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65화 (165/458)

166화 매듭 (6)

‘죽여라.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두운 의지가 좌리를 틀듯 몸을 타고 맴돌았다.

<그 단검은 원하는 것을 행하는 단검인걸.>

기스-제-라이의 말이 떠올랐다.

이게 내가 원하는 거라고?

그녀는 죽었다. 내가 직접 부서진 유해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지금 그 말이 사실인지, 이 칼은 사실 그저 마음을 빼앗는 마검인지 물어볼 방법은 없다.

‘죽여.

속삭임은 흙 속을 파고드는 뿌리처럼 정신을 잠식했다.

아이작에게 빙의당했던 악몽이 다시 한 번 떠오른다.

이 위험한 느낌이 단검 사용을

망설여 왔던 이유다. 하지만 죽음의 위기가 고작 반걸음 앞에 닥쳤다.

이것저것 가릴 여유는 없다.

‘아낄 것도 없지.’

자욱한 수증기 속, 이제 거리는 0.

도박을 걸 시간.

새하얀 글자들이 꿈틀거리며 살아움직이는 단검을 내질렀다.

글자 하나가 칼날을 뛰쳐나온다.

- 찌이이익!

기괴한 소리와 함께 첫 번째 막이 단번에 크게 찢어졌다.

- 뚜둑.! 뚜두둑.!

얇은 종이처럼 찢긴 첫 번째 막과 다르게, 견고한 느낌의 두 번째방어막은 약간 버렸다.

그러자 한 글자가 더 뛰쳐나왔다.

눈처럼 새하얀 글자들이 두 번째방어막을 갉아먹었다. 방어막은 곧폭설 쌓인 나뭇가지처럼 뜯겼다.

- 파직! 파지지지직!

“마법은 눈가림이었나?”

슬라임이 세 번째 막에 힘을 끌어모았다. 자욱한 수증기 안쪽의 붉은 눈과 초록색 눈이 번갈아 번뜩였다.

사방을 점거한 슬라임의 ‘몸’이 출렁거리며 크게 움직였다.

글자들을 덮치듯 감싼 뒤 그대로 찌그러뜨리려 하는 것 같았다.

- 치익! 치이이익!

하지만 글자 하나가 단검에서 더빠져나와 강한 빛을 내자, 덮쳐 오던 점액의 파도는 놀랄 정도로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슬라임의 몸이 순조롭게 찢어졌다.

상대의 <눈>뒤에 이어진 희미한 신경망 같은 게 단검을 쥔 나에게 느껴지고 있었다.

‘약점인가.?’

슬라임의 몸을 찢어 가는 글자들이 내게 힘을 더 달라고 요청했다.

산장까지 쫓아온 후작에게 저항할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때는 줄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뼈 아래, 아이작이 빼곡하게 새긴루-륨 회로가 충분히 예열된 채로 작동 중이다. 몸 곳곳에 뻗은 회로가 단검에 힘을 전달했다.

- 파지지직!

방어막이 한층 더 격렬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슬라임은 뒤로 물러났고, 글자들은 신이 난 듯 쫓아갔다.

핵을 보호하는 슬라임의 몸을 찢고 깨뜨리며 착실히 부피를 줄여 갔다.

“어디서 이런 걸.!”

슬라임은 발작적으로 반격을 시도 했지만 이미 힘 빠진 상태였다.

피하거나 막아 내기도 쉬웠다.

그나마 손 주위로 오는 공격들은 하얗게 빛나는 글자의 위세에 눌려근처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단검에는 절반 정도의 글자가 남아있었지만, 더 사용하지 않아도 이대로 충분할 것 같았다.

슬라임의 몸은 이제 1/5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갉아먹힌 몸은 하얀 재로 변해

사방에 흩어졌다. 다시 본체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승리는 금방.

하지만 불안감이 느껴졌다.

‘안. 떨어져?’

진동하는 단검이 손에 착 달라붙어떨어지지 않았다.

힘을 계속 빼앗아 가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단검이 멋대로 힘을 뽑아가며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팔뿐만 아니라 몸 전체로 칼의

지배력이 퍼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이작에게 몸을 빼앗겼던 기억이 겹쳐 왔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날카로운 경각심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아직은 괜찮다. 하지만 언제 완전히 칼에 홀려 버릴지 알 수 없었다.

‘격발.’

힘을 전달하지 않았다. 손끝에서 칼자루를 향해 화염을 터트렸다.

- 퍼벙!

- 파각!

단검이 땅 아래로 박혀 들어갔다.

땅이 몇 갈래로 깊이 갈라졌다.

키 70cm 정도로 작아진 슬라임이 균열 근처에서 휘청거리다 겨우자세를 잡았고, 갉혀 부스러진 잔해는 균열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이 정도라니.!’

기스-제-라이의 단검.

여섯 글자가 새겨진 주술 단검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했다.

소모성이긴 했지만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한 번 극복하게 해 준것이다.

한편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기스-제-라이는 나에게 이런 걸 줬는데. 그녀가 죽는 모습을 그냥지켜봐야 했다니.’

“.제가 졌어요.”

내 골반 즈음에 머리가 올 정도로 줄어든 슬라임이 작아진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승리의 쾌감은 없다.

아직 세 글자가 남아 있는 주술단검을 바라봤다.

몸이 지배당해서 그대로 슬라임을 죽일 뻔했다.

살해했다면 어떨까.

속삭이던 단검의 메아리가 아직도 머리를 맴돌고 있다.

살해. 정수 흡수.

애초에 그것을 위해 네크로멘서가 내게 넘겼던 단검이었다.

죽여 버릴까?

마법 저항과 산성, 의외의 물리력, 익히 알고 있는 감정勤定 능력.

레나 동생 따위 어떻게 되든 신경쓰지 않고, 기스-제-라이의 단검이 속삭이는 대로 죽이고 빼앗는다면.

슬라임에게 레안드로 후작 정도는 아니더라도, 기사 레일리에게 흡수한 것 이상은 넉넉히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깝다는 생각이 비릿하게 머리를 맴돌았다.

단검은 멀리 내던졌지만 머릿속에 죽이라는 속삭임이 오히려 점점 더또렷해진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슬라임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니 죽여야지.’

‘빼앗아.’

‘먹어 치워.’

- 철컥.

무심코 단검을 향해 걸어가는 내모습을 발견하고 억지로 다리를 멈춰 세웠다.

‘나는.

어지러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정수 흡수는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지겨울 정도로 할 수 있다.

일단은 레나 동생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작게 줄어든 슬라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슬라임은 겁먹거나 흠칫하며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꽤 유쾌해하는 느낌이었다.

“진짜 아이는 어디 있지?”

그러자 질문이 되돌아왔다.

“글쎄요. 먼저 한 가지 여물죠.”

“말해 봐라.”

“제가 이겼다면, 레나에게 절 데려가셨을 건가요?”

그 자리에 발을 멈췄다. 전부 읽히고 있었다는 생각에 당황해서, 적절히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여기로 동생을 데리러 올 정도니레나를 무척 아끼시는 것 같은데, 위험에 노출시키셨을까요?”

슬라임은 빙그레 웃으면서 정곡을 찔렀다.

화도 내지 못하고 녀석을 멍하니 바라봤다. 할 말이 없어지자 결국협박이 튀어나왔다.

“너를 이대로 죽여 버릴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

단검은 땅에 꽂아 버렸지만 다시 주우면 된다.

이렇게 앙증맞을 정도로 작아진 상태라면, 마법으로 상대해도 먹힐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방어막을 만든 부피조차 잃어버린것 같았다. 하지만 슬라임은 조금도 풀이 죽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보고 당당히 말했다.

“레나 동생을 영영 안 찾을 생각이 라면 그러셔도 되겠죠.”

흠칫하는 사이 슬라임은 오물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죽으면 제국 제3 본부에서 당신의 흔적을 찾아 곧바로 추적이 들어갈 겁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제국 3본부장 레트릭 아에자르.>

인간을 ‘줄이고자’ 하는 T&T 내부의 마왕 추종 집단.

슬라임은 숨기지 않는다.

내게 사실을 그대로 툭 터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레나를 조사해 보라는 편지도, 사홀 뒤에 자동으로 어딘가에서 수도로 발송될 거구요.”

레나 동생으로 공들여 분장하고, 구하러 오는 누군가를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거짓말이나 허풍은 아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하셨으니, 저도 한 가지 조건을 걸겠습니다.

일단 당신께서 저희 쪽으로 오시는건 어떨까요?"

“너희. 쪽으로?”

“그렇습니다. 저희 편이 되어 주십시오. 레나 동생은 바로 넘겨드리겠습니다. 전, 이제 그녀보다 당신에게 훨씬 관심이 갑니다.”

“뭐라고?”

“인간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 힘을 가지고 지금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건지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당신을 꼭 제가 속한 그룹에 소개하고 싶어지네요.”

정체가 들켜 버렸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는 것도 우습다.

눈앞의 슬라임은 스킬로 놀라운 감정勤定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

한차례 격렬한 전투를 거치면서, 내 정체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편이 생각해 보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앙증맞게 줄어든 슬라임의 입이 오물오물 말을 이어 갔다. 발음은 또박또박 명확했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저와 함께하시죠. 제 얘기를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슬라임은 사슴 아에자르가 푸르손의 제단에서 내게 했던 이야기를 다시 되풀이했다.

녀석들이 나를 설득하는 건, 이제이걸로 두 번째.

“거절한다.”

내 단호한 대답에 슬라임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 세계를, 이대로 놓아둬도 괜찮으시 겠습니 까?”

“마음대로 착각하지 마라. 너희들처럼 마왕 따위에게 구속받고 싶지 않을 뿐이니까.”

“호오.

“너희들이 섬기는 왕이 강림을 하건 안 하건, 그딴 놈에게 이쪽이 의지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하하핫.

슬라임은 유쾌한 듯 보였다.

신성모독이니 어쩌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호의적 태도로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말해 드리지요.”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고개가 갸웃해졌다.

“뭘?”

“찾고 계시는, 그 아이의 행방에 대해 말입니다.”

“동생의 위치를 알려 주겠다고?

그래서, 조건이 뭐지?”

슬라임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제 조건은. 급한 건 아닙니다.”

“말해라.”

“인간도 마왕도 아닌 제3의 길이 있다면 저도 그리로 가고 싶네요.

그런 길을, 언젠가 찾게 되면 말씀해주세요.”

“괜찮으시죠? 나중에 제가 그런 길을 함께 걸어가도.”

이 슬라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푸르손의 충실한 추종자가 되기에는 고민이 좀 많은 녀석인지도 모른다.

“괜한 오해는 곤란해. 딱히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알고 있어요. 지금은 그냥 되는 대로 사시는 거 같지만.”

“보험은 걸어 놓는 거죠. 일종의 분산투자라고나 할까. 그럼, 아이 위치를 알려 드릴게요.”

슬라임은 나를 묵묵히 안내했다.

언제 싸웠냐는 듯이 자연스럽게 유블람 쪽으로 걸어갔다.

인적이 드문 탓일까.

위쪽은 아직 인간의 모습이지만, 하반신은 슬라임의 모습을 숨기지도 않고 출렁거리며 걸었다.

작아진 몸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조금씩 불어나는 것 같았다.

‘압도적인 자기수복修復.

절반 정도의 글자만 칼날에 남은, 품속의 단검이 새삼 의식됐다.

당장 슬라임을 죽이면 저 능력을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는 아니더라도, 파편이라도.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꼭 레나가 위기에 처해서라거나, 그 동생을 구해 줄 수 없다거나, T&T의 내부 서클이 나를 추적해서 라고만은 말하기 어려웠다.

녀석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슬라임에게 잔뜩 신세를 진 뒤 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모저모로 고맙군. 내가 당신에게 해 줄 만한 건 없나?>

<글쎄요. 언젠가, 다른 슬라임을 보신다면 약간의 호의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전 그걸로 충분합니다.>

“무슨 생각에 그렇게 빠져 계시는 건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세계에 남은 슬라임은 극히 드물다.

마왕군 발호 이후에도 같다.

사실상의 멸종減種.

그때 녀석이 동족에 관해서 내게 했던 부탁은, 사실은 녀석 자신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적용될 거다.

나는 약속했다.

슬라임을 보면 호의적으로 대하겠약속은 썩은 잎보다 가볍고 물에 쓴 글씨처럼 지워지지만 전생자가 의지할 건 그것뿐이다.

아직 힘이 남아 움찔대는 단검을 무시한 채 가만히 걸었다.

다시 보육원을 지날 때였다.

“혹시 여기 있는 건가?”

탐지 스킬에는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으로 막힌, 내 능력이 차단되는 장소에 그녀가 있을지도 모른다.

슬라임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아니랍니다.”

모두 뜯겨 황량해진 밤의 밀밭을 걸어갔다.

경비병과 육중한 성문이 자세히 눈에 들어온다.

루비아가 수레에 실려 나온 도시, 유블람이 다.

몇 시간 동안 걸어오며 슬라임은 성인 남성 한 명의 모습을 갖출정도로 부피를 회복했다.

처음 레나와 함께 만났던 말끔한 모습이었다.

‘옷 모양까지 다 저렇게. 역시 대단하군.’

“오시죠.”

고민할 것도 없이 슬라임은 똑바로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패를 꺼내 보이자 경비병은 한 마디 토도 달지 않고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곧장 성문을 열었다.

밤의 성문이 놀랄 정도로 쉽게

개방됐다.

“여기도 너희 조직이 있나?”

“요즘은 더 쉬워졌습니다. 원래 다른 것들도 있었는데, 왜인지 다 죽고 도망가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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