보니 문득 루비아도 생각난다. 약간은 신경 써 줘도 좋을지 모른다.
“어이, 인간.”
“으. 으어.
실패다.
소년은 한층 더 햇햇이 굳어 말을 더듬었다.
나는 곧 내 잘못을 깨달았다.
‘호칭이 잘못됐나.’
별생각 없이 불렀다. 인간이라고 부르는 순간, 상대가 나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할지는 뻔하다.
- 꿀꺽.
침을 삼키며 심호흡하는 소년을 향해슬쩍 돌아섰다.
수습이 필요하다.
[가면무도회Masquerade 활성화!]
[짧은 시간 동안 얼굴에 ‘인간’의 모습을 덧씌습니다.]
[변신: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65% 흡사합니다.]
[남은 부분은 무작위 처리됩니다.]
[제한 시간: 10분]
[다음 사용까지: 6시간]
오래간만에 쓰는 스킬이다.
어차피 근처 도시에 갈 때까지는 한참 남았다. 투구를 벗어 소년을 안심시킬 생각이다.
이제 신뢰할 수 있는 말끔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까?
- 철컥.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으, 으, 으아아!”
소년은 뭉개진 시체를 밟고 마구뒷걸음질 쳤다.
‘.뭐야, 반응이 왜 이러지?’
예상과 전혀 다르다.
압도적인 폭력을 목도하고 가만히 굳어 있기만 하던 소년은, 이번에는 아예 악몽에 나오는 귀신이라도 본듯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유, 유령이.!”
‘.유령이라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나와 소년뿐이다.
칼을 들어 비치는 모습을 확인했다.
스킬은 이상 없이 제대로 먹히고있다. 뭐가 잘못됐는지 당장 깨닫기는 힘들다.
“히, 히익.!”
- 철퍽!
소년이 으깨져 흐르는 내장을 밟고 미끄러지듯 바닥을 굴렀다.
온몸에 피로 칠갑을 한 채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내게서 도망가려 한다.
‘.어쩌겠다는 거지?’
팔짱을 끼고 가만히 녀석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위기회피(리가 발동합니다!]
[소년을 살해하십시오!]
[다음 발동까지: 167:59:59.]
‘.뭐야? 이런 허약한 인간이 내위기가 된다고?’
은은히 돌던 펜던트의 빛이 다시 사라졌다.
레나에게 받은 펜던트.
시나리오 클리어 아이템이라며, 특별한 권능이 부여된 아티팩트.
레일리와 함께한 밤에 나를 살린 펜던트의 권능이 다시 발휘된다.
하지만 농담에도 정도가 있다고 불평하고 싶은 심정이다.
눈앞에서 떠는 소년은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도 죽을 것 같은 인간.
- 철컥.
그럼에도.
몸이 펜던트를 신뢰한 탓일까.
대검을 잡은 손에 조심스레 힘이 들어갔다.
‘정말. 죽여야 되나?’
- 흠칫!
꽉 잡은 대검을 보고 뭔가 눈치챈건지, 소년의 몸이 경련한다.
- 철퍽!
벌떡 일어선 녀석이 본격적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산책하듯 가볍게 녀석을 쫓는다.
주위에는 어차피 나와 소년 말고는 아무도 없다.
아직도 혼란스럽다.
“으아아아아아!”
소년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펜던트를 흘끗 바라봤다. 그 위에 뜨는 창을 확인한다.
[???살해하십시오.]
[다음 발동까지: 167:58:59.]
걷듯이 뒤를 쫓으며 생각한다.
흙덩이를 뭉쳐 던져도 죽일 수 있을것 같은 약한 인간이라, 오히려 살해가 망설여진다.
너무 쉽게 깨어질 작은 유리잔 앞에서는 오히려 내 쪽이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다.
왜 펜던트는 이 상황을 위기라고 판단했을까? 소년을 놓치는 것에 대한 걱정보다 그게 더 궁금했다.
- 쏴아아아.I
길이 조금씩 좁아졌다.
낭떠러지라고 부를 만한 곳이 왼편에 펼쳐지고, 저 아래 깊이 빠르게 흐르는 강물 소리가 들린다.
나는 소년의 네 걸음 뒤에서 그를 쫓는다.
잡으려면 언제든 잡을 수 있다. 죽이려면 언제든 죽일 수 있다.
그러나 대체 뭘 하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 살해와 포획을 막는다.
그때 였다.
“히, 히익!”
뒤를 힐끗 돌아본 소년은, 내가 바로 뒤에 있는 걸 확인하고 놀라 발을 삐끗한다.
‘이런.,
“으아아아아아악!”
깡마른 몸뚱이가 아래로 빠르게 떨어진다.
새는 가끔 땅 위를 걷지만 인간은 하늘을 날지 못한다.
찢어질 듯한 비명이 계속 절벽을 타고 울리다가.
- 첨벙!
마무리된다.
‘.잡았어야 했나.’
소년은 강이 흐르는 낭떠러지 아래로 멸어졌다. 굳이 몸을 날린다면 살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년을 죽이라는 펜던트의 메시지가 나를 주춤하게 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가만히 아쾌를 바라봤다. 까마득하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탐지도 안 되는 높이다.
‘죽었겠지.’
머리를 흔들었다.
아래까지 찾아가서 수색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나는 계속 걸었다.
더 이상 시끄러운 일에 얽혀들고 싶지 않았다.
은신 스킬을 사용해 숨어 걸었다.
해가 지고 다시 솟아나고, 달은 희미하다 다시 또렷해졌다.
표지판을 따라 사흘쯤 걸었을 때, 익숙한 회색 성벽이 보였다.
유블람이 었다.
성벽에 천천히 겨울 노을이 졌다.
성문으로 횃불을 든 경비병 둘이 나와 자리를 잡았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도시에 볼일이 있는 건 아니다.
보육원 근처 마을로 걸어갔다.
커다란 목재소에서 나무 켜는 소리가 들린다.
저 멀리 와인 양조장이 보이고, 앞쪽에 이 층짜리 보육원 건물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날이 추워서인지 밖에서 뛰노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레나를 감싸고 좋아하던 아이들은 이제 없다.
‘탐지.’
여기부터 조심해야 한다.
슬라임의 영역이다.
‘역시. 다들 건물 안에 있어.’
하지만 예전에 본 슬라임 원장이 느껴지지 않는다.
잠시 자리를 비웠거나.
아예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예전 생에서도, 슬라임은 이곳을 다른 인간에게 맡기고 떠났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관리하는 성인자체가 없다. 위화감이 느껴진다.
‘아예 보육원을 버린 걸까?’
그러면 일이 편해진다.
은신 상태로 안쪽으로 파고들어 갔다.
당연히 나를 발견한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레나 동생의 얼굴은 분명히 기억한다.
2층에서 곧 그녀를 발견했다.
‘독실.?’
레나의 선명한 이목구비를 빼다 박은 여자아이가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의자에 앉아 있다.
놀라게 하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한다.
일부러 밖으로 나가서 문을 두드렸다.
- 똑똑.
“들어오세요.”
‘들어오라고?’
의외로 침착하다.
말투가 달라졌다.
자매의 시간을 방해하기 싫어서 아이와 말은 거의 섞지 않았지만, 보육원을 거점으로 3개월이라는 긴시간을 보냈다. 자매가 함께하는 모습은 많이 지켜봤다.
적극적이고 귀여운 성격이었는데.
물론 레나와 함께일 때와, 혼자 있을 때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건 얼굴은 분명 그녀다.
은신을 해제했다. 그대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개의 그린 듯한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아이는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묻는다.
“그런데 누구세요?”
“레나 친구다.”
“언니 친구요? 이런 친구가 있는 줄몰랐네요.”
나는 레나가 쓴 편지를 내밀었다.
“봐. 증거야.”
여자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진짜 언니 글씨네요.”
“그럼.”
“절 데려오라고 했다고요?”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아이는 조금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연찮은 기분이 들어 물었다.
“.혹시 가기 싫은 거니?”
“무슨 소리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같이 가요.”
아이는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몸에 약간 헐렁한, 붉은 로브를 입은 아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이는 어딘가 텅 빈 느낌이었다.
하지만 전에 본 것과 정확히 같은 인상착의다. 착각은 아니다.
뭔가 이 인간 소녀의 마음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난 그저 의뢰를 받았을 뿐인 처지.
지금은 빼내는 게 급하다.
- 팟!
아이를 안고 그대로 2층 창문으로 솟구쳤다. 감시자의 기척도 없다.
몸이 한참 날아 저 멀리 떨어졌다.
그라스미어로 갈 일만 남았다.
늪의 악령과 싸워 가며 대비한 게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쉽게 되나.’
빨간 로브를 입은, 품에 안긴 아이는 잠시 조용했다.
금세 그라스미어로 가는, 잘 닦인길로 접어들었다.
아이가 내게 물었다.
“둘은 언제부터 친구가 됐어요?”
“언제부터 라.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동굴에서 처음 만난 시점으로 대답했다.
“금방 친해졌네요. 신기하네.”
노을이 사라지고 점점 더 사위가 어두워졌다.
아이는 흔들림 없는 까만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투구는 언제 벗을 거죠?”
이제 곧 그라스미어에 도착한다.
하루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스킬을 남용하는 것도 좋지 않다.
투구를 벗을 생각은 없었다.
말을 돌리기 위해, 다른 질문을 생각해 냈다.
“글쎄. 혹시 뭐 필요한 거 없니?”
지나치게 늦은 질문 같기도 하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담을 거 있나요?”
“담을 거?”
“구슬 두 개 담을 만한 거요.”
인적이라고는 없는 깜깜한 길에 마른나무들이 띄엄띄엄 서 있다.
구슬 두 개.
나는 배낭을 뒤지기 위해 걸음을 약간 늦췄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구슬은 어디 있는데?”
- 투둑.
그린 듯이 새까만 두 눈이 앞으로 밀려 나왔다.
안쪽에 눌려 있던 두 개의 눈이 솟아났다.
한쪽은 붉고, 다른 한쪽은 초록인 무기질의 두 눈이 겨울밤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떨어진 까만 구슬 두 개를 쥔
아이가 말을 이었다.
“힘들게 세공한 거라, 버리기가 좀아깝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