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매듭 (5)
“너는.!”
나는 깜짝 놀라 소녀를 바라봤다.
그 얼굴에서 새로 솟아난 두 개의 눈은 익히 알고 있던 것이었다.
성인 남자에서, 요염한 젊은 여자로 몸이 바뀌면서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았던 한 쌍의 오드아이.
슬라임이 다.
“저를. 아세요?”
- 스르록.
질문을 하는 입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틈도 없었다. 물컹거리는 액체로 변한 소녀의 손이 건틀렛 사이로 녹아들어왔다.
‘위험하다!’
또 같은 꼴을 당할 수는 없다.
칼을 잡고 뒤로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미끌거리는 점액은 이미칼자루 전체를 도포한 뒤였다.
뒤로 당기려 해도 마찰력이 전혀없었다.
쑥, 하는 느낌과 함께 칼자루가 가볍게 손을 빠져나갔다. 어떻게든 다시 잡아채려는 순간이었다.
- 펑!
슬라임의 상체가 크게 늘어나며 파도치듯 얼굴을 덮쳐 왔다.
- 철컥!
갑작스러운 공격에 나동그라지듯몸을 굴려 물러났다.
몇 바퀴를 구른 뒤 급하게 일어나앞을 노려봤다.
슬라임은 아예 대검 절반 정도를 끈적거리는 몸으로 감싸고 있었다.
점액질로 이루어진 몸은 날에 전혀상하지 않았다.
‘.당했다.’
완벽하게 기만당하고, 기습당했다.
슬라임이 아이의 형태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 정보가 유출된 건가? 그럼어디까지? 왜 혼자 나를 기다리고있지? 어떤 사태가 벌어지든 혼자 감당할 수 있어서인가? 아니면.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난타했다.
아직 소녀의 형태를 유지한 녀석이 입술을 작게 꼼지락거렸다.
“칼을 못 쓰게 되셨군요.”
멍청하게 슬라임을 쳐다보다가, 그만 엉뚱한 말을 내뱉어 버렸다.
“네 몸은. 산성 액체 아니었나?”
보육원에 시비를 걸러 온 인간을 녹여 죽이는 모습을 본 적 있다.
나도 녹아 죽었다.
그러자 슬라임은 왼쪽 입꼬리를 비뚜름히 찢어 올렸다. 인간이라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길이였다.
“호오. 그런 것도 알고 계세요?
저에 대해 꽤 조사하셨나 보군요.”
“부식시키는 것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미끄러지는 건 더 쉽죠.”
슬라임은 나와 말을 섞고 싶은 듯했다. 정체를 파악하고 싶은 걸까.
대꾸하지 않았다.
반격을 준비해야 한다. 손목에 두른부적 팔찌를 확인했다.
‘.마흔다섯.’
불타지 않은 매듭 마흔다섯 개가 남아 있다. 말파스의 인장을 남기지 않고 마법을 쓸 수 있는 한계다.
잠시 녀석을 가만히 노려봤다.
슬라임은 몸을 앞쪽으로 늘이며 말을 이어 갔다.
“레나는 어떻게 된 거죠? 갑자기 길드 지부장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혹시 당신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벌써 아는 건가.’
하긴 계파가 달라도 같은 길드다.
녀석을 그때 본 이너서클의 고위간부라고 생각하면 정보가 빠른 것도 자연스럽다.
“그래도 동생은 생각나나 봐요.
어떻게 된 일인지 본인을 꼭 만나보고 싶은데, 데려와 주시죠.”
“어디 있는지 안다면, 직접 가서 만나지 그러나?”
슬라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쪽도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귀찮은 게, 그 아이 근처에 붙어있기도 하고요.”
샤루니안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진짜 동생은 어디 있지?”
“레나가 직접 오면 만나게 해 줄거예요. 아니면.
“아니면?”
“절 이겨 보세요. 알려 드릴지도 모르죠. 무기도 벳긴 주제에,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지만.”
‘젠장.’
그녀의 말대로다. 어처구니없는 기습으로 칼을 빼앗겼다.
물론 애초에 금속으로 벨 생각은 아니었다. 늪의 악령으로 연습할 때부터 결심했다.
마법으로 제압한다.
하지만 매개로 검이 필요하다.
검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는 않다. 그저 매개체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건지도 모른다.
맨손으로는 안 될까?
- 철컥.
주먹을 쥐었다. 아이작이 몸을 점거하고 있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고, 칠흑 같은 밤을 곧장 맨손으로 얼렸다. 얼어붙은 공기에 번개를 흘렸다.
‘된다.’
칼에 익숙해져 있을 뿐.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은 있었다.
아이작이 맨손으로 발동했을 때는 마법의 위력이 가벼웠다.
혼합 마법도 쓰지 않았다.
위력이 약한 건지, 약하게 써야만 했던 건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정도로 출력할 수 있을까?
마흔다섯 개의 매듭을 태우기도 전에 몸이 부서질지도 모른다.
어쨌건 선택권은 없다.
이대로 맞아 죽거나 또다시 녹아죽지 않으려면, 해 볼 수밖에.
“이기면, 정말 알려 주는 건가?”
소녀의 모습을 한 슬라임은 몸을 물컹거리며 씩 웃었다.
“당연하죠.”
“그럼. 나도 날 이기면 레나에게 안내해 주도록 하지.”
물론 거짓말이다.
싸우다 죽더라도 레나를 위험에 처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결빙.’
오른쪽 주먹에 조용히 차가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얼음의 힘으로 슬라임을 구속해 볼생각이었다. 늪의 정령에게는 몹시효과적으로 먹혔던 공격이다.
손목에 두른 부적 팔찌에서 은은한 열이 느껴졌다. 오른쪽 주먹에 차가운얼음이 맺혀 갔다.
‘된다.’
아이작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몸의 주인인 나도 가능하다.
‘더블 캐스팅, 질풍.’
왼쪽 주먹에는 바람을 힘을 불어넣었다. 부적 팔찌에서 또 하나의 매듭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어라?”
슬라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질주.’
- 팟!
앞으로 달려 나가며 곧장 주먹을 휘둘렀다.
[냉기 폭풍 Lv.l을 발동합니다!]
[분출 매개체가 없습니다.]
[현재 기준, 초당 체력이 0.241%감소합니다.]
- 타닥!
샤루니안이 매 준 부적 팔찌 매듭세 개에 주화況火가 붙었다.
바람을 타고 얼음이 뻗어 나갔다.
푸른 냉기가 빠르고 넓게 밤을 얼려갔다. 질주의 가속력으로 뻗은 주먹끝에, 하얗게 뭉친 폭력이 슬라임을 직 격했다.
- 펑!
새까만 밤이 폭발하듯 깨졌다.
하지만 슬라임은 여전히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저도 차가운 건 좋아해서.”
점액으로 된 얇은 막이 소녀 앞에 원형으로 쳐져 있었다.
신체 일부로 만든 장막의 겉면은 차갑게 얼어붙었지만, 본체는 흔들림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 저항?”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저희를 고문해 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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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체가 없다고 고통을 느낄 수 없는건 아니에요. 진화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요.”
씁쓸하게 웃는 슬라임 근처로 부서진 얼음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마법검사인가요? 아니면 칼은 위장? 어느 쪽이건 놀랍네요.
예측 못 한 공격이었어요.”
슬라임이 고개를 좌우로 갸웃하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 우두둑!
본뜬 인간 소녀가 척추동물이라는 사실을 재현하는 것처럼, 등 주위에서 묘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연기 스킬이 있다면 높은 랭크를 자랑할 것 같은 녀석이다.
‘너무 과소평가한 건가.’
인정해야만 했다. 제단에서 보여 준힘이 슬라임의 능력 전부가 아니었다.
비단 전투력뿐만 아니다. 정보력과 성격도 생각 이상이다.
어떻게든 도망은 갈 수 있으리라생각했는데, 레나 동생을 일찍부터 숨겨 놓고 자기가 분장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너는. 대체 누구냐?”
“제가 묻고 싶은 말이군요.”
장막으로 마법을 막아 낸 슬라임의 붉은 눈동자가 은은한 빛을 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당신 같은 분이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난 거죠? 힘을 숨기고 있는 게 저뿐만은 아니겠지만, 요즘 들어유난히 그 사실을 자주 깨닫네요.”
그녀는 투창을 하는 것처럼 오른쪽몸을 뒤로 젖혔다. 강한 탄력을 주며 주먹을 앞으로 뻗어 냈다.
슬라임의 녹색 눈이 반짝였다.
- 쌔앵!
‘맞으면.!’
그대로 부서진다.
몸을 젖혔다. 주먹이 가슴팍을 스치며 갑옷을 우그러뜨렸다. 자세가 무너지며 뒤로 데굴데굴 한참을 굴러나가떨어져야만 했다.
‘강하다.’
칼을 들고, 최상의 컨디션에서 정면으로 싸워도 밀릴 것 같은 힘과 빠르기 였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강한 마법저항력까지.
승산은 낮다.
다른 수단을 쓰지 않는 한.
- 휘이이앙
문득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왔다.
겨울 해는 더 빨리 지고, 겨울밤은 더 어둡다.
가까스로 다시 일어서 슬라임을 노려봤다.
아직 8할 정도는 가녀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달도 없는 밤인데 주위로 집채만 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어둠보다 짙은 그림자가.
- 달그락.
가슴팍을 점검했다.
갈비뼈 두 개가 부러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여기서 곧 파괴된다.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나는 뭘 믿고 슬라임을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갑옷 안쪽에서 뭔가 걸리적거린다.
부러진 갈비뼈는 아니다.
기스-제-라이의 칠흑 단검.
‘이거다.’
후작의 입에서마저 감탄사를 뱉게 했던 무기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쓸 것인가.
아무리 날카로운 날도 닿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 꾸르르록.
슬라임은 몸을 넓게 늘어뜨리며 내주위를 천천히 흐르듯 감싸고 있었다.
몸은 정해진 부피가 없는 것처럼 끝도 없이 늘어났다.
가만히 놓아둘 수는 없었다.
끈적거리며 바닥을 덮어 가는 액체에 간헐적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차가운 기운이 발작적으로 흩뿌려졌지만, 슬라임은 붉은 눈을 반짝이며 빠르게 장막을 쳤다.
물컹대는 몸은 일부만 바스러지며 점점 더 나를 가까이 감싸 왔다.
샤루니안이 매 준 팔찌의 매듭은 어느새 서른두 개로 줄어들었다.
냉기 폭풍을 연달아 사용한 영향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위의 기온은 점점 더 내려갔다.
- 투둑.
뒤로 한 걸음 물러났지만 도망갈곳은 없었다. 갑옷의 관절 부위에 낀 얼음만 부서져 나갈 뿐이었다.
조금만 더 끌어들인다. 한 번에 승부를 보아야 한다.
“차가운 건, 저도 좋아한다니까요.
슬슬 끝을 봐도 되겠습니까?”
길게 몸을 늘어뜨린 소녀는 이제고작 다섯 걸음 떨어져 있다.
위험할 정도로 끌어들였다.
체력은 20% 정도 깎였지만, 매개없이 시전하는 마법에도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반격할 차례.
이게 먹히지 않으면 끝이다.
“그럼 뜨거운 걸로 하지.”
나직이 내뱉으며 온몸의 회로를 가동시 켰다.
[질풍Blast Lv.l을 발동합니다!]
[격발 Lv.2 & 질풍 Lv.l을 혼합사용합니다!]
[숙련도가 매우 낮습니다.]
[마력 소모량이 300% 상승.]
[너울거리는 불꽃.]
온몸에 새겨진 <회로>가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발동하지 않았다.
혼합 마법의 장점은 그 위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2차 마법을 하나의 단독 장전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
[마법 장전]
[더블 캐스팅]
한 차례 더 혼합 마법을 압축시켰다.
두 줄기의 새빨간 불꽃 바람이 양손에 축적됐다.
[체력이 초당 3.7% 감소.]
한계다.
[격발의 플테어 Lv.l을 발동합니다!]
양손에서 강렬한 화염이 전방으로 터져 나갔다. 슬라임은 흠칫 놀라면서도 곧바로 십여 겹의 방어막을 쳤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밤에 불덩어리가 꽂히며 사방에서 하얗게 수증기가 일어났다.
- 콰과광!
“제법이군요. 하지만 힘을 낭비하시는.!”
- 치아아아악!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걷히려면 이틀 밤은 지나야 할 것 같은 자욱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실패.’
하지만 불꽃은 끝내 장막을 뚫지 못했다. 온몸에서 단번에 힘이 쑥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매듭 열 개가 한 번에 타올랐다.
건틀렛은 용광로에 들어간 쇳덩이 처럼 붉게 달아올랐고, 갑옷 안의 뼈는 녹아내릴 듯 뜨거웠다.
[주의! 체력이 3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맨손으로 행한 무리한 마법 압축의 대가는 컸다. 하지만 이게 내가 생각한 승부수는 아니다.
‘검기.’
- 우우응!
품에서 뽑아 든 기스-제-라이의 칠흑 단검을 쥐고 앞을 향해 뛰어들었다. 오랜만에 잡은 단검이 진동하며 속삭였다.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