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매듭 (12)
그때 였다.
“영주님.?”
뒤쪽에서 풀 죽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오시죠.”
복도 쪽에서 팔 굵은 노인이 나타났다. 챈들러가 칼을 맡겼던 수석대장장이 였다.
노인은 한 명의 조수와 함께 내가 맡긴 칼을 들고 있었다. 그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딱 맞춰 오셨네요.”
챈들러가 대장장이를 반갑게 맞았다.
노인이 침울한 낯빛으로 나와 챈들러를 번갈아 바라봤다.
“칼은 어떻게 됐나요?”
“.면목 없습니다.”
챈들러의 질문에 노인이 고개를 푹수그렸다.
‘실패로군.’
처음부터 기대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면서 가져갔지만, 만지다 보니 성공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었을까.
노인은 꽤 심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영주 전용 화로를 쓰면 녹이는 온도 자체는 얻을 수 있겠지만. 제가 제대로 다시 빚어낼 역량이 없을 것 같습니다. 포기했습니다.”
챈들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무리한 요구를 드린 제잘못이죠.”
“부끄러워서. 후우. 그게.
노인이 주섬주섬 품을 뒤졌다. 그리고 커다란 종이 한 장을 꺼내 챔들러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지도입니다.”
“지도.?”
내 물음에 대장장이가 목소리를 낮춰말했다.
“흠. 검사 양반,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모르겠구려. 아무튼, 산맥에서 드워프 장인들이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략의 위치라오.”
“드워프들의 위치라니.!”
깜짝 놀라 지도를 바라봤다.
그들이 동부 산맥에 숨어 산다는 이야기는 슬라임으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동부 산맥’이라고 간단히 칭하고 있으나 그 면적은 실로 어마어마하게 넓다.
제국 면적의 1/3을 차지한다.
그라스미어 같은 도시는 백 개도 가뿐히 들어갈 수 있을 넓이.
게다가 층층이 겹친 지하 계곡과 동굴 미로들까지 생각해 보면 수색이란 건 사실 요원한 일.
이런 길잡이가 있고 없고는 그야말로 천지 차이다.
놀란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들떠서 지도를 바라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는지 그다지 정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산맥의 깊이와 높이까지, 나름대로 애써묘사하려 한 티가 났다.
“.정말 대단하군.”
대장장이 노인이 흠, 하고 콧김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죽은 툴즈 형님에게 들은 기억을 바탕으로 그렸소. 웬만하면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뭐. 다 쓰고 꼭 찢어주시면 좋겠소만.
“어떻습니까, 은공.?”
챈들러가 나를 바라봤다.
“그러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요구.
영주의 요구가 아니라면 눈앞의 대장장이는 애초에 드워프 장인들에 대해 완전히 함구했을 것이다. 그들의 존재를 안다면, 사슬을 채우고 노예로 사용하려는 인간들이 셀 수도 없을 터.
물론, 드워프들은 노예가 되느니땅에 머리를 찧어 자살을 택할 종족이긴 하지만 말이다.
“뭐, 아예 여기서 파기하자고.”
- 화르르!
꼼꼼히 지도를 외운 뒤, 곧바로 난로에 태워 버렸다.
외우며 궁금했던 점 몇 가지에
대해서도 착실히 답변을 받은 터.
불타는 지도를 확인하고 백발의 대장장이는 꾸벅 인사한 뒤 바깥으로 사라져 갔다. 조금 미안한 듯한 어조로 첸들러가 말했다.
“툴즈라는 분이 살아 계셨다면 도와 드렸을 텐데. 죄송합니다.”
“언제 죽은 인물이지?”
“일 년 정도 됐습니다.”
‘그 정도면.
내가 일어날 즈음 죽었거나, 이미죽어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로 돌아가도 만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는 인물.
“상관없다. 어차피 동부 산맥으로 갈 생각이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봤던 거다.”
비단 검 문제뿐만은 아니다.
황실의 추적으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직스키세스 붐텅이 말한 마법사머드캐쉬를 만나 보기 위해서라도, 동부 산맥 곳곳을 깊숙이 뒤지고 다닐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뭔가 못 해 줘서 미안하다는 듯한 기색인 녀석을 보고 말했다.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는군. 이만 슬슬 잠들지 그러나?”
“그렇습니까? 사실 아직 할 일이 좀 남았습니다.”
챈들러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늦은 밤이었다.
영주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쟁 준비까지 하느라 상당한 격무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내가 한층 더 녀석을 피곤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난 이만 떠나지.”
“벌써 말씀이십니까.?”
“이미 이틀을 머물렀어.”
내가 여기 더 남아 봐야 의심만 계속 살 게 분명하다.
내 안전뿐만 아니라.
이 도시를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빠져 주는 게 낫다. 챈들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꼭 그러시다면. 다른 사람들과 작별 인사라도 하시지요.”
“작별 인사?”
“헤일리가 무척 기다리던데요.”
“.나를?”
“예. 자넷과 함께 놀면서도 종종언제 오냐고 물어보더군요.”
갸웃한 표정을 짓는 나를 향해
챈들러가 설명했다.
“들어오면서 보셨던 단발머리 메이드이름입니다.”
날 어떻게든 대접하려 했던 어린 시녀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조금 심한 일인지도 모른다.
“꼭 봐야 할까?”
“이대로 떠나시면 다들 무척 아쉬워할 겁니다. 헤일리는. 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깨울까요?”
“아니. 지금은 자고 있을 텐데.”
“그럼 내일 아침 보시는 겁니다!”
챈들러의 간곡한 요구에 결국 백기를 들고 승낙했다.
하지만.
얌전히 내 방으로 되돌아갈 생각따위는 전혀 없다.
‘하루를 더 머무른다면.
망설일 것 없다.
조금 전 밖으로 나간 라인버그의 뒤를 쫓는 게 당연.
마찰을 빚을 생각은 없다.
일단 어디로 가는지 정도만 해도 도움이 될 거다.
- 팟!
다행히 녀석은 크게 멀어지지 않았다.
금세 기척을 잡고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집중해서 따라가서일까.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따라가며 보는 라인버그 남작의 뒷모습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어딘가-
흐물흐물하다.
묘하게도 그런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밤거리를 걷는 주제에 우습게도 여러군데를 돌아다녔다. 골목길을 굽이 굽이 돌고, 이 담 저 담을 훌쩍넘으며 엉뚱한 방향을 빙빙 돌기만했다.
‘미행을 눈치챘나?’
성문 앞에서 나에게 한 번에 제압당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 이제 안심이라고 여겼는지 똑바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 걸어가던 녀석이 멈췄다.
묘한 일이었다.
놈의 걸음이 멈춘 곳은 숙소도, 술집이나 사창가도 아니었다.
생각하지 못한 전혀 엉뚱한 곳.
그리고 멈춰서는 안 될 장소.
‘여기는.
흰 천막.
용병대, 별의 창병들이 주둔하는 곳에 라인버그는 걸음을 멈췄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이나 제국군은 한 명도 없었다.
눈길을 피하기 위해 이런 시간에 온 건지도 모른다.
주위에는 횃불을 들고 서 있는
용병들뿐이었고, 그는 제지받지 않고 곧바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저 용병들은. 분명히 챈들러가 고용했다고 했는데?’
평판을 듣고 개인적으로 고용한 용병대라고 했다.
하지만 라인버그는 황실 직속.
제국군 지휘관이 천막 안에 바로 들어가는 상황은 몹시 이상하다.
명백한 내통. 아예 처음부터 같은 패거리였을지도 모른다.
‘배신당했군.’
무슨 대화를 하나 듣고 싶었지만, 천막에는 차단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내부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이미 경험했던 것처럼.
탐지 스킬도 먹히지 않는다.
한 시간 정도 가만히 기다렸지만, 라인버그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쳐들어갈까?’
곤란하다.
명분도 없이 이 자리에서 확 엎어버릴 수는 없다.
탐지를 차단하는 천막에 머무르는 상대다. 전력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챈들러에게 일단 경고를 주는 게 답이다.
‘아침까지 기다릴 것도 없어. 곧장 가서 말해 줘야겠군.’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하루라도 더 머물러, 이런사실을 확인한 게 다행이었다.
나는 어둠에 몸을 숨긴 채 곧바로 내성을 향했다.
- 덜컥.
하지만 내성 문이 잠긴 채 열리지 않았다.
챈들러에게 받은 열쇠가 철컥철컥소리를 내며 자물쇠를 풀었지만, 안쪽에 무언가가 굳게 걸려 있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 콰앙!
그대로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안쪽에 덧댄 두꺼운 나무가 깨진 모습을 흘끗 바라보고 복도를 달려들어갔다.
곧 바닥에 쓰러져 식어 가는 시체한 구가 보였다. 종종 보곤 했던 익숙한 얼굴의 내성 경비다.
깔끔하게 끊긴 경동맥 주위에서 아직따듯한 김이 새어 나왔다.
‘습격.!’
천천히 사방을 살피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내성에 암살자가 진입했다면 목표는 하나다.
‘질주.’
- 팟!
최대한 빠른 속도로 영주가 있는 집무실을 향해 몸을 튕겼다.
- 서걱!
하지만 2층으로 올라가기도 전, 허공에 떠서 흔들리는 두 다리가 나를 가로막았다.
바닥에서 1미터 정도 붕 뜬 채로, 대들보에 시체가 매달려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두 손이 묶인 채, 밧줄에 목 졸려죽은 시체의 얼굴이 익숙하다.
나를 어떻게든 챙겨 주려던 시녀.
식사를 하지 않자, 침구와 목욕이라도 애써 준비하던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이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않은 그녀의 몸이 축 늘어져 허공에서 흔들린다.
‘자넷이라고 했던가.
당연히 자살일 리는 없다.
딛고 올라갈 만한 것도 없으며, 시녀의 작은 손으로 밧줄을 매기에 대들보는 지나치게 굵고 커다랗다.
전시展示와 같은 살해.
혀는 입술을 비집고 밖으로 살짝나와 있고, 입술 근처는 작게 하얀거품이 맺혀 있었다.
아주 잠깐-
그 앞에 굳어져 있을 때였다.
- 피릭!
시체가 매달린 대들보 위.
단검이 날아왔다.
마치 투창기에서 발사된 것 같은 빠른 속도였다.
‘기척도 못 느꼈는데.!’
피할 새도 없었다. 그대로 칼을 들어검면으로 막았다. 힘을 줘서 강하게 떨쳐 내려 후려칠 때였다.
- 까앙!
하지만 칼에 닿는 순간 단검이 수 조각이 나며 깨졌다.
‘뭐지?’
냉기가 폭주하듯 대검과 온몸, 바닥으로 퍼져 갔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터무니없이 강렬한 냉기가 칼과 갑옷 전체를, 서 있는 주위공간을 딱딱하게 얼려 가며 바닥에 몸을 붙게 만들었다.
‘인첸트.?’
소모성 인첸트.
영구 인첸트와 달리 무기가 부서지며 내장 마법이 발동한다.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만큼 위력만큼은 발군.
- 사가각!
단 한 명의 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대로라면 완전히 얼어붙어 움직일 수조차 없다.
‘이럴 때는.
갑옷의 관절 부위들이 모두 광꽝얼어붙어 있다. 슬라임과 싸울 때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두 번째 겪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 화르르르!
[마력 소모량 300% 상승.]
온몸을 불꽃으로 달궜다.
혼합 마법의 이중 중첩.
‘몸을 매개로.
거기에 한 번 더.
격발.
- 퍼버벙!
발아래에서부터 양손, 발끝 칼끝까지 강렬한 화염이 터져 나갔다.
그라스미어에 도착하기 전 겪은 대對슬라임 전.
귀중한 경험이었다.
몸을 매개로 한 마법 발동에 이미익숙해진 것이다.
- 파사사사삿!
강렬한 냉기에 얼어붙었던 사방이 부서져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제법인데?”
단검이 날아온 대들보 위쪽에서 살짝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허공이 일렁거렸다.
반쪽짜리 은색 가면을 쓴 여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왼손에는, 그 칼날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얇디얇은 레이피어가 낭창거렸다. 날 전체에 날카로운 기운이 맺혀 있는 게 느껴졌다.
- 쓱!
은빛 가면의 여자는 레이피어를 들어시녀의 이마 가운데에 꽂았다.
칼날은 마치 호수에 나뭇가지를 담그는 것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깊이 들어갔다.
- 피릭!
어느새 빼낸 칼에 묻은 뇌수가
도발하듯 내 쪽으로 흩뿌려졌다.
여자는 한쪽 입꼬리만 비뚜름히 올리며 느긋하게 이죽거렸다.
“가짜 잡으러 온 진짜<유령>이지.
후후후. 어딜 갔다 오시는 걸까?
덕분에 내 실적이 하나 늘겠지만.”
‘.유령이라고?’
손목을 바라봤다.
무리해서 마법을 쓴 탓에 손목의 매듭 다섯 개가 더 타올라 있었다.
물론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상대가 칼을 들이대고 있다.
바로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
‘한 명일까.’
조금씩 상대의 간격을 겠다.
깔끔하게 경동맥이 절단된 경비의 시체도, 눈앞에 있는 여자의 솜씨라고 보면 될 것이다.
상대도 내 간격을 조용히 재는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들보 위를 가만히 걷던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측정치랑 뭐 이리 실력이 달라?
그래도. 몸에 구멍 열 개 정도는 뚫어 줄 수 있겠는걸.”
- 피릿!
칼날 전체에 섬뜩한 기운을 담은, 레이피어 끝이 수 갈래로 휘어지며 나를 향해 찔러 왔다.
스물하나.
갑옷 곳곳에, 레이피어로 완전히 관통한 작은 구멍의 숫자.
무려 스물이 넘는다.
열 개를 뚫어 주겠다던 은색 가면의 말은 과한 겸손이었다.
그에 비해.
내가 뚫은 구멍은 단 하나.
다만, 조금 더 크고 치명적이다.
“끄흐. 끄흐혹. 이런 씨발.
배에 칼이 깊이 박힌 상태에서도 여자는 죽지 않고 꿈틀거리며 붉은 침과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스켈레톤이라니. 뒷. 이 무슨개 같은.
안타깝지만 실력에 비해 상성이 좋지 못했다.
여자의 쾌검.
급소를 뚫어야 할 레이피어 끝이 모두 빈 공간만 뚫고 지나갔다.
“쿨럭.!”
피기침이 투구에 튀었다.
두개골을 붙잡아, 반으로 쪼개기라도하고 싶었을까.
“넌. 어차피 뒈질.!”
이를 악물고 내뻗어 오던 그녀의 손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힘겨운 상대였다.
- 참격.
횡으로 칼을 휘둘러 시체를 절반으로 잘랐다.
- 퍼걱!
반으로 잘린 여자의 상반신에서 은은한 초록빛이 났다. 레일리에게 나던 것보다 조금 더 어두웠다.
[민첩이 1 올랐습니다!]
[민첩이.]
흡수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간의 스탯을 빨아들였다.
흘끗 시스템 창을 확인한 뒤에 곧아래로 내려 꼈다.
시선이 팔목이 머물렀다.
샤루니안이 만들어 준 부적 팔찌매듭들이 남김없이 모두 회색 재가 되어 버렸다.
‘이제 이것도 끝이군.’
하지만 그것까지 고려하며 싸울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체력도 반 이상 깎여 있었다.
도망갈까, 하는 생각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문득 고개를 든다.
하지만 여기서 내빼 버리면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다.
‘젠들러. 헤일리는.?’
오늘 밤 벌어진.
혹은 벌어지고 있는 참극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 팟!
마음을 굳히고 긴 복도를 달렸다.
2층으로 올라가 영주의 방에 도착했을 때였다.
- 와그작. 와그작. 아삭! 꿀끽.
눈앞에 붉게 꿈틀거리는 어지러운 광경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