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루비아 (7)
- 저. 바로 어젯밤에 무덤에서 일어나신 거 아닌가요?
= 그래서?
- 그런데 어떻게 돈이! 무덤에는 안 보였는걸요.
= 다 숨겨 놓은 데가 있지.
- 설마. 전생의 기억 같은 걸
가지고 계신 거예요? 대부호?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온 해적왕? 이제 우리는 숨겨 둔 보물을 찾아 여행하는 건가요?
모험 책은 대부분 몇 번씩 읽었거든요.
잘할 자신 있어요!
들떠 있는 게 느껴진다.
= 그 정도는 아니고. 너 하나 평생먹여 살릴 돈은 충분히 있어.
- 저 많이 먹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언제 한 번쯤은, 루비아의 말대로 모험이라도 떠나면 좋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디서도 그녀를 지켜 줄 수 있을 만큼 강해진 후여야 하겠지만.
= 많이 먹어 보든지. 어쨌거나 돈걱정은 하지 말고 일이나 제대로 하라고 해.
유블람의 은괴만 계산하더라도 도시하나 일으킬 정도는 충분하다. 거기서 돈이 더 필요하다면, 기스-제-라이의 황제 암살을 방관하고 금괴라도 챙겨오면 된다.
‘물론. 그건 위험한 선택이지만.’
“음. 돈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루비아는 결국 내가 말한 그대로 세무관에게 전달했다.
세무관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루비아를 바라봤다.
“돈 걱정이 제 임무입니다만. 진심이십니까?”
= 진심이라고 해.
“진심이에요. 흠흠!”
“.알겠습니다. 예산편성 후 다시 보고 올리겠습니다.”
한참 더 세무관의 보고가 이어진다.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보고를 들어 보면 나보다도 회계 스킬이 훨씬높은 인간인 듯하다.
하지만 루비아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을 죽여서 정수를 흡수할 생각은 전혀 없다.
‘흡수되지도 않겠지.’
지금까지 경험한 바가 있다.
전반적인 능력치가 나보다 크게 떨어진다면, 특정한 스킬을 갖고 있더라도 나에게 흡수되지 않는다.
비슷하거나 약간 더 뛰어난 능력정도면 흡수 효율이 좋지 않다.
나보다 훨씬 더 강한 자들을 흡수할때에야, 비로소 체감될 정도로 많은 것들을 얻어 낼 수 있다.
‘강해질수록.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스킬이군.’
물론 불만을 가질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로지 이 스킬 덕분에 이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가만히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세무관의 보고가 끝났다. 다음은 건조하고 단단하게 생긴 치안관의 차례였다.
얼굴에 고문 흔적이 남아 있는, 이빨몇 개가 빠져 있는 치안관이 입을 열었다.
“다음 보고드릴 사항은 잡아 온.
여자들에 관한 겁니다. 도시 바깥에서 잡아 온 자들입니다.”
= 루비아.
一 ^1?
‘그 아이도 있으려나.’
익숙한 얼굴이 있을지도 모른다.
가명으로 토너먼트에 참가한 뒤, 영주가 나에게 데려다줬던 어린 인간여자가 떠오른다. 무신경한 내 반응에 오들오들 떨던 아이다.
레나가 아이의 옷을 벗겨서 내게 등을 보여 줬을 때, 채찍질로 살이 찢어진 자국이 가득했다.
‘레나가. 잘 처리해 줬지.’
회귀 전과 회귀 후가 그대로 이어졌는지, 세계선의 변동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하지만 단념하기로 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에는, 우선다른 할 일이 많다.
= 신경 쓰지 마라. 아무것도 아니야.
- 아. 예! 알겠어요. 혹시 말씀하실거 있으면 언제든 해 주세요.
= 그래.
치안관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루비아를 바라보며 묻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후우.”
루비아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치료하고. 쉬게 하세요.
그분들은 제가 면담하면서 조금이라도 보상해 줄 수 있는 게 있는지 알아볼게요.”
“다음은.
“이거. 에라스트가 완전히 망해버릴 뻔했네요.”
루비아가 중얼거렸다.
그녀를 살해하려고 한 남자, 커크자작은 도시를 착취하는 것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이렇게 운영하다간 삼 년은 고사하고 일 년 안에 도시가 엉망이 되어 버렸을 거다.
내가 토너먼트 때문에 방문했던 그때가, 어쩌면 앞뒤 안 가리는 흥청망청의 절정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힘껏 일해 봐야 이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커다란 두 개의 재난이 닥쳐오기는 한다.
첫 번째는 전쟁.
하지만 자유 연합과의 전쟁은 어떻게 이겨 낸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는 마왕 강림이다.
그건 절대로 에라스트 따위에서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다.
이런 작은 소도시 따위는 마왕의 발자국 한 번에 짓밟혀 멸망한다.
루비아 한 명만 데리고 도망치는 정도는 어떻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힘겹게 가꿔 온 도시가
파괴되는 모습을 보고, 루비아가 받을 충격을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지나치게 딴생각에 빠져 있던 탓일까.
묘하게 변해 있는 분위기를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영주님.
회의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뭐지?’
다들 온몸이 피곤에 절어 있으면서도, 루비아를 향해 감동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족스러웠던 건가.’
루비아와 그들이 정무 회의를 하는건 당연히 처음일 터.
그녀가 잘해 낼 수 있을지 중역들입장에서는 걱정이 많았을 게 분명하다.
아무래도 루비아가 그들의 걱정을 불식시키고, 기대보다 훨씬 더 잘해준 것 같다.
전 영주인 레이 커크가 지나치게 쓰레기인 탓도 있겠지만.
루비아는 훌륭했다.
회의 중간에 이것저것 끼어들어실시간으로 조언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사실 준비된 영주였다.
에라스트에 대한 분석이 예상보다훨씬 더 꼼꼼하고 철저했다.
무덤가에서 본 어리바리한 모습은 어디 버리고 왔는지 몰라볼 정도.
‘재능인가.
감격한 중역들의 기분.
충분히 이해한다.
- 쿵!
총관 노인이 큰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제일 감격했군.
심장 안에서 피가 요동친다는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은 꿇은 채였다.
“회의를 진행하면서. 돌아가신 선대백작님을 뵙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총관 일리아르, 영주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던 걸까.
다들 가슴에 주먹을 대고, 한쪽무릎을 꿇은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받아 줘. 충성 서약이다. 얼른.
- 네.!
루비아를 독촉했다.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다.
벌레 같은 인간들에게 능욕당하고 살해당한 채, 아무렇게나 버려져서 썩어 가는 것 따위가 아니다.
제자리를 찾은 루비아의 모습이 뿌듯했다.
“다들 일어나세요. 앞으로 좋은 영주가 되도록 노력하지요. 어려운 시기니까 많이 도와주세요.”
- 도와주실. 거죠?
= 나 없어도 되겠는데. 굳이 깨울필요도 없었던 거 아닌가?
- 그, 그런 농담은 심해요.! 정말 꿈같은 하루였어요. 정말 꿈 아닌거 맞죠?
루비아가 허공을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 묘하게 울 것 같은 표정을하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
?"아마도.
그때 였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루비아의 머리 위쪽에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오른 건.
[루비아의 호감도가 2 올랐습니다!]
[통치 레벨이 생성되었습니다.]
[현재 통치 도시 - 에라스트]
[통치 Lv.l]
[통치 레벨은 영지의 발전과 주위사람들의 신망에 따라 결정됩니다.
레벨이 올라갈 경우 다양한 효과가 부여됩니다.]
‘.시작인가.’
루비아의 에라스트 영주 생활은 오늘부터 다.
그녀는 옳은 일만 하고, 선정만 베풀게 해 주면 된다. 밝은 곳만을 걸어가게 할 생각이다.
지저분한 일들은 굳이 그녀에게 알릴것도 없다.
전부 다 내가 처리한다.
얼마 뒤 충성 맹세를 한 중역들이 물러났다.
총관 노인이 믿을 수 있다고 한 호위병들만 남아 그녀의 방 앞을 지켰다. 성안에 위협이 없다는 건 확인했다. 잠시 자리를 떠나도 괜찮을것 같다.
= 그럼 쉬라고.
- 어디. 가시는 거예요?
= 산책.
_ 아'?? 오늘 밤은 죽하 파티를 하려고 했는데.
아쉬운 기색이 완연하다.
= 축하 파티? 다들 물리지 않았나.
- 둘이서. 하려고 했죠!
둘이서 무슨 축하 파티를 하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말을 꺼내는 루비아의 심장이 두근거린다.
‘.호감도 때문인가.’
그녀와 함께한 세월 덕분이기는 하지만, 특전으로 얻은 호감도다.
어찐지 그녀를 기만하는 것 같아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금방 돌아온다.
레이 커크를 심문한다.
조금 지저분해질 수는 있지만, 사실처리하는 데 크게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다.
- ???네. 안 자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꼭 오셔야 해요!
나는 그녀를 놓아둔 채, 복도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성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 철컥.
적당히 챙긴 갑옷이 몸에 잘 맞지 않는다.
너무 큰 걸 챙겼는지도 모른다.
‘루비아가 사 줬던 게 훨씬 낫군.’
맞춤형 제작도 아닌데, 놀랍게도 루비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맞는 갑옷을 내게 사 주려 했었다.
눈썰미가 보통은 아니다.
레이 커크를 심문한 뒤 한 벌쯤그녀에게 갑옷을 부탁하고 싶다.
‘오늘 해 준 일이. 갑옷 한 벌 값은 되겠지.’
바깥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춥고 어두웠다. 칼바람이 불고 홍수의 흔적은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이런날씨에 루비아가 따듯한 곳에 있는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감옥까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야, 밖에 또 나왔어? 한 시간은 더 안에 들어가 있어야 되는 거아니야? 밖에 춥다.”
“어휴! 추운 게 낫지. 저 미친놈안에서 끙끙거리는 소리를 나보고 어떻게 들으라는 거야. 완전히 맛이가 버렸는데.”
감옥 앞에서 간수들이 수다를 떨었다.
누구 이야기인지는 명백하다.
- 픽!
바깥에 서 있는 간수들의 뒷목을 툭 건드렸다. 그들 모두를 간단히 기절시키고 안으로 들어선다.
- 끼이이익
“으어어어. 으어어.
과연 간수들의 말대로 안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죄수는 단 한 명이다.
나머지는 전부 죽였으니까.
레이 커크는 팔다리가 묶인 채 감옥안에 쓰러져 있었다.
포승보다도 공포와 불신이 그를 더욱강하게 묶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스르륵 열리는 문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저를.! 저를 구해 주러 오신겁니까.! 풀어. 풀어 주십시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런 식이라면 대화가 생각보다 훨씬쉽게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굳이 고문할 필요조차 없다.
그의 끙끙거리는 외침 외에 감옥안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이야기를 듣기 좋은 환경이다.
‘뭐부터 물어볼까.
목에 작게 그려진 지렁이가 신경쓰인다. 네크론에 관한 걸 물으면 언제든 눈멀고 시커먼 독사가 되어 레이 커크의 목을 물어뜯으리라.
오싹한 일이다.
네크론에 대한 정보를 누설하면 죽는다. 하지만 그 사실조차 회원들은 모르는 것 같았다.
‘입 무거운 놈들을 자체적으로 골라가겠다는 건가.
대신 다른 걸 들을 게 많다.
“뭘 좀 물어보지. 네크론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필요 없다.”
“아. 예! 예! 알겠습니다!”
“네가 어떻게 영주가 됐더라?”
“다,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도! 저도 제가 영주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
“아니라?”
“저에게 시키시지 않으셨습니까!
형을 죽였으니 영주가 되라고.!
다시 저를 살려 주십시오!”
‘누가 시켰다는 거지?’
녀석은 특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떠오르는 건 하나다.
‘황실이겠지.
“그래, 우리가 누군지 잘 알지?”
“예! 당연히.
그때 였다.
- 스숫!
단단하게 다져진 돌을 뚫고 바닥에서 날카로운 창날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