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매듭 (8)
어설픈 구변이나마 진심이 전해진 탓일까.
호감도가 7 올랐다는 상태창이 소녀의 머리 위로 작게 떠올랐다.
잘 달랠 수 있을지 불안했었는데, 무척 다행이었다.
어차피 내가 그라스미어에 직접데려가야 할 아이.
신뢰 관계를 쌓을 필요가 있다.
생각보다 내 말들이 소녀의 마음을 움직인 둣, 꽤 높은 수치의 호감도가 올랐다.
‘초반일수록 호감도가 잘 오르나?’
아니면 나 혼자만 기억하고 있는, 함께 보낸 시간들이 소녀와 이야기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으음.’
호감도가 올라간 건 소녀뿐만이 아니다. 슬라임의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메시지가 녀석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의외인데.’
녀석은 결국 인간을<줄이는>편에 가담했다.
그가 푸르손의 신도라는 사실.
마왕 강림을 고대하는 추종자 중하나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돌본 아이에 대해 약간의 정은 가진 모양.
슬라임은 아이를 더 안심시키기 위해자잘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럼, 아저씨 따라가면 되죠?”
헤일리가 나를 보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 승낙을 얻자 그제야 완전히 긴장이 풀린 기분이었다.
어린 여자아이 하나 달래는 일이, 사형수의 원념이 뭉쳐 만들어진 늪의 악령을 처리하는 일보다 훨씬 더어려웠다.
“바로 준비할께요.”
“하루 정도는 더 여기 머물러도 괜찮은데.
“아까 다 울어서 괜찮아요.”
그라스미어.
먼 도시는 아니다.
너무 스트레스를 주는 건 아닌지 걱정됐지만, 소녀는 어느새 밖으로 나가 있었다.
잠시 침묵에 빠져 있던 나는 슬라임을 돌아봤다. 그와 헤어지기 전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예. 말씀하십시오.”
굳이 돌리지 않고 바로 물었다. 그럴재간도 시간도 없었다.
“혹시. 핏빛 사슴 고블린 부락에 대해서 알고 있나? 이곳에서 그리멀지 않은 위치라던데.”
고블린 부락.
그들의 존재가, 동부 산맥 드워프의 이야기를 듣고 연달아 떠올랐다.
공간의 마법사 머드캐쉬.
그 존재를 내게 알려 준, 고블린 직스키세스 붐텅.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번 생에서는 슬라임과 함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연히 핏빛 사슴 고블린 부락을 도와달라는 의뢰도 받지 않았다.
아직도 잔학하게 감금된 채 양식養殖당하고 있을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머드캐시에 대한 정보는 뻔히 내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정보를 준 고블린들이 아직 고통속에 허우적대고 있다면 무언가가, 공평하지 않은 느낌이다.
“호오.
슬라임의 입에서 낮은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그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런저런 정보를 찾다, <등불>
달리아크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등불이군요.
적당히 핑계를 둘러댔다.
“맞아. 등불에서 얻었어.”
그러자 슬라임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등불>의 정보라고 보기에는 꽤 적시성이 떨어지는군요. 이제 그곳에 고블린 부락은 없습니다.”
- 달그락.
깜짝 놀란 나머지 갑옷 안의 뼈가 크게 움직였다.
“뭐, 없다고?”
“예. 얼마 전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니.
내가 아니라 다른 녀석에게 처리를 위임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직접 처리했거나.
“고블린들은 어떻게 됐지?”
“그들을. 걱정하시는군요.”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슬라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지며, 머리 위에 호감도가 3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난 그냥.
“모두 해방되어 안전한 곳으로 갔지요. 마음 놓으셔도 좋습니다.”
“내가 언제 걱정했다고.”
슬라임은 그저 씩 웃기만 했다.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묘한 기대감이 느껴졌다.
‘좀. 부담스러운데
슬라임과 헤어진 뒤.
헤일리와 밖으로 나와 걸었다.
말을 한 필 빌릴까 했지만 어차피가까운 거리인 데다, 헤일리를 안고 질주를 쓰는 게 더 빠르겠다 싶었다.
‘그래도 못 안겠군.’
어색했다.
결국 나는 헤일리의 걸음에 맞춰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저씨.”
“말해.”
“나, 본 적 있어요?”
“글쎄.”
“왜 그렇게 수상하게 말해요?”
“계속 투구 쓰고 있던데. 얼굴에 화상이라도 있어요? 나도 어릴 때 뜨거운 물 쏟아서 다리에 흉터 있어요.
보여 줄까요?”
“아니.”
걸으면 걸을수록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어색해야 할 쪽은 일면식도 없는 아이 쪽일 텐데, 오히려 내 쪽이 같이 있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하지.
한참을 걷던 중.
헤일리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저씨, 다리 아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
“그럼. 들어 줄까?”
아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아 들고 앞으로 발을 박찼다.
시린 바람이 팔 사이로 들어온다.
낮이지만 바람이 차다. 마법으로 헤일리의 몸을 따듯하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정도로 정밀한 온도 조절은 무리.
나야 상관없지만 이렇게 연약한 몸이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기침은 하지 않으려나?’
달리면서도 걱정하고 있었는데, 아이의 흥분된 목소리가 그 고민을 깨트렸다.
“아저씨, 너무 재밌어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아이는 놀이 기구라도 탄 것처럼 무척 즐거워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대로도 만족하는 모양새다.
‘질주.’
속도를 높이자 아이가 비명을 질러댔다. 연갈색 눈동자가 반짝반짝빛났다.
유블람에서 그라스미어로 넘어가는 길은 무척 잘 닦여 있었다.
널따란 대로를, 아이를 안은 채 달리기를 한참.
저 멀리 높은 성벽이 보였다.
이중 구조로 된 거대한 성.
그라스미어의 귀빈증이 있으니 통과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성벽의 분위기가 꽤나살벌했다.
‘하나, 둘, 셋, 넷.?’
멀리서도 보이는 거대한 병기 네 기가 바깥을 겨누고 있었다.
성문 앞에는 경비병도 없었다.
아예 출입자를 받지 않을 기세로 꽉 닫혀 있었다.
높다란 성벽에는 장궁을 멘 병사들이 빼곡했다.
‘뭐. 무턱대고 쏘진 않겠지:
어느새 품에 잠들어 있는 아이를 안은 채 천천히 걸어갔다.
화살이나 병기 같은 게 날아와도 가뿐히 피할 자신도 있었다.
성벽 양쪽을 휘휘 둘러봤다.
빼꼼히 머리를 내민 경비병들은 별다른 말도 없이 위에서 이쪽으로 장궁을 겨누고 있었다.
경고 같은 것도 없나 싶어 주위를 슬쩍 바라봤다.
이제 보니 성문 오십 미터 정도 앞쪽에 흰색 금이 그어졌고, 안에 커다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접근 금지>
‘뭐야? 여기 왜 이래?’
전에 그라스미어에 왔을 때와도 다르다.
‘전쟁이 가까워져서? 아니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품 안에 잠들었던 아이가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으으. 우리 안 들여보내 주는 거예요?”
경비들을 좀 더 눈여겨 바라봤다.
‘수상하군.’
주로 내성에만 있었다고 해도, 꽤 오래 그라스미어에 머물렀다.
경비들의 옷차림 정도는 간단히 알아볼 수 있다.
절반 이상의 경비병이, 전혀 낯선디자인의 갑옷을 입고 있다.
게다가 훈련된 상태가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날렵하고 다부진 체격.
그 매서운 눈빛부터가, 수도 없이 전장에서 마주했던 일반병들과는 전혀 다르다.
‘다른 세력에게 점령당했나?’
고개를 갸웃했지만 일단 성문으로 다가갔다.
성벽 위의 병사들도 평범한 인간수준에서 제법이라는 것.
회귀를 이미 수차례 거듭한 내 상대가 될 정도는 전혀 아니다.
아이를 보호하면서도 도망 정도는 충분히 갈 수 있다.
나는 하얀 선 위에 서서 외쳤다.
“특사증을 보이겠소! 문을 열어주시오!”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잠시 기다리자,
- 끼이이익.
닫혀 있던 성문이 작게 열렸다.
- 다그닥! 다그닥!
세 기의 기병과, 열 명의 보병이 우리를 둘러쌌다.
기병은 모두 낯선 복장이었다.
보병 가운데도 익숙한 디자인의 갑옷을 입은 녀석은 다섯뿐.
‘저들만 그라스미어 소속인가.’
기병 가운데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나에게 정중히 예를 취하며 말했다.
“제국군 남부 제3 특작연대 소속라인버그 남작입니다. 귀공께서는 특사라고 하셨습니까?”
흡수한 제국법을 떠올렸다.
그라스미어 정도 되는 대도시의 특사特使는 최소 자작 이상.
게다가 파견한 그 도시 자체에서 유력한 자인 것은 당연할 터.
녀석이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궁금한 건 내 쪽이다.
‘제국군. 특작연대? 그런 자들이 대체 왜 여기에. 어떻게 된 거야?’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말투는 정중했지만, 낯선 복장의 녀석들은 모두 손을 칼자루에 얹어 놓았다.
한눈에 봐도 경계하면서, 의심을 숨기지 못하는 모양새.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야기한 대로다. 여기. 신분증을 확인해도 좋다.”
나는 허버트 영주가 만들어 줬던 가짜 신분증을 내밀었다.
효력은 당연히 있다.
“틀림없습니다!”
그라스미어 경비 복장의 보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검은 콧수염의 라인버그남작은 왼쪽 눈썹만 찡긋 위로 올리면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특사님, 송구합니다만 투구를 좀벗어 주시겠습니까?”
“투구를.?”
“예. 현재 그라스미어는 제3 특작연대에서 경비를 맡고 있습니다.
귀빈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용모는 꼭 제가 확인하고 싶습니다.”
“안전?”
“예. 영주님과 남부 제국군 사령관의 위임을 받았습니다. 원활한 치안 관리를 위해 부디 협조해 주시지요.”
놈은 말투만 부드러운 척을 하며 은근히 단호하다.
수틀리면 꼬나든 기병용 장창이라도 날아올 것 같은 느낌.
하지만.
투구를 벗자 깜짝 놀라며, 절벽 아래로 떨어진 소년이 생각났다.
녀석을 생각하며 깨달았다.
분명<가면>에 뭔가 문제가 있는상황. 후작이 살해당한 것과 관련있을지도 모른다.
투구를 벗는 건 역시 껄끄럽다.
나는 녀석을 바라보고 말했다.
“싫은데?”
“예.?”
분위기가 단번에 험악해졌다.
그라스미어의 경비병들은 중간에 끼어서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조용히 해결하고 싶은데.’
힘을 쓰면 여기서 다 죽여 버리는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헤일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 역시 마음에 걸린다.
보호한 상태에서 제국군을 모두 죽이는 건 간단하지만.
내장과 뇌수가 철퍽철퍽 사방에 튀기는 모습을 동생이 본다면 레나가 슬퍼할 게 분명하다.
부드러운 방법을 쓰기로 했다.
“못 들었나? 싫다고 했는데.”
‘공포.’
[공포 Lv.l 스킬을 사용합니다!]
[대상: 단일]
[체력이 0.22% 소모됩니다.]
[당신과 먹이 사이의 스랫 차이:
어마어마함.]
- 딱딱딱딱딱.
말 위의 남자는 공포로 이를 따닥따닥 부딪쳤다.
그 눈빛이 죽음보다 더한 망각의 공포로 파르르 떨렸다.
“아. 아으으.
제대로 균형을 잡고 있던 탓일까.
팔다리가 풀린 채로도 낙마하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툭 치면 그대로 떨어져 목이 부러질 모양새였다.
‘얘는 계속해도 심장마비는 안 걸 리겠군.’
전신에서 식은땀이 솟아났지만, 근육 경련까지는 없다.
예전에 레나의 편지를 전했던 소녀와는 다르다.
말 위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앉아 있는 녀석에게 물었다.
“꼭 벗어야 돼?”
“으. 아으. 아, 아닙니다.!
시, 시, 싫으시면.
녀석이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불만족스러웠다.
공포 스킬의 한계를 직면한 기분이었다.
‘스킬 시전 상태에서도 멀쩡하게 입을 놀리다니. 어느 정도 강한 놈에게는 벽이 있군.’
게다가 스킬이 적용되지 않는 다른 놈들은, 나를 몹시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기병 두 명이 서로 눈길을 교환하며, 창을 쥔 손에 슬쩍 힘을 더해 가는 찰나.
- 다그닥! 다그닥!
성문이 활짝 열리며, 맞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왔다.
- 히히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