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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68화 (168/458)

169화 매듭 (9)

- 다그닥! 다그닥!

성문이 활짝 열리며, 맞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왔다. 그 뒤를 다섯 기의 말이 따라왔다.

- 히히힝!

선두의 남자가 말을 세우며, 훌쩍말 아래로 뛰어내렸다.

“은공! 오랜만에 뵙습니다!”

뛰어내린 남자는 예전과 옷차림이 꽤 달라져 있었다.

이제 가벼운 도복이 아니라, 군대지휘관 같은 정복 차림새.

그가 나를 둘러싼 병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들은 이만 물러나게! 여기부터는 내가 모실 테니까.”

그라스미어 자작.

챈들러 였다.

옆구리에 낀 창을 꽉 쥐고 있던 두 명의 기병도 고개를 숙이며 손에서 힘을 풀었다.

라인버그 옆에 있던, 쥐를 닮은 칙칙한 인상의 남자가 무언가 입을 움직이려다 곧 고개를 숙였다.

‘슬슬 풀어 줄까.’

공포 스킬을 해제하자, 멋진 콧수염의 라인버그 남작은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으으.”

그는 내 쪽은 바라보지도 못하고 식은땀을 홀렸다. 괜히 챈들러를 바라보며 무언가 항의하려 했다.

“저, 그게.

‘공포.’

“그, 히꾹!”

챈들러가 고개를 갸웃하며 녀석을 바라봤다.

“자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라인버그 남작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만 가라고 했을 텐데. 여기는 분명히 내 영지야.”

“.아, 알겠습니다.”

남자는 아직도 흔들리는 눈빛으로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그라스미어 소속은 남아라.”

챈들러가 짧게 끊어 말했다.

익숙한 갑옷을 입은 보병 다섯이 남아 자리를 지켰다.

“매튜. 다리오. 슬라딕. 베르단. 페나르.”

“예! 영주님!”

‘.영주라고?’

챈들러는 경비들의 이름을 하나씩 또박또박 호명한 뒤 말을 이었다.

“이 도시의 주인은 너희들이다.

저들은 손님일 뿐이야. 판단에 더자신감을 가져라.”

“예!”

“앞으로도 계급 세 단계 정도는 그냥무시하고 일해. 기죽지 말고. 뒷일은 내가 책임진다.”

“알겠습니다!”

‘재밌는 짓을 하는군. 그냥 걸친옷만 달라진 건 아닌 것 같은데.’

풍기는 분위기와, 입은 정복이 꽤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인간들 나름의 의식인 것 같았다.

끼어들지 않고 옆에서 방관했다.

챈들러는 병사들의 어깨를 툭툭두드려 준 뒤 복귀시켰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며 챈들러에게 물었다.

“오랜만이야. 도시로 들어오는 게 꽤 힘들어졌는데?”

그러자 챈들러가 다른 녀석들에게 짓던 근엄한 표정을 싹 지우고는, 빈틈 많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강제하던 긴장감을, 내 앞에서는 살짝 내려놓는 모습이었다.

‘하긴.:

예전에 별꼴을 다 보였으니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그게. 전쟁이 곧 시작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남부의 무기창武器舍에 해당하는 저희 도시를 지키기 위해 황실이 군대를 파견한 거죠.”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라스미어의 무기 제작은 대부분직속 제국군을 위한 것.

전쟁이 가까워져 오는데 무기 창고를 지키는 일은 당연하다.

“아까 들었다. 남부 제국군 특작연대라던데.”

“뭐, 잘만 지켜 주면 저희는 좋죠.

시기가 뒤숭숭하니까요.”

“그런데. 언제 또 그라스미어의 영주가 된 거지?”

“후우.

내 질문에 챈들러가 땅이 꺼지듯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평생 놀았으니 이제 일하라고 하시는 바람에. 억지로 작위를 물려받았죠.”

“전 영주는?”

“온천 여행 가셨습니다.”

“.전쟁 전이라면서.”

“전부 내려놓으시고, 전부 저한테 다 던지고 가신 거죠.”

챈들러의 한탄이 이어졌다.

“평생 굴레에 매여서 살았으니, 자기 시간을 갖고 싶다고 하시는데 뭐라하겠습니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몸에 벌레가 심어진 채 한평생을 아이작의 노예로 살아왔다.

남은 인생이나마 평온하게 자신을 위해 쓰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런데 이 귀여운 꼬마 아가씨는 누구시죠? 레나가 생각나는군요.”

“안녕하세요, 영주님. 레나 언니를 아세요? 전 동생인데요.”

아이가 의외로 의젓하게 인사를 건넸다.

챈들러가 살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정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챈들러가 아이와 레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 맹한 것 같은 느낌의 녀석인데, 의외로 잘 보살피는것 같았다.

보살핀다기보다는, 판을 제대로 깔아준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는 아이의 말에 맞춰 질문을

던지고, 추임새를 넣으며 적당한 반응을 했다. 헤일리는 신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완전히 맡겨도 되겠군.’

곁에서 걸으며 천천히 도시 안을 둘러봤다.

안의 분위기는 전에 왔을 때와도 확실히 달랐다.

전쟁이 임박한 느낌이었다.

한쪽에는 제국군 복장도, 그라스미어경비대 복장도 아닌 자들이 천막을 치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좋은 무장을 하고, 하나같이 긴 창을 가지고 있는 게 눈에 뜨였다.

챈들러에게 슬쩍 물었다.

“저들은 누구지?”

“독립 용병대,<별의 창병>입니다.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몰라 일단계약한 녀석들이에요.”

“엄격한 규율, 충실한 계약 이행으로 유명해요. 특별히 골라 들인 자들입니다.”

“가격은?”

“말도 안 되게 비싸죠. 하하.

챈들러의 얼굴에서 깊은 피곤함이 느껴졌다.

‘걱정할 게 많겠군.’

우리는 어느새 계단을 올라 내성안으로 들어갔다.

내성은 여전히 검소함 일색이었지만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리가 전쟁 분위기로 긴장감이 돌고 있다면, 영주의 성은 오히려 예전보다조금 더 밝아져 있었다.

분위기가 바뀐 이유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아이작의 지배에서 벗어난 데다, 영주가 젊은 챈들러로 바뀐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엇, 아, 안녕하세요!”

내성에 들어가자, 곧바로 날 알아보는 인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저 여자는.

성에서 가장 어린 시녀.

나와 레나의 시중을 들던 단발머리의 메이 드였다.

음식도 술도 먹지 않는 나를 상대하며 꽤 곤란해하던 기억이 난다.

다른 거라도 신경 쓴다며, 침구와 목욕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었지.

“이 아가씨만 먼저, 식사 준비 좀부탁해도 될까?”

작은 인간이 긴 거리를 걸었다.

배고픔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안심이야.’

챈들러가 나보다 훨씬 아이를 잘대할 것 같았다.

아이가 시녀를 따라 사라졌을 때, 나는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뭐든 말씀하시죠. 최선을 다해 수행하겠습니다.”

≪ 으 W

"a".

챈들러는 분위기를 살피며 옆에서 별말 없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어느새, 그는 예전에 썼던 커다란응접실로 나를 안내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응접실에 들어왔을 때에야 나는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아이, 혹시 여기서 맡아줄 수 있을까?”

“하하핫.

말없이 걸어오던 챈들러가 크게 웃었다.

“곤란한가?”

“아닙니다. 걸어오면서 상상했던 것들이 우스울 만큼 간단하고 좋은 일이라서요.”

“크흠.

“레나 동생이라니, 제가 특별히 더신경 써서 돌보겠습니다. 다른 요청사항은 없으십니까?”

“일단은. 근데 뭐 나한테 말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

줄곧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챈들러는 나를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전쟁 걱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다른 용건이 있는 듯했다.

“그게.

뭔가 있다.

“뭐지?”

내 추궁에, 신임 영주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혹시. 레안드로 후작과 어떤 관계이십니까?”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질문에 조금당황해 되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지? 별 관계는 아닌데.”

이건 어차피 사실대로 말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다.

부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챈들러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분위기로 말을 이어 갔다.

“그때 저에게 보여 주셨던 얼굴, 한창 시끄러운 후작을 닮은 것 같아서 말이지요.”

“그때는 그냥 넘겼잖나?”

“저도 얼굴까지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죽은 뒤에, 묘하게 선전되는 탓에 외모도 알게 된 거죠.

“으음.”

“어쨌건 성문 앞에서 투구를 벗지 않은 건 잘하셨습니다. 시끄러우면 시끄러워졌지, 도움이 안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민이 깊어졌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소년이 갑자기 떠올랐다.

‘확실히 죽였어야 했나?’

달리아크의 정보를 신뢰한다면, 후작은 반역죄로 살해당했다.

닮은 외모에 대한 증언이 나오면, 확인 차원에서라도 추적이 붙을 게 분명하다.

미처 관리하지 못한 친척이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마스커레이드. 스킬 레벨을 좀더 올려야 되겠군.’

가장假裝이라면.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평범한 얼굴로 변하는 게 이상적이다.

짧은 변장 시간.

제한적인 변장 부위.

무엇보다, ‘인상적인’ 모습으로 변장하는 건 역시 스킬 레벨이 낮기 때문일 거다.

마스커레이드 스킬을 띄워 쌓인숙련도를 확인했다.

거짓을 거짓으로 덮는다.

공식적인 입장에 더해, 생길 수밖에 없는 음모론까지 따로 맛있게 제공한다.

정교하게 투척되는 쓰레기들.

레안드로 후작이 반역죄로 황실에 살해당했다는 진실은, 저 아래에 깔려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제국 4대 검주가, 어째서 황실에 반역했는가 하는 질문은 어둠 속에 묻혀 아무도 던지지 못한다.

온통 깜깜하다.

머리를 천천히 저으며 챈들러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떻지?“

“현 황제는 이것저것 다 끌어다가 전쟁 재료로 쓸 모양입니다. 시비야 쌓이면 쌓일수록 좋으니까요.”

인간들이야 뭘 어쩌든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려 하지만, 의문이 꼬리를 문다.

‘왜 황제의 죽음은 써먹지 않지?

계획이 변경되기라도 한 건가?’

기스-제-라이는 이번에도 은발의 제국 황제를 암살했다.

용모와<검식>까지도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황제 암살만큼 적절한 전쟁의 명분은 없는데, 황제가 죽은 건 아무도 모른다.

‘이게 무슨.

안개가 너무 짙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고민에 빠진 사이, 챈들러가 문득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라스미어 곳곳에도 제국군이 잔뜩깔려 있습니다. 되도록 저와 함께 움직여 주십시오. 계속 투구를 쓰고 지내시면 약간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걱정하지 마라. 사고 안 칠 테니.”

제법 독립적인 성격의 영지라고 해도 결국은 제국의 휘하.

영지민들을 지키기 위해, 황실 직속군대에 협조하는 챈들러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뭐, 어차피 숨어 다니면 되니까.’

레일리의 정수를 흡수한 덕분에, 챈들러와 만났을 때보다 은신 능력이 한 단계 올라갔다.

“그런데 저번에 볼 때랑 분위기가 좀 달라지신 것 같은데.

‘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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