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루비아 (6)
= 당당하게 걸어. 턱 당기고.
- 앗. 네! 네!
영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걷는 모습하나하나가 중요하다.
성 밖에서 살해당한 커크 자작
패거리의 모습에 압도당했다고 해도, 루비아의 뒤를 따라 걷는 이들은 모두 실시간으로 그녀를 평가 중일 확률이 높았다.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건 그녀의 몫이다.
안전하게 지켜 주는 건 내 몫이다.
대들보 위를 걸어 루비아를 계속따라가며 주위를 살폈다.
그녀를 가로막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가씨.!”
성안에는 부끄러움도 잊고 엉엉울면서 반가워하는 자들이 많았다.
대부분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루비아 역시 성안의 사람들 하나하나와 상냥하게 인사를 나누며 눈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위협은 없군.’
구석구석 세심히 살폈다.
현재 성안에 있는 자들 가운데
루비아를 적대하는 인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걸. 인덕이라고 하나.’
새삼 루비아가 달라 보였다.
= 위협은 없군. 성은 안전하다.
- 감사해요. 전부 덕분이에요. 음.
그런데. 이제 뭘 해야 하죠?
루비아는 긴장한 듯 입술을 꼭
깨물었다.
= 일단 회의라도 여는 게 어떨까.
이럴 때는 공식적인 자리가 필요하다.
에라스트에서, 그녀의 지위를 모두에게 확고히 각인시킬 자리가 필요할것 같았다.
- 그래야겠네요!
루비아가 꿀꺽 침을 삼켰다.
“한 시간 뒤 대회의실에서 모이 겠습니다. 각자 분야별 안건 준비
“알겠습니다.”
“곧 뵙겠습니다!”
감옥에 있던 자들이 눈빛을 빛내며 빠르게 흩어졌다.
- 이렇게. 하면 되겠죠?
= 잘했어.
- 헤햇.
모두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서 있던 시녀가 들어왔다.
“아, 아가씨. 목욕 준비가.
‘상태가 안 좋군.’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칼을 가진, 시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얼굴 여기저기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한눈에 봐도 주먹에 맞아서 생긴 상처 같았다.
드러난 팔다리에도 긁히고 맞은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어휴.
루비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시녀에게 걸어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전 영주가 어떻게 다른 인간들을 취급했는지 그녀를 보면 명백했다.
놀랄 일은 아니다. 레이 커크는 네크론 소속이다.
“흑흑. 아가씨.
루비아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시녀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저런 모습이었나.’
목욕을 마치고 나온 루비아.
흙탕물과 피를 모두 닦고 깨끗한 옷을 걸친 그녀는 조금 전과 전혀다른 느낌이었다.
물기가 촉촉한 머리칼이 하얗고 깨끗한 피부 아래로 흐트러졌다.
치장 같은 건 하지 않은 맨 얼굴이었는데도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저 하얀 피부에 새빨간 손자국과 시퍼런 멍 자국이 생겨났던 과거를 떠올리니 괴로워졌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어떻게 해서라서도.’
“후우.”
대회의실로 걸어가면서 루비아가 길게 심호흡을 했다. 목덜미의 곡선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도와 주실 거죠?
= 내 능력 내라면.
간단한 의견 정도는 말해 줄 수있다. 몇 번이고 삶을 겪으며 이래저래 스킬도 흡수했다. 에라스트통치에 별다른 도움은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 그럼. 안심이네요!
뭐라 덧붙이기도 전에 루비아는 멋대로 안심해 버린다.
그녀의 신뢰에 미안해진다.
몇 번이고 눈앞에서 죽는 걸 보고 나서야 지금에 이르렸으니까.
에라스트 성은 두 번째.
처음은 레나와 함께 토너먼트 참가자로서 왔지만, 지금은 루비아를 영주로 만들기 위해 찾아왔다.
함께 방문한 인간이 달라서인지 성을 걷는 기분은 꽤나 색다르다.
대회의실까지는 금방이 었다.
루비아가 다가오자 먼저 와 있던 자들이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났다.
자리는 이미 꽉 차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감옥에 갇혀 있던 노인이 좌중을 대표하듯 말했다.
넝마를 입고 수염도 깎지 못한 채 감옥에 갇혀 있던 때와 달리, 검은 의상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노인은 말쑥하고 힘이 넘쳐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루비아를 향했다.
- 어떡하죠? 이렇게 다들 갑자기 저한테 영주라고 해 버리면.
긴장한 건가. 빠르게 뛰는 그녀의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가느다란 손끝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 당황하지 마. 침착해라. 전부 다예상하고 있던 거 아니었나?
- 이야기가 나올 줄은 알았는데, 이건 좀 갑작스러워서.
= 네가 모두를 구했으니까.
나는 반투명한 시나리오 창을 다시 불러온다.
[루비아를 에라스트 영주로 등극시키십시오!]
[통치 레벨을 10까지 올리세요!]
‘이번에는 꽤 수월한가.
영주로 인정받았다면, 통치 레벨정도는 쉽게 올릴 수 있지 않을까?
레나의 경우 지부장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몇 번이나 사망을 맞아야만했다.
‘S급 시나리오가 훨씬 더 어려운 것이어야 할 텐데.
물론, 내가 그만큼 강해졌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루비아가 말을 걸어온다.
- 제가 아니라. 해골님이. 구하셨는데.
= 그게 곧 네가 한 거지.
- 그게 무슨 말씀이신.
= 다들 너만 보고 있어. 저들에게 물어봐. 네가 아니면 누가 영주를 하겠는지.
_ 으음.!
루비아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진흥색 활동복 뒤쪽 주름골사이를 남몰래 꾹 말아 쥐었다.
망설일 건 없다. 루비아도 알고 있을거다. 하지만 언제나 마음의 준비라는건 필요한 법이다.
= 시작해.
그럴 때는, 뒤에서 살짝만 떠밀어주면 된다. 루비아가 입을 열었다.
“일리아르 총관님, 제가 영주 위를 차지하는 데 문제는 없나요?”
긴장했으면서도, 나오는 목소리는 떨리지 않고 당당하다.
총관 일리아르라고 불린 노인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영주님. 이 유언장을 확인해 보십시오.”
- 찌익!
총관이 밀랍으로 봉인된 봉투 끝부분을 찢었다.
‘저건.
안에서 나온 종이를 펼쳐 모두의 앞에 보여 주었다.
레이 루비아를, 에라스트의 적법한 후계자로 지정한다는 내용이 분명하게 적혀 있는 종이가 모두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틀림없는 선대 영주님의 사안좌중이 술렁거렸다.
- 아*??.! 아버지가 유언장을 썼다고 말씀하긴 하셨는데. 설마.!
= 표정 관리. 표정 관리.
- 네.!
루비아는 좌중을 돌아보며 표정만큼은 꽤 담대하게 입을 열었다.
“커크에게 빼앗겼을 거라 생각했는데.
보관하셨군요.”
물론 옷 아래에서 뛰는 맥박까지 숨길 수는 없다.
굳이 탐지를 켜지 않더라도, 그정도는 생생하게 느껴진다.
총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거 아닙니까?
받았을 때부터 저만 아는 곳에 잘숨겨 뒀지요. 이게 없어도 어차피정당성은 영주님께 있었지만.
“맞습니다. 정당하게 임명된 전 영주의 직계이시니까요. 황실의 예규이 니만큼따로 허가를 받으실 필요조차 없는 사안입니다.”
“문제는.
노인이 말을 이었다.
“영주님이 황실 눈 밖에 나서 살해당했다는 소문입니다.”
소문이라기보다는 사실.
분위기로 보아 다른 참석자들도 그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것 때문입니다. 많은 놈들이커크를 적극 막아서지 않은 게. 어휴, 한심한 것들.”
= 황실의 지침에 거스를 생각은 없다고 말해.
- 앗. 그래야 하나요?
= 거스르면 곤란해. 천천히 설명해주도록 하지.
루비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 거스를 생각은 없어요.”
회의실에 모인 중역들의 표정이 일제히 밝아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제 루비아가 부친의 죽음에 유감을 품고, 황실에 반기를 들면 함께 죽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시다면! 그러시다면 저희가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마는.
“그럼. 시작하게나.”
- 스르륵.
바짝 마른, 외눈 안경을 쓴 중년여인이 종이를 넘기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현재 영지 상황입니다.”
감옥에는 없던 여인이었다. 무척행색이 수척하고, 눈 아래가 움푹패여 있었다.
- 네 삼촌에게 협조했던 자인가?
= 그래도 탓할 수는 없어요.
루비아가 말을 이었다.
- 저분이 아니면 영지가 전혀 돌아가지 않거든요. 창고에 쌓인 농작물도 관리를 못 해서 다 썩어 들어갔을 거예요.
= 잘 아는군.
-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루비아의 얼굴에 약한 흥조가 떠올랐다. 눈 아래 짙게 그림자를 드리운여인이 루비아를 바라봤다.
“.영주님?”
“어이쿠, 영주님! 이 친구가 어떤 친구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한 번봐주십시오.”
총관 노인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루비아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던 것 같았다.
“흐음! 아니에요. 말씀하세요, 세무관님.”
세무관이라고 불린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에라스트 백작령. 총 721가구가 거주하며, 인구는 3,841명입니다.
오늘부로 30명 줄어들었습니다.”
내가 줄인 숫자다. 여자가 짧게 덧붙였다.
“생산 인구는 아닙니다.”
“없어지는 게 훨씬 나은 쓰레기들이지요! 어. 영주님께서 그것들을 어떻게 없애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누군가 슬쩍 루비아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루비아는 손가락 한 번 대면 즉시 터트릴 수 있는 마법사가 되어서 왔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 어떻게 없앴는지 말할까요?
= 농담도.
- 농담. 아닌데. 소개하면 안되는 거예요?
= 싫다.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루비아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리스크를 지울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모노클의 세무관이 말을 이었다.
“경비대 숫자는 151명입니다.”
아까 못 본 자들은 교대로 휴식을 취했거나, 아니면 다른 먼 곳에 있었던 것 같다.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나 많아요? 원래는 100명이 안 되지 않았나요.”
“영주가 바뀌면서, 젊은 농민들상당수를 병사로 징발했습니다.”
- 어떻게 하죠?
= 마음대로.
- 그러면.
내가 지켜 주는 이상 숫자 따위는 별 의미가 없다. 나 혼자서도 평범한 인간은 백 명이든 이백 명이든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다.
“억지로 잡아 온 사람들은 다 풀어주세요. 원하는 사람만 남기세요.
징병되어 있었던 기간 동안 입은.
생업의 손해도 물어 주시고요.”
세무관이 손에 든 하얀 종이와
루비아를 번갈아 응시하며 고뇌에 찬 표정을 짓는다.
“영주님.”
“말씀하세요.”
“다음은. 치수 문제입니다.”
“아버지께서 특히 신경 쓰셨던 사업이네요. 현안은 뭔가요?”
“치수에 사용할 자재를 전 영주가 모두 매각했습니다.”
“.왜죠?”
“다른 이유는 아닙니다. 유흥비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무관의 말을 들은 중역들은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모두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레이 커크가 벌여 놓은 짓들을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곧 겨울 흥수철입니다. 임시로 상단에 자재 구매 요청은 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현재 남은 예산은 간신히 이 자재들을 구매할 정도뿐입니다.”
≪으.rt
문제는 돈이다.
결국 억지로 징병된 농민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해 주는 일은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루비아에게 돈 걱정 따위를 끼칠생각은 전혀 없다.
= 돈은 많다고 해라.
- .네?
드디어 돈이 필요할 때가 왔다.
‘.여태 제대로 써 보기도 전에 죽어버렸지.’
유블람 근처에 묻혀 있는 은괴들을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해지는 기분마저 든다.
은괴를 묻어 놓은 인간들은, 어차피나에게 다 살해당할 테니 별로 돈쓸 일은 없을 것이다.
=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해.
- .정말요?
= 그래. 돈 많거든.
굳이 회계 스킬이 없더라도 쉽게 계산이 가능하다.
묻혀 있던 은괴들을 다 파낸다면 최소한 에라스트 5년 예산 정도는 가뿐히 뛰어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