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루비아 (5)
크라켄에게 흡수한 공포 스킬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늪의 악령에게마저 먹혔다.
터진 내장들을 잔뜩 뒤집어쓰고, 혼자 그 스킬을 받는 기분이 어떤 건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만해 볼까.’
나는 공포 스킬을 해제했다.
이대로라면 영주는 돌아 버리거나 심장마비로 죽을 확률이 크다.
그러면 곤란하다.
루비아의 복수를 내가 마음대로 빼앗을 수는 없다.
“으어. 으어어.
스킬 해제의 효과는 곧 나타났다.
에라스트 영주가 비틀거리며 시체더미 속에서 기어 나왔다.
피와 내장을 털어 내고, 제가 만든 처형대 위에 선 영주는 어느 정도 자신을 되찾은 것 같았다.
“이, 이, 이년이.! 가, 가, 감히!”
대단하다면 대단하다.
제 패거리가 전부 피떡이 되어 죽어버렸는데도 큰소리다.
상황 파악이 안 된 건지, 아니면 저 안에서 벌써 미쳐 버린 건지도 모른다.
“너, 너, 너를 가, 가만두지 아, 않을 것이야!”
다른 건 모르지만, 언어장애는
확실히 온 것 같다.
“추잡하시네요.”
루비아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영주를 매도했다.
“가만두지 않으려고 온갖 발악을 다했으면서. 헛소리는.”
차갑다.
단호하다.
산에서 다리가 풀려서, 내 쪽으로 무방비하게 풀썩풀썩 넘어지던 여자 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이, 이.!”
영주가 부들거린다.
그때 였다.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가 당신의 조언을 간절히 원합니다.]
[의사소통 채널이 열립니다.]
놀라웠다.
‘그런 게. 된다고?’
나는 루비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 루비아.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머쓱해질 정도로 놀라는 반응이었다.
격하게 뛰는 그녀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 너무 놀라지 마라.
하지만 사실 내가 더 놀랐다.
‘어떻게 이런 게. 혹시 사령술의 재능이라고 봐야 하나?’
허공에 뜨는 메시지에 따르면.
나는 루비아의<서번트>다.
그렇다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재능인 셈이다.
어쩌면.
이런 시간회귀마저, 그녀가 나의 마스터인 탓이 아닐까. 그런 황당한 생각마저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 앞에 서 있는 루비아라는 여자가, 예전보다 한층더 각별한 존재로 느껴진다.
루비아가 여기저기를 돌아본다.
= 왼쪽 담벼락 아래에 숨어 있다.
너무 눈 돌릴 필요 없어. 그냥.
들리면 고개를 끄덕여라.
흠칫하던 그녀는 얼마 망설이지 않고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 아아.
루비아의 목소리가 몸 안쪽에서 울려온다. 조심스럽고 따듯하고, 조금은 물기에 찬 목소리다.
- 이렇게. 하는. 건가요?
= 그래.
그때 였다.
“겨, 경비! 경비대!”
처형대 위의 영주가 고래고래 악을썼다.
루비아와 생각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너무 들떠 버린 탓인지, 잠시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사이 영주가 조금 더 정신을 되찾고 경비병을 부르기 시작했다.
- 뿌우우우!
그가 품에서 구불구불한 뿔나팔을 꺼내 길게 불었다. 거리를 둘러싼경비병들이 보였다.
‘나타났다.’라기보다는, 이미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자들이었다.
수십 명의 에라스트 경비병이 처형대가 설치된 장소를 둘러싸고 있었다.
작은 시골 도시에서 동원할 수 있는 대부분의 치안 병력이 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영주가 뿔나팔을 불기 전에, 이미누군가에게 급히 연락을 받고 모인것 같았다.
새로 나타난 그들의 존재에 기운이라도 얻은 건지, 영주는 패닉을 잊기라도 한 듯 한층 더 건방진 태도가 되었다.
“다. 당장 저년을 잡아! 아니, 주, 죽여! 죽여! 다, 당장!”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경비병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 가운데는 성문에서 꼴사납게 주저앉은 녀석들도 섞여 있었다.
‘소문이 퍼졌군.’
루비아가 성으로 간다는 소문이.
영주의 뿔나팔 따위가 그들을 여기에 오게 한 것이 아니다.
성문에 있던 경비들이 자기들을 한 번에 비키게 만든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동료들을 끌어와서 여기로 그녀를 쫓아온 거다.
그저 방관자에 불과한가 했지만, 그들도 루비아가 차마 도시 안에서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던 건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터.
= 경비들에게 물어라. 어느 편을 따를 거냐고.
“여러분! 누구를 따르실 거죠?”
“내, 내가 여, 영주다! 뭣들 하는게냐! 뭣들 하는 거야!”
영주를 따른다면.
물론 여기서 경비병들을 다 죽여버릴 생각이다.
이 정도의 인원이라면 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
“길게 말하지 않을께요. 예전의.
에라스트로 돌아가고 싶다면, 저를 따르세요.”
루비아가 주위를 돌아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녀에게 묘한 품격이 느껴졌다. 경비병들이 일제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전 영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역시.
“그야. 당연히.!”
“아가씨께서 마, 마법사가 되어서 돌아오셨다니까! 저거 봐!”
“이, 이 미친것들이! 어서 저년을 잡지 않고 무엇 하는 짓이야!”
영주가 발작하며 처형대 위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경비대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쿵.
- 쿵.
_ 쿵.
수십 명의 경비병이 루비아를 향해차례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숙였다.
= 제법인데?
- 어. 이게. 되네요? 다 해골님덕분이에요.!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루비아의 호감도가 3 올랐다는 상태창이 떠올랐다.
어째서 이런 것까지 내 덕분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호감도가 오른다는데 싫을 이유는 없었다.
“이, 이익! 이, 이 미친것들이! 도, 돌아와서 모조리 죽여주마!”
“어딜 가시려고요?”
가장 먼저 루비아에게 무릎 꿇었던 경비 두 명이, 긴 창을 겹쳐서 영주를 막아섰다.
“너 같은 게 영주라니.”
“쓰레기 같은 놈들을 또어디서 데려오려고.”
- 콱!
날아온 창대들이 영주의 손목을 쳤다.
정강이를 치고, 등을 쳐서 그를 바닥에 무릎 꿇렸다.
순식간에 여섯 자루의 창대에 짓눌린 영주가 바닥에서 버둥거렸다.
“바, 바, 반역자들!”
“영주님, 아직도 현실을 제대로 모르는 거 같은데. 우리 다 당신싫어했어.”
“흐이익! 이! 이이이익!”
= 이제 뭘 할 거지?
아직 적응되지 않는 듯,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에 루비아가 흠칫했다.
시끄럽게 울리는 비명 소리 사이로 루비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 저 때문에. 저 때문에 갇힌.
사람들이 있어요. 구해 줘야 해요.
루비아도 새로운 의사소통 방법에 제법 익숙해진 것 같다. 대화하는 기분은 전혀 달랐지만, 아이작과 함께할 때가 떠오른다.
= 하고 싶은 대로 해.
“일리아르 총관은 어디 있지요?”
“외, 외성 감옥에 계십니다.”
가까이 있던 경비병이 대답했다.
총관이 감옥에 갇히는 걸 막지 못한게 자기 잘못이라도 되는 듯이 흠칫거리는 태도였다.
“치안관과 서기관도요?”
“예. 죄송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켰던 자들은, 언제나 반쯤 고개를 숙이고 살게 된다.
“그럼 가요.”
루비아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그저 앞장서 걸어갔다.
이제라도 확실히 이쪽에 서려는 듯이, 루비아 가까이 있던 경비병들이 말을 이어 갔다.
“저. 주의하셔야 합니다. 아직잔당들이 남아 있습니다.”
= 어디냐고 물어봐.
“어디죠?”
“내성. 망루 쪽입니다. 쇠뇌를 놈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감옥쪽으로 가시면. 쇠뇌의 공격 범위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 맡겨라.
날아오는 쇠뇌 살 정도는 간단히 잡아낼 수 있겠지만, 미리 제거할수 있다면 당연히 제거하는 편이 좋다.
= 신경 쓰지 말라고 해.
루비아가 수긍의 몸짓을 하면서 내말을 따라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크흠! 일단 방패벽을 만들어서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곧장 내성 망루를 확인했다. 과연경비대의 말대로였다.
내성 위에 있는 망루에서, 대형쇠뇌가 이쪽을 향해 겨눠졌다.
물론 대형이라고 해 봐야, 그라스미어성벽에 있던 것에 비하면 장난감 같은 크기에 불과하다.
“저것들. 인가요?”
루비아가 하얗고 매끈한 손가락을 뻗어 망루 위를 가리켰다.
“예! 맞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와 동시에.
쇠뇌 유효 사거리가 닿지도 않는 거리에서, 처형장 근처에서 주운 칼을 망루를 향해 내던졌다.
- 피잉!
날카로운 파공음이 일었다.
투창처럼 날아간 칼이 끝에서부터 쇠뇌를 부수고, 쇠뇌를 잡고 있던 자의 목을 날려 버렸다. 잘린 목이 핑그르르 허공을 날았다.
죽음의 공포를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망루 위의 남자는 사망했다.
“어엇! 저, 저기! 저기!”
경비병들이 망루 쪽을 보고 놀라며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아.!
= 놀란 티 내지 말고.
[루비아의 호감도가 1 올랐습니다!]
처리는 간단하다. 바닥에 떨어진 칼은 많았다. 망루 위에 남은 적은 둘밖에 없다.
- 피잉!
다시 한 번 강하게 던진 칼이 한명의 복부를 뚫고 등 뒤로 나왔다.
“크아아아악!”
칼에 뚫려 몸이 번쩍 들린 남자가 그대로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누구나 생애 한 번쯤은 날개가
없어도 날 수 있는 법이다.
“어어!”
“이게. 영주님의 힘.!”
이미 몇몇 경비대는 루비아를 영주라고 부르고 있었다.
[루비아의 호감도가 1 올랐습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호감도 상승상태창이 계속 떠오른다.
계속해서 호감도가 오르는 건,
루비아가 이런 자극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고 있었다. 의외로 피를 보는 걸 싫어하지 않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정말.
감사드려요‘
이제 제법 소통에 익숙해진 듯, 그녀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 저, 지금 꿈꾸는 거 아니죠?
= 글쎄. 일단 주위를 좀 보지.
“마, 마법사.!”
경비병들이 눈을 부릅뜬 채 루비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해는 어렵지 않다.
루비아가 손가락으로 망루를 가리키자, 쇠뇌가 부서지고 인간들이 모조리 죽어 버렸다.
“이, 이게 뭐야! 아냐! 이,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어.!”
- 털썩.
영주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주저앉는 영주를 경비병들이 질질 끌고 감옥으로 향했다.
“이, 이건 꿈이야.
영주가 끅끅거리며 손가락으로 제볼살을 힘껏 꼬집는다.
저런 식으로 꿈과 현실을 구분할수 있다면 편리하겠지만, 그 둘이 그렇게 선명하게 나눠져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럼, 이제 감옥으로 가요.”
루비아에게는 그사이에 벌써 상당한 위엄이 느껴진다.
그녀가 경비대를 이끌고 거리를 걸어가자, 주민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아가씨!”
“오오.!”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여자아이 한 명이 쪼르르 달려왔다.
“언니! 영주님이 되신 거예요?”
“추운데 왜 왔니. 들어가.”
“보고 싶었어요.!”
= 누구지?
- 도서관에 자주 놀러온 아이예요.
아주 똑똑해요.
백작의 딸.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평민 여자아이와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모습이 몹시자연스러웠다.
모두가 루비아를 환영하고 있다.
어떤 선정善政을 베푼 건 아니다.
성과를 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저 영주를 몰아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마음속 깊이 환호하고 있었다.
“아가씨! 저 쓰레기 같은 놈을 꼭처형해 주십시오!”
에라스트 시민들은, 루비아가 쭉멀어질 때까지 그대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옥에 도착하자, 상황을 잽싸게 파악한 간수들이 열쇠를 바쳤다.
“저, 저희도 이러고 싶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절대로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벌벌 떠는 기색이 역력했다.
위협이 될 수 없는 무리다.
그대로 무시한 채 루비아가 감옥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리아르 할아버지!”
“쿨럭.!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 저를 마지막까지 구하려던 분이에요. 이분이 없었으면 절대 성에서 탈출하지 못했을 거예요.
= 그런가.
근육질의 노인은 온몸이 전부 상처투성이였다. 난자를 당했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몸 곳곳에 선명한 칼자국이 나 있었다.
“하하. 그때 깔끔하게 죽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이런 날도 오는군요.”
루비아는 감옥 안에 갇힌 자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눈물을 홀렸다.
“엘란! 마레일 서기관님.!”
“쿨럭. 영애, 지켜 드리지 못해죄송했습니다.”
서기관이라 불린 남자가 뒤에 묶인 영주를 흘끗 보며 말했다.
“이 망할 놈을 잡으셨군요. 그 패거리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다 죽었어요.”
“예? 이놈들처럼 겁 많은 것들이 그럴 리가 없는데.
그들을 날카롭게 훌는 서기관의 눈빛에, 경비병들은 머리만 아래로 푹 수그렸다.
“자세한 설명은 성 안에서 천천히 드릴게요. 간수들과 커크 자작을 여기 구금하세요.”
“네!”
- 털썩.
팔다리가 묶인 채, 감옥 안으로 처박힌 레이 커크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그의 눈빛이 초점 없이 멍하니 풀렸다.
“후후후.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꺽꺽거리던 그가 실성한 듯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크후후후. 이럴 리가 없지.
레이 가문의 마법의 피가 각성한 건가?
그럼 나도.
피와 오물로 범벅이 된 루비아의 삼촌이 수갑에 묶인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풀려라! 다 죽어라! 불타라! 모두 불타리라!”
“재갈도 물리세요.”
“예! 예!”
“읍.! 읍읍.!”
[루비아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또다시 호감도가 오른다.
당황스러울 정도의 빈도.
= 뭐냐?
-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돌아가신 제 아버지께서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계실 거예요.
루비아는 중요한 건 지금부터라는 사실을 모른다.
‘황실.
그녀의 부친을 죽인 세력.
녀석들에게 협조적으로 보여야만 루비아의 생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는않다.
일단, 나부터가.
무언가 벅차오르는 듯한 루비아의 모습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