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75화 (175/458)

176화 루비아 (1)

빗속에서 불이 타오른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은 손에서, 팔에서, 다리에서 타오른다.

- 투두두두두둑!

뼈마디를 부술 것처럼 두드리는 장대비 속에서도, 몸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는다.

불에 관한 생각을 지속할 여유는 없었다.

- 띠링!

- 띠링!

- 띠링!

[계승되었습니다.]

[74.3%.]

[동화율 75% 이하.]

[1 차 봉인 해제.]

[전직이 해제되었습니다.]

[특전을 자동으로 선택합니다.]

특전: 네크로멘서의 연인

영웅급 특전입니다. 다른 영웅급 특전이 활성화될 때까지 강제로.

- 모든 사령술사(네크로멘서)와의 관계에서 기본 호감도 20을.

- 사역 관계를 맺은 사령술사의 호감도가 추가로 10 상승.

- 당신의 존재는 사령술사의 영감을자극.

- 영웅급 특전입니다. 다른 영웅급특전이 활성화될 때까지 강제로 이특전이 선택됩니다.

눈앞에 빼곡히 떠오르는 상태창을 죽 내린다.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확인하면 그만이다.

지금 중요한 건-

은몸이 젖은 채 추위에 바르르 떨면서,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

온도를 확 높인 탓인지, 그녀의 입에서는 더 이상 기침이 나오지 않는다.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뒷걸음질 치지도 않는다.

“아아.

그저 나지막한 탄식만이 새어 나올뿐이다.

주저앉은 진회색 로브의 여자.

네크로멘서들의 로브나, 나 같은 것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또렷하게 나를 올려다본다.

비에 젖은 속눈썹이 깜빡거린다.

‘루비아.

익숙해질 수가 없는 눈빛이다.

“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둣, 루비아는 가만히 눈을 마주친 채로 입술을 달싹거린다.

‘시작점이. 달라졌어.?’

시나리오 완료의 영향일까.

레나가 잠든 동굴이 아니라.

- 우르릉!

- 콰앙!

폭우에 미친 듯이 파헤쳐진 무덤한가운데서 일어났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때로 다시 돌아왔다.

나 때문에 비참하게 죽은 그녀를, 차가운 땅에 묻은 채 두 번 다시 못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따듯한 온기를 뿜어내는 것 같은 저 촉촉한 눈동자를.

무책임할 정도로 약해 보이는 흰손목과 목덜미를.

- 쏴아아아.

그녀는 끈적거리는 새까만 늪에 내려앉은 하얀 꽃 같다.

“아.

약한 탄식과 함께, 그녀가 천천히 손을 내 쪽으로 뻗는다.

입에서 천천히 말이 새어 나온다.

“저. 정말로.

주위의 시간이 갑자기 느려진 것처럼 느껴진다. 체념했던 그녀의 죽음이 되돌려졌다.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면서 나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루비아를 눈앞에 보자-

함께했던 장면들이, 수많은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모든 걸 털어놓고 싶기도 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조용한 조력자가 되어 주고 싶기도 하다.

- 우르릉! 광!

이제 간헐적으로 내려치는 번개가 없어도, 몸에서 피어나는 불꽃으로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친다.

“정말. 정말 제가.

눈도 깜빡거리지 못하고, 얼굴에 진흙과 빗물이 묻은 채 빤히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제 부름에 따라 무덤에서 일어서신 건가요?”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묻고 싶다.

정말 시작점이 달라진 거냐고.

그녀를 지키지 못한 모든 과실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고, 정말 다시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는 거냐고.

불이 옮겨붙지 않게 하기 위해 몸에 붙은 불을 누그러뜨렸다.

열은 남아서 따듯하다.

어느 정도 적당한 온기가 되어 준건지, 그녀의 얼굴에 조금 화색이돈다.

루비아.

그녀는 불타올랐던 해골인 나를 보고 물러서지 않는다.

경계하지도 않는다.

대신 조심스럽고, 무척이나 반가운얼굴로 나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 합니다! 불렀는데 일어나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저는 루비아라고 하고.

- 띠링!

- 동화율이 75% 이하입니다.

- 세부 퀘스트: 영주 루비아

- 루비아를 에라스트 영주로 등극시키십시오!

- 통치 레벨을 10까지 올리세요!

- 보상: ???

‘뭐라고?’

허공에 떠 있는 루비아의 이름에 정신을 집중한다. 아래로 주르륵상태창이 떠오른다.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l]

[체력-9 힘-7 민첩-8 지혜-14]

[호감도: 30]

- 루비아는 당신을 신뢰하며, 높은 결속력과 친근함을 느껍니다.

[서번트 시스템]

- 양자의 관계를 인정합니다.

- 관계의 발전에 따라 부가 효과가 생성됩니다.

‘서번트. 시스템.

레나와 함께할 때는 나오지 않던 시스템.

루비아가 나를 일으킨 걸 특별하게 취급해 주는 거라고 생각된다.

아래로 기본 스킬창이 펼쳐진다.

[기본 스킬]

- 책 찾기 Lv.10

- 책 읽기 Lv.10

- 고대어 Lv.3

- 룬어 Lv.3

- 독도법 Lv.3

- 예법 Lv.2

-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특전]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칭히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세계선 변경이 적용되었습니다.]

‘능력치가. 변했어.’

약간이지만, 분명한 변화가 있다.

루비아와 쌓았던 관계가 조금이나마반영된 건지도 모른다.

그저 시간이 반복되는 걸 넘어.

내 음직임에 따라-

세계가 처음부터 바뀌고 있다.

- 달그락.

주먹이 꽉 쥐어진다.

두 번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루비아를 만났다.

내 움직임에 따라, 이 세계선이 처음부터 변화한다면.

‘레나는. 어디 있는 걸까?’

함께 지냈던 서큐버스님도, 아예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민할 게 너무 많군.’

- 달그락!

고개를 한 번 흔들었다.

지금은 루비아에게 집중하자.

내 앞에 서서 입술을 달싹이는

루비아를 향해 물었다.

“복수를 하고 싶은 건가?”

“마, 맞아요! 어떻게.!”

“일단 비부터 피하지.”

“네! 그런데. 말을. 말을 너무잘하시네요!”

“.잠깐 눈 감아.”

계속 비를 맞고 있어서 좋을 리가 없다. 잘못 움직이다 벼락이라도 맞으면 더 그렇다.

“그럴게요!”

억지로 얻어 버린 호감 때문일까.

루비아는 나를 조금도 경계하지 않고 눈을 꽉 감는다.

꽉 감은 속눈썹에 맺힌 빗물들이 아래로 고여 떨어진다.

잠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질주.’

품에 루비아를 안아 들고 그대로 동굴로 뛰었다.

박쥐 한 마리조차 들어오지 않는 안전한 미로述路.

‘거기도 오랜만이군.

최초의 생에서 3년이나 살았다.

하지만 저번 생에 워낙 많은 일을 겪어서인지 어찐지 조금은 아득히 느껴진다.

- 팟!

처음에는 30분을 힘겹게 걸어야 했던 길.

지금은 높은 스랫과 스킬의 영향때문에 채 2분도 걸리지 않는다.

수풀에 가려진 좁은 동굴 앞.

“다 왔는데.”

루비아의 대답이 없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그녀는 두 주먹을 꼭 쥐고, 눈을 감은 채 나에게 안겨 있었다.

‘그사이 감기라도 걸린 건가?’

새하얀 얼굴이 붉어져 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며 품에서 내려왔다.

“아. 죄송해요!”

“잠깐 여기에 들어가 있으시오. 너무멀리 가지는 말고.”

동굴 안쪽은 벌레도, 거미도 없는 꽤 넓은 공간이다.

사실 저 안에서 그녀가 헤맨다고 해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예전과는 다르다.

[추적 Lv.l5]

[심안心眼 (?)]

[탐지 Lv.7]

루비아가 동굴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멋대로 길을 잃어도,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루비아는 연달아 몇 번씩 고개를 끄덕인다.

“네! 가만히. 가만히 있을게요.

그런데 어디. 가시는 거예요?”

의아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불안이 느껴진다.

“혹시 제가 너무 약해서. 실망하신건가요.? 죄송해요!”

“아니, 그건 완전히 오해인데.”

“정말요.? 저로 괜찮으세요?”

뭐가 괜찮으냐는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괜찮지.”

“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루비아의 어깨가 스르르 풀어진다. 꽉 주먹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이 작게 꼬물거린다.

“금방 돌아올 테니 별걱정 말고.

잠깐 할 게 있어서.”

“.네!”

힘차게 대답하는 그녀를 동굴에 넣어두고 밖으로 나왔다.

- 위이이이이잉

여기까지 미친 듯이 바람이 분다.

땅을 모조리 파헤치고 나뭇가지를 뜯어낸다.

一 수국! 누누국!

가볍게 온몸을 한 번씩 풀어 주며 다시 무덤으로 돌아간다.

수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지만, 가장 먼저 처리할 일이 바로 가까이 있다는 건 안다.

‘다시 한 번 해 볼까. 격발.’

- 화르르!

다시 한 번 손끝에서, 빗줄기에도 좀처럼 꺼지지 않는 마법 불꽃이 타오른다.

회로가 전승되어 있다.

뼈 사이사이를 돌고 있는 은빛 액체가 느껴진다.

돈도, 무기도.

부서진 레나의 펜던트를 포함해 다른 어떤 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몸 안을 흐르는 루-륨만은 멀쩡하다는 사실이 낯설다.

아이작과 나눴던 대화가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피라고?>

<그래. 사도使徒의 피다. 세이론이 잡아 죽인 사도들의 피지.>

어쨌거나.

‘마법을. 전부 쓸 수 있는 건가?’

말파스의 인장이 이번 생에서도 이어져 있다는 이야기.

던전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기고 다니지 않는 편이 좋다.

어디가 다른 마왕들의 제단인지 명확히 알 수 없으니까.

과거와 달리 이번 생에는 푸르손추종자들과 대립하지 않는다 해도.

‘마법은 일단 좀 자제해 볼까.’

보티스나 푸르손과 달리, 세력도 갖추지 못한 마왕의 인장을 찍고 다녀서 좋을 일은 없다.

‘아이작 정도는 남았지.’

하지만.

결계가 파괴되고, 그 신도들마저모조리 푸르손의 제물로 바쳐졌던 그의 비밀 교단이 떠오른다.

마법은 당분간 봉인이다.

- 팟!

몸을 솟구쳤다.

질주 스킬을 사용한 상태.

가볍게 걸어도 평범한 팀박질보다훨씬 더 빠르다.

커다란 바위 같은 걸 훌쩍훌쩍

뛰어넘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무에 묶인 두 필의 말과, 산을 수색하는 두 명의 인간이 잡힌다.

나를, 루비아를 몇 번이고 죽였던 자들이다.

그 둘을 살해하기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 가며 두개골이 부서졌다.

잔뜩 긴장한 채 바닥에 엎드려서 놈들을 기다리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힘이라는 면에서 보면 도무지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 히히힝!

말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석궁을 쥔 놈과 망치를 쥔 놈이 조심스럽게 산을 뒤지고 있다.

‘은신.’

기척을 숨긴 채 녀석들 곁에 따라붙는다.

- 스륵.

- 스르륵.

놈들이 제 딴에는 은밀한 자세로 수풀을 헤치며 조심스레 전진한다.

루비아 혼자서, 온갖 흔적을 다남기며 왔던 내 무덤가까지는 잘쫓아온 것 같다.

하지만 흔적은 거기까지.

내가 뻔 흔적을 놈들은 발견하지 못한다.

이대로 다시 돌아가도, 쫓아오지 못하고 단념할 확률이 높다.

‘구경이나 해 볼까?’

나는 바로 뒤를 걸어간다. 그들의 <추적>을 관람한다.

한참을 뒤에 서 있어도 내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최소한의 육감마저도 없는 건지, 아예 감도 잡지 못한다.

너무나도 쉬운.

간단히 짓눌러, 철저히 유린할 수 있는 사냥감에 대한 흥분.

그게 이 두 남자를 완전히 눈멀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뭐야? 왜 없어.?”

“닥쳐 봐. 완전히 포기했냐? 지금이빨 털게?”

“근데 없잖아. 하. 어떻게 이걸놓치는 거야. 기가 막히겠네.”

“나 얘 때문에 창녀도 안 사 먹고 사흘째 참았거든?”

“병신. 아무튼 여기서는 더 못 찾겠어. 절벽에 떨어졌다고 할까? 어차피 영주 새끼, 완전 호구잖아.”

“돈이 중요한 게 아닌데. 산에서하고 싶었다고, 산에서.!”

세상은 악의로 가득하고 작은 별빛조차 드물다.

이들은 한순간의 축축한 쾌감을 위해, 타자를 가볍게 찌그러뜨리고 해체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로 진솔하게 나누는 이야기를 좀더 들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루비아가 과거에 이들에게 살해당하는 모습이 떠오르자, 더는 가만히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산성酸性 Lv.5를 발동합니다!]

- 치지지지지지직!

[체력이 0.017% 감소합니다.]

[체력이.]

손가락을 매개로 쓴 탓에 체력이 줄어든다.

물론 한참은 버틸 만한 속도다.

“히, 히익?”

갑작스럽게 드러낸 기척에 놀란 두 인간이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