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66화 (166/458)

167화 매듭 (7)

“음.”

“갑자기 4대 검주 중 한 명이 나타나서, 마약 밀매 패거리를 모두 몰살시켰다고 하더군요.”

‘이거, 내 얘기잖아?’

홈칫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애썼다.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4대 검주라고?”

“유명인이 강림하셨죠. 레안드로 후작이 왔다더군요.”

“후작이란 자가 한가한 모양이지?

이런 먼 곳까지 오다니.”

“저도 좀 의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검기劍氣를 자유롭게 쓰는 수준에다, 외모도 소문과 일치한다고 하더군요.”

“외모?”

“특유의 회청색 머리칼이라든가.

잘 나오지 않는 색상이죠.”

‘이런.,

녀석 앞에서 마스커레이드를 쓰면 절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구를 벗고 스킬을 사용한다면, 그 학살극이 내가 벌인 일인 걸 곧바로 알아첼 게 분명하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측하기 어렵다.

쓸데없는 모험은 하고 싶지 않다.

슬라임이 말을 이었다.

“유블람 영주에게 심판받기 전에 자살하라고 명령하고, 정작 본인은 안 오고 다른 곳에 갔다더군요.”

“혹시 사칭 같은 건 아닐까?”

슬쩍 떠보는 내 말에도, 슬라임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글쎄요.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긴걸지도 모르죠. 어쨌건 유블람은.

그 뒤로 꽤 괜찮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괜찮은 도시라고?”

“후작이 안 온 탓에, 오히려 언제올지 모른다며 행정관들이 제대로 일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죽었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자자한 지금은 그런 걱정도 없을 겁니다만.”

확실히 후작의 죽음을 왜곡해서 널리 퍼트리는 녀석들이 있었다.

뭘 감추려고 하는 줄은 몰라도.

전 국토에 퍼졌다고 해서 이상한것은 없다.

슬라임이 말을 이었다.

“어쨌건 힘의 공백이 생겼고, 제조직이 적당히 그 빈자리를 채워 놓고 있습니다.”

“마왕을 섬기는 녀석들인가?”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길드와는 관계없어요. 사적인 조직이죠.”

하긴, 녀석이 숨기고 있는 역량을 생각한다면.

굳이 푸르손 패거리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이런 성域 하나 정도는 가볍게 먹어 치울 수 있을 거다.

후작이나 기스-제-라이 정도는

아니라도, 웬만한 녀석들 기준에서도 격외格外의 마물임은 분명하니까.

이제 유블람은 슬라임의 조직이 관리한다는 이야기.

내가 벌인 일의 여파다.

생의 초반 벌였던 한 편의 자잘한 학살극.

경비대 패거리를 청소하는 일.

‘그게 이렇게 이어지다니.’

거리를 걸을수록 느낌이 달랐다.

슬라임 말대로, 행정관들이 일을하는 건지, 거리는 예전보다 훨씬깔끔해져 있었다.

결국 인간을 움직이는 건 공포인지도 모른다.

레나와 함께 왔을 때 짙게 배어있던 마약 냄새도 희미했다. 슬라임은 대로를 익숙하게 걸어갔다.

서서히 동이 렀다.

“저기입니다.”

붉은 벽돌을 쌓아 지은, 깔끔한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는 저곳에 있습니다.”

나란히 놓인 침대에서 뒤척이는 아이들이 탐지에 잡혔다.

안에 머무르는 아이는 네 명.

그 가운데 레나 동생처럼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보육원 같지는 않군.”

“예. 일반 가정집입니다. 저와. 서로 신뢰하는 ‘인간’들이죠.”

성인 남녀 한 쌍이 한창 식사를 준비하는 게 느껴졌다.

- 똑똑.

문을 두드린 슬라임은 곧 안으로 들어갔다.

“아,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식사를 준비하던 40대 후반의

여자가 서둘러 나와 슬라임의 손을 맞잡았다.

작게나마 손님을 맞는 응접실이 있었다.

“하시는 일은 잘되고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모두 선생님 덕분이지요.”

“다행입니다. 더 도와드릴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에이, 여기서 어떻게 더 해 주신다고 그러십니까? 오늘은 헤일리를 보러 오신 건가요?”

“예.”

“차는 어떤 걸로. 바로 아이를 불러오겠습니다.”

슬라임은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아이가 느긋하게 식사를 끝낸 뒤 불러주십시오.”

완고한 눈빛에 부인이 더 토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여자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군.’

바로 곁에 서 있었는데도, 전혀언급하지 않았다.

슬라임은 내가 느끼는 위화감을 읽어 낸 듯이 먼저 대답했다.

“제 쪽에서 말하지 않으면, 먼저묻지 않는다. 그게 이들이 지키는 예의니까요.”

“흐음.”

좁은 응접실에 가만히 서 있는데, 지긋이 나를 바라보는 슬라임의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할 말이라도?”

슬라임이 머리를 긁적였다.

만들어 낸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놀라운 디테일을 자랑했다.

“그게. 갖고 계신 칼 말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봐도 되겠습니까?”

“이거 말인가?”

“예. 좀 어려운 부탁입니다만.

“상관없지.”

2미터에 달하는 대검을 녀석에게 비스듬히 눕혀 건넸다.

그라스미어의 3대 영주가 만들었다는대검.

어차피 이 칼로 녀석에게 타격은 줄 수 없다.

벨 수도 짓누를 수도 없다.

“감사합니다.”

슬라임이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칼자루를 받아 챈 손이 흐물거리며 검 표면을 덮어 가기 시작했다.

‘감정 勤定.?’

손만으로는 부피가 모자란 건지, 팔 한쪽이 형체를 잃어 가며 녹아대검 전체를 덮어 가고 있었다.

“흐으응.

아예 몸 반쪽 정도로 대검을 뒤덮은 채, 입을 열어 한숨을 토하는 슬라임의 모습은 몹시 기괴했다.

하지만 녀석의 ‘표정’은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하다.

‘무척 몰입하고 있군.:

내가 이런저런 아이템을 보육원으로 가져올 때도, 저런 성실한 표정으로 하나하나 감정해 주었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감정勤定이야말로 슬라임이 진정즐기는 취미인지도 모른다.

십 분 정도가 홀렸다.

‘오래 걸리는데?’

녀석이 아이템을 감정하며 십 분이상 걸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길어야 7-8분.

하지만 이십 분이 지나고, 삼십 분이 지났을 때에야.

슬라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내뱉었다.

“이건. 프리모. 파이트.?”

처음 듣는 단어였다.

“뭐라고?”

“금속입니다.”

“생소한 이름이군.”

“이 세계에는, 엄밀히 분류해 보면 6천 종류가 넘는 금속이 있지요.

이걸로 말씀드리자면.

그 순간이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올랐다.

[스캔 완료됨]

[영웅급 대검 - A(이름 없음)]

[뛰어난 장인의 손에서 만들어진 대검입니다.]

[희귀 금속 프리모파이트가 35%함유되어 있습니다.]

[고르게 분포되지 않았습니다.]

[마력 전달 효율 5% 증가]

[검기 전달 효율 10% 증가]

[순수 프리모파이트로 재구성할 경우 부피 50% 추정 감소.]

[마력/검기 전달 효율이 커스텀에 따라 증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눈앞에 뜨는 창을 바라봤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슬라임이 하는 말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가공되지 않은 프리모파이트 원석으로 제작한 검입니다.

녹인 뒤 광석을 재구성한다면, 그가치가 폭증할지도 모르겠군요.”

“직접 다룰 수는 없는 건가? 산성으로 녹여서 다시.

은근한 기대감에 차서 그를 바라봤다.

슬라임이 간단히 내 갑옷을 수리해주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일반적인 강철 따위와는 전혀 달라서. 제 역량으로는 한참 부족합니다.”

“동부 산맥 깊숙이 숨어 산다는, 드워프들 정도면 모르겠군요. 그중에서도 ‘흑색’ 등급의 장인匠人을 찾아가셔야 할 것 같은데.

“흐음.

이 칼을 쓰면서도 뭘로 만들어져있는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잠자코 있는 내게 슬라임이 계속설명했다.

“언제고 그쪽에 가실 일 있을 때, 꼭 한번 수소문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희귀한 금속이면, 서로 다뤄 보겠다고 앞다뤄 손을 내밀가능성이 크니까요.”

“좋은 정보 고맙다.”

놀라운 역량을 가진 장인匠人인, 그라스미어 3대 영주가 만들어 낸대검.

그자 역시 희귀 금속을 제대로

추출하는 데는 실패한 듯하다.

어쨌건 무척 귀중한 정보였다.

마력과 검기의 효율을 여기서 더높일 수 있다면 전투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건 명확하다.

‘동부 산맥이라.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늘었다.

홉고블린 직스가 내게 말해 줬던 고블린 마법사.

공간 왜곡 주머니를 만들었다던, 마법사 머드캐쉬를 만나는 일도 꽤 기대되니까.

‘취이익, 휙, 취익! 이랬나.’

그라스미어를 들른 뒤 동부 산맥에 가도 좋을 것 같다.

직스가 말해 준, 고블린 마법사를 부르는 말을 천천히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 끼익.

양치까지 모두 마친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랜만이군.’

이번 생에는 처음 보는 소녀.

하지만 레나와 보육원을 근거지로 삼고 활동했을 때, 이 아이를 본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원장님?”

“헤일리, 어서 오렴.”

아이는 나를 흘끗하며 원장에게 물었다.

“이 아저씨는 누구예요?”

“네 언니의 친한 친구란다.”

“언니. 친구?”

슬라임의 설명에 아이의 얼굴이 살짝찌그러진다.

제 언니보다 조금 동그란 얼굴의, 연갈색 머리칼의 여자아이는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간단히 아이의 상태를 체크했다.

‘몸은 건강하고.’

학대나 폭력의 흔적은 전혀 없다.

낯선 나를 봐도 겁먹지 않는다.

정서도 건강하다.

‘잘 지낸 모양이군.’

“레나 언니 친구예요?”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안주머니에서 레나가 쓴 편지를 꺼냈다. 잘 봉인된 편지를 천천히 건네며 말했다.

“언니가 보낸 편지, 볼래?”

“네.”

아이는 봉인을 뜯고 편지를 바로 펴서 읽었다.

동그란 갈색 눈이 몇 번씩 빠르게 깜빡였다.

선 자리에서 한 번에 편지를 모두 읽어 내린 아이가, 편지를 접어 봉투안에 넣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 아저씨 안 따라갈래요.”

“뭐라고.?”

아이는 귀를 종긋 세우고 화난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언니는 계속 없었어요. 나한테 연락도 안 했어요. 갑자기 이렇게 편지만 써서 오라고 해?”

아이의 갈색 눈동자에 그렁그렁눈물이 맺혀 가기 시작했다.

“안 가! 헤일리는 다른 데 절대 안갈 거야. 여기서 친구도 생겼단말이야.”

“음.

‘이런 반응이라니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혹시 편지를 못 믿는 거니?”

아이가 훌쩍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레나에게 화난 게 확실한 것 같았다.

나와 그녀의 입장에서야 정신없이 돌아다니느라 바빴지만.

아이가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쩌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스킬 중에 화난아이를 달래는 건 없다.

그저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아이작이 우리에게 준 정보를 검증해야 했을 때, 나는 레나가 슬라임과 접촉하는 걸 막아섰다.

묘하게 아쉬워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동생을 보고 싶어 했던 건지도 모른다.

‘역시 내 탓이다.’

“헤일리, 그게 아니라.

슬라임이 앞에 나서 달래 보려고 했지만 슬쩍 막아섰다.

“내가 얘기하지.”

열 살이 채 안 된 아이.

하지만 충분히 말은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다.

아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키를 맞췄다.

투구는 벗지 않았다.

“레나는 나 때문에 연락을 못 한거다.”

“.아저씨 때문에?”

“그래.”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내가 레나를 빼앗아서, 그동안 마음대로 독점해 버렸어.”

“그럼, 언니 남자 친구?”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글세.

“언니가 편지 쓴 거 보면, 엄청좋아하는 거 같던데. 아저씨한테도 보여 줄까요?”

뭐라고 썼는지 크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보면 화끈거릴지도 모른다.

“괜찮아. 그건 널 위한 편지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레나 곁에 있지 않을 거야.”

“왜요?”

“나 혼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거든.”

T&T에 자리를 잡은 그녀를, 더는 내 삶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아이가 빨개진 눈으로 나를 보고 물었다.

“언제까지요?”

“앞으로 계속.”

“계속이요? 죽을 때까지?”

그렇다.

내 죽음은 단독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네가 레나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씩 울음이 멈추고 있었다.

“아저씨가 나를 다른 도시에 데려다줄 거라고 써 있는데요?”

“여기보다 더 안전한 곳이란다. 잘지내고 있으면, 언니가 연락도 많이 하고, 널 찾으러 올 거야.”

지금보다 더 제대로 자리를 잡고, 언젠가 그녀가 말한 것처럼 ‘삶’을 살게 된다면.

“친구인 내가 없어도, 네가 대신레나를 지켜 줬으면 좋겠어.”

“내가. 언니를.?”

“물론이지. 네가 꼭 필요할 거야.”

아이는 예쁜 얼굴로 가만히 고민에 잠겼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이미 레나의 마음을 수없이 지켜 줬을 귀여운표정이었다.

어느새 눈물이 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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