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73화 (173/458)

174화 매듭 (14)

- 휘이이잉!

통로를 전부 얼려 버리는 강렬한 냉기가 검에서 터져 나왔다.

손목에 있는 부적 매듭.

마흔아홉 개가 모두 타 버린 지이미 한참이다. 회색 재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팔찌를 찾을 것도 없었다.

팔목 갑옷 자체가 공격에 거칠게 뜯겨 하얀 뼈가 드러나 있다.

‘어차피.

회로가 만든 마왕의 흔적을 쫓을, 푸르손 추종자들을 걱정할 상황은 아니다.

‘차라리 지금 나타나 주든가.’

당장이라도 여기 출현해, 혼란의 삼파전이라도 벌여주면 좋겠지만 그런 기색은 없다.

- 퍼걱!

암살자들은 커다란 방패를 들어마법을 막아 냈다.

냉기에 섞인 바람의 위력에 뒤로 한참 밀려나기는 했지만, 고작해야 시간을 버는 정도에 불과했다.

전장의 일선에서 사용하면, 강제징집된 노예나 해골병사 소부대를 한 번에 얼려 깨뜨릴 수 있을 것 같은 위력의 마법.

예전에는 아예 상상도 해 보지 못했을 힘이지만, 가진 힘에 취할 여유 따위는 없다.

가면을 쓴 인간들은 그런 공격을 어떻게든 막아 내며 조금씩 간격을 좁혀 오고 있다.

‘.정체가 뭐지.’

놈들은 놈들 나름대로 나에 대해 무척이나 당황한 것 같았다.

“크으윽.!”

“아직도 이 정도의 마법을 시전할수 있다니. 대체 정체가 뭐야?”

“.돌아가면 첩보조를 전부 죽여버려 야겠어.”

“빌어먹을. 이거 진짜<수도회>의 협조라도 받았어야 하는 거 아냐?”

“헛소리 집어치우자고.”

놈들이 이를 갈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우쭐할 건 없다.

버텨도 답이 없는 상황.

버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이작이 뼈에 새겨 넣은 회로는 완전히 과열된 데다가, 과다한 사용으로 몸 안에 있는 루-륨의 총량이 계속 말라 가는 게 느껴졌다.

자동으로 회복할 수 있다고 해도, 지금은 그 회복치를 한참 넘어서 사용하고 있다.

눈앞의 통로를 뚫고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가면>여섯이 모두 모인 지금, 결판을 내겠답시고 덤벼 봐야 조금더 빨리 죽을 뿐.

차라리 저들이 성급히 공격해 들어올때, 조심스레 반격을 노리는 편이낫다.

“계속 밀어붙이자. 저 새끼, 거의 다 끝났어. 아까보다 공격 빈도도 위력도 훨씬 더 약해.”

저편에서 차가운 진단이 들린다.

‘.하나라도 더 데려가 주마:

챈들러부터 시작해, 크리스티나와 집사, 시녀와 헤일리까지 모두 다죽인 상대들이다.

왜 나 따위가 동생을 맡겠다고

말했을까?

그 아이는, 어쩌면 슬라임과 함께 있는 편이 안전하지 않았을까.

챈들러도, 크리스티나도.

내가 그라스미어에 오지 않았다면 혹시 안 죽지 않았을까?

하루라도 더 살았을지도 모른다.

‘또 나 때문인가.

- 달그락.

나는 반쯤 부서진 갑옷 안에서 몸을 움직였다.

내게는 비기秘技도, 숨겨 둔 궁극의 한 수 같은 것도 없다.

그저 온몸이 전부 부서질 때까지 움직일 뿐. 갈 때 가더라도, 끝까지 한칼을. 더 먹인다.

‘격발.’

이미 너덜너덜한 회로를 또 한 번발동시켰다.

- 화르르!

지금까지와 같은 불꽃이 대검을 휘감으며 타올랐다.

[주의! 체력이 15%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체력이 가파르게 깎인다. 끝일 수 밖에 없는 건 이미 알고 있다.

- 투둑.

갈비뼈 두 개가 과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타 버린다.

물론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은 여기서 끝이지만, 놈들을 기억했다가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때 지금의 빚을 받는다.

죽어 간 모두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최대한 끌어올린 검기와 질풍을 섞어, 가장 먼저 다가오는 놈에게 다시 한 번날렸을 때였다.

- 쿠구구구구.!

뒤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 퍼엉!

선두에 다가오던 놈이 주춤한 틈을 타서 빠르게 뒤를 돌아봤다.

아이작의 관이 있는 가장 안쪽.

놀랍게도 약 1미터 정도의 작은 입구가 생겨난 게 보였다.

‘비밀. 통로?’

이번에야말로 끝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나를 놀리는 것처럼 석벽 한구석이 옆으로 밀려났다.

지금까지 아무 일 없다가 갑자기 왜 석벽이 열리게 된 건지 사정을 알기 힘들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할 틈은 없다.

아이작의 무덤에 숨겨진 또 다른 비밀을 발견한 건지도 모른다.

죽어도 하나라도 더 알고 죽어야 복수에 도움이 된다.

- 팟!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좁은 입구로 몸을 날렸다.

안쪽으로 첫발을 디뎠을 때였다.

- 퍼엉!

짙은 안개가 입구 근처에서 피어오르며 갑옷 안으로 들어왔다.

몸을 살살이 훌으면서 무언가를 검사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몰려들었던 안개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뭐였지?’

이 장소가 나를 <허락>하는 게 느껴졌다.

“저건 또 뭐야?”

“안개 안으로 들어갔어! 쫓아!”

“막바지로 몰아세운 줄 알았는데 비밀 통로라고? 정말 연기력 한 번끝내주는 해골이군.”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가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면들의 웅성거림에서 몹시 강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멀다.’

몇 걸음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어찐지 바깥에 있는 적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작게 들리거나 알아듣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과 나 사이가 철저히 무언가로 [격리]되어 있는것 같았다.

아주 얇아서.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결코 그 사이를 뛰어넘을 수 없는 터무니없이 견고한 법칙으로.

“이, 이거 뭐야? 왜 발이 멋대로 꼬이고 있어.?”

“벽이 몸을 끌어당긴다! 조심해!”

- 화르르르르!

그들을 향해서, 어디선가 강렬한 화염이 치솟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열기는커녕 한 조각 바람마저나에게 닿지 않았다.

“으아아아악!”

“눈! 눈이 안 보여!”

“.터무니없이 강한 결계다. 움직이지 말고 역진逆進해라. 멍청한 새끼들아, 내가 순순히 보고하자고 했잖아?”

뒤를 바싹 쫓던 자들의 발작적인 외침이 멀게만 들려왔다.

‘결계인가.!’

아이작이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결계인지도 모른다.

수백 년 전 제국 남부를 지배한 대주술사.

그가 만든 결계라면 위력은 말해봐야 입만 아플 터.

곤란에 처한 가면들에 반격해 볼까했지만, 정체도 모르는 장소에서 경거망동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보기에 무척 좁았는데, 안쪽으로 발을 디디자 신기하게도 공간이 훨씬 더 넓었다.

발을 디딜수록 넓었고 새로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깥과 완전히 별개의 공간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두웠지만 은은한 빛이 비쳤다.

앞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다.

‘일단. 상황을 정리하자.’

아이작은 말파스의 대제사장.

내 몸을 빼앗은 놈은 두 차례에 걸쳐 뼈에 루-룸 회로를 새겼다.

마법을 쓸 때마다 마왕 말파스의 인장이 새겨진다.

제단을<망쳤다>며, 푸르손의 추종자들이 득달같이 나를 쫓게 만든 그인장.

힘을 쓰는 것만으로 다른 마왕의 제단이 훼손된다면, 자기의 제단에서는 어떨까?

여기는 말파스의 제단.

그 인장이 방금 결계를 연 열쇠인지도 모른다.

역시 더 살아남아서 이 장소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이작이 숨긴 유산이라도 잠들어있다면, 회귀를 반복하면서 계속활용할 수 있으니까.

전부 가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기서 안심할 수는 없다.

밖에 있는 녀석들이 결계를 파괴하는 방법을 언제 찾을지 모른다.

‘뭘 하더라도. 서둘러야겠군.’

한참 더 안으로 걸어갔다.

무척 길고 넓었다. 통로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저건.?’

한참을 더 가자 앞쪽 곳곳에서

거대한 까마귀 조각상들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없는 살점이라도 뜯어낼 것 같은 눈빛.

날개를 활짝 편 까마귀도, 고개를 앞으로 내민 채 날개를 접고 있는 까마귀도 있었다.

나는 조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빛.

새까만 조각상들에서 은은히 빛이 나고 있었다.

사방이 막힌 통로에서 달이라도 비치는 것처럼 앞이 보이던 이유가 있었다.

- 스윽.

대검을 높이 들어 조각상 하나를 긁었다.

검기 서린 칼날 끝에 퇴폐적으로 빛나는 금속을 보고 확신했다.

블랙 골드.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황금보다 스무 배는 아름답지만 정해진 가격은 없다. 거래도 거의 되지 않는다.

‘태양빛을 받으면, 그대로 스러져재가 되기 때문이었지.

블랙 골드.

음울한 호사의 극치인 금속으로, 수십 마리의 까마귀가 나란히 빚어져있었다.

거기에는 잠시 멈춰 멍하니 바라볼수밖에 없는 퇴폐미가 있었다.

보석과 금을 좋아하는 마왕.

더 의심할 바 없다.

이곳은 말파스의 제단이다.

한참 걸어가 통로 끝에 다가갔을 때였다.

시야가 훨씬 더 밝아졌다.

- 스스스스.

까만 어둠 속에서.

칠흑의 석문에 새겨진 회로 위에, 하얗게 타오르는 액체가 흘렀다.

블랙 골드에 반사되던 빛은 모두 여기서 나온 것이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공간에서 오직반투명한 백색만이 생생했다.

백색은 때로 초록빛으로, 붉거나 푸른빛으로 변하기도 했다.

나는 멍하니 석문 앞으로 몇 걸음발을 내디뎠다.

가장 깨끗한 보석을 녹인 것 같은 반투명한 액상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흘렀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아름다움.

이런 건 들어 본 적도 없었다.

흐르는 액체 보석을 멍하니 바라보자, 움직임의 패턴이 읽혔다.

‘.언어?’

하지만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대륙어도 동방어도 아닌, 완전히 낯선 언어.

한참을 그 앞에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망설임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열어 봐야 한다.

문 장식이 이 정도인데, 뒤쪽에 얼마나 대단한 게 숨겨져 있을지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이 상황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수단이 있을지도 모른다.

팽팽한 긴장감에 온몸이 굳는 것 같았다.

‘어딜 잡아야 하는 거지.

겉모습만 아치형의 거대한 문門이지, 손잡이는커녕 어디로 움직일 만한 홈도 없다.

- 달그락.

일단 밀어 봤지만 석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달그락! 달그락!

어떻게든 왼쪽으로 밀고, 당기고, 오른쪽으로도 밀어 봤지만 거대한 문은 눈도 깜짝 않는다.

- 까앙!

망설이다가 칼로 쳐 봐도 아무런반응이 없다. 검기가 서린 칼날이 작은 생채기조차 내지 못한다.

몹시 강력한 결계가 걸려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시 루-름 회로를 식힌 뒤, 마법으로 전체를 건드려 봤지만 역시 어떤 반응도 없다.

‘.어쩌라는 거지?’

아주 약간이라도 반응이 있다면 더공격해 볼 만할 텐데, 그야말로 아무런 반응이 없다.

시도해 볼 기분이 나지 않았다.

결계 해체는 당연히 불가능.

내 수준의 지식으로는 아예 감도안 잡히는 상태니까.

일단 석문을 놓아둔 채 주위를 계속둘러봤다.

이 문이 뚫리지 않으면 다른 탈출구가 있어야 한다.

강력한 결계로 보호된다고는 해도 한없이 여기 있을 수는 없다.

문의 오른쪽으로 쭉 가 보자, 길고 좁은 길이 있었다.

하지만 끝부분은 막혀 있었다.

‘탐지.’

스킬을 사용해도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한참을 살펴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문이 아예 없거나.

파악할 수 없는 수준의 통로라는 이야기.

‘누굴 놀리는 건가.

빛 글자가 새겨진 석문 앞에 서서 몇 번 더 개방을 시도했지만 아무것도 먹히지 않는다.

“이런.

연달아 마법을 써도 무반응.

나는 문 앞에 누워 조용히 체력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힘을 회복하는 게 답이다.

이 석문을 두드려 보려고 해도, 밖으로 나가서 싸우려고 해도 힘이 필요하다.

혹시 펜던트가 답을 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잔여 시간: 29:53.]

하루 정도만 더 버티면 펜던트의 쿨타임이 돌아온다.

‘이 번에야말로.

성에 있던 자들은 이미 모두 살해당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펜던트의 말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수행하겠다.

따르지 않은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는 지금 경험하고 있으니.

하루가 조금 더 지났다.

[뼈 복구를 실행하시겠습니까?]

타 버렸던 갈비뼈가 희미한 빛을 내며 다시 아물었다.

<뼈의 군주>스킬로 마지막 상처까지 전부 치료했다.

몸은 완전히 회복된 상태.

루-륨 회로의 과부하도 풀렸고, 양자체도 거의 회복된 상태다.

하지만.

- 화르르!

여전히 석문은 어떤 반응도 없다.

‘그냥 돌파해야 하나.’

입구 근처에 다가갔을 때 놈들이 하던 대화를 회상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독 안에 든 쥐라고.>

<추가 지원은 아직?>

<불렀으니 기다려 보자.>

<정말 보고 없이 괜찮을까?>

<그분이 알게 되면, 우리는 정말 죽지도 살지도 못할 텐데.>

그들은 누군가를 몹시 두려워하며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누굴 말하는 거지?’

결계 바깥에서, 설핏 들리는 그들의 대화는 나까지도 약간 긴장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펜던트가 답을 줄 테니까.

[다음 발동까지: 00:00:10.]

9, 8, 7.

남은 시간이 정확히 0을 가리켰을 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