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83화 (183/458)

184화 루비아 (9)

“야, 다 비켜 봐.”

조각난 가면을 쓴 여자가 말했다.

주위에 서 있던 유령들이 일제히 두걸음 뒤로 물러났다.

조각난 가면을 쓴 여자가 한 걸음앞으로 다가왔다.

다섯 명이 두 걸음 물러나고, 한 명이 한 걸음 다가왔지만 아까보다훨씬 더 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특명인데?”

“그거야 물론 공작의 특명이지.”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큭.>

두 걸음 뒤로 물러난 유령 가운데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비웃음을 홀렸다. 비웃음은 전염된 것처럼 주위에 금방 퍼졌다.

흰색 가면을 쓴 다섯 명의 유령이 너도나도 킥킥대기 시작했다.

정면에 선 여자는 귀찮다는 듯이 길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공작? 어?”

분위기가 이상하다. 하지만 일단그냥 뻗대 보기로 했다.

“<소녀>공작이면 하나밖에 없지않나. 몰라서 묻는 거냐.”

팔짱을 낀 여자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내친김에 말을 계속이어 갔다.

“날 방해하고 있다는 걸 그분이 알면 너희를 바로 죽일 거다.”

“하하하하. 사칭을 해도 뭔.

여자는 가면을 벗었다.

가면 아래 무표정하게 굳어 있는 얼굴이 드러났다.

아무렇게나 묶은 회색 머리칼이, 붉은 눈빛이 드러났다.

눈 아래로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었다. 굳은 얼굴 곳곳이 묘한 음영을 만들었다.

“지금 사칭이라고 했나?”

“그래. 지금 누구 앞에서 그 망할<소녀>를 들먹이고 지랄이니.”

개인적인 감정이 너무나도 짙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건조한 붉은 눈빛의 여자가 계속말을 이어 갔다.

“우리는 내사과다. 그리고. 네가 방금 지껄였던 그 ‘소녀’분의 직속부하거든.”

후우, 하고 가볍게 한숨을 뱉은 여자가 긴 회색 머리카락을 풀어흩트리며 말했다.

“아주 불행하게도 말이지.”

- 피릿!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목덜미로 쇠사슬이 날아들었다. 뱀처럼 춤을 추는 쇠사슬을 피할 공간도 시간도 없었다.

- 좌라락!

간신히 팔을 들어 사슬의 진로에 가져다 댔다. 팔에 사슬이 촘촘히 감겼다. 조금만 늦었다면 투구째 목이 그대로 뽑혔을 게 분명했다.

‘결빙.’

팔에 묶인 쇠사슬에 하얀 서리가 서렸다.

‘뇌격.’

- 파지직!

하얀 서리를 타고 샛노란 뇌전을 쏘아 냈다. 팔 스스로가 매개체가 되어 환하게 반짝였다.

타격을 받을 때 쇠사슬을 당겨서 빼앗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쇠사슬을 잡은 힘이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 파직.! 파지직.!

뇌전은 여자의 진흥 장갑 끝에서 멈춰 허공으로 흩어졌다.

진홍색으로 칠해진 얇은 장갑은 뇌전뿐 아니라 쇠사슬을 타고 홀러내린 냉기까지 흩트리고 있었다.

“두 번은 안 통해. 마법사 사냥도 드문 일은 아니거든.”

- 화룍.

여자는 얇은 장갑을 낀 손을 살짝좌우로 움직였다. 뇌전도 냉기도 진흥색 장갑 근처에서 완전히 차단됐다. 아예 먹히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그 ‘소녀’랑 안 맞아서 짜증 나는데 여기서 내가 그 단어를 또 들어야 돼? 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리가 저번 생에 나를 죽인놈의 직속이었다니!

운이 지나치게 나쁘다.

우연일까?

아니다.

이런 수준의 존재들이, 남부 시골도시 에라스트에 와 있는 것부터가 절대로 우연일 리가 없다.

왜 그런 건지 알아내야 한다.

막막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는,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를 활용해야한다.

가장 강한 무기.

그건<회귀>다.

<정말 공작 각하의 명을 받은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없잖아. 이제 끝내자.”

“잠깐.”

붉은 눈의 여자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리며 나를 바라봤다.

“왜? 뭘 해도 여기서 부서질 건데 뭐 이렇게 미련이 많아?”

‘유령 내사과라고.

손안에 든 먹이라고 생각하는지 상대의 입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들은 다시 과거로 되돌아올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죽어도 하나라도 더 알고 죽어야 한다.

하다못해, 루비아를 한순간이라도 더 생존시키기 위해서라도 시간을 끌고 싶었다.

“너희 유령들에게. 일문일답을 제안한다.”

“뭐? 뭔 소리야?”

손가락으로 회색 머리카락을 꼬고 있던 여자가 피식 웃었다.

일단 아무렇게나 뱉어 버렸다.

하지만 이미 기호지세.

내친김에 끝까지 달려가야 한다.

“너희도 결국 정보기관 아닌가? 가치있는 정보들을 하나씩 교환하도록하자고.”

“하하하하.

<죽일까요?>

여자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거짓말쟁이 해골을 어떻게 믿고 그런 걸 하자는 거야?”

“너희가 손해 볼 건 없지 않나.”

회색빛 머리칼과 어울리지 않는 검고 얇은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동의하는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차피 여기서 날 죽이기로 마음먹었을 거다. 내가 회귀라도 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볼 손해는 없다.

“신뢰를 쌓는 차원에서 내가 먼저말하지.”

무기들이 나를 향해 겨눠져 있다.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면 곧 날아와 갈비뼈를 부수고 두개골을 반으로 가를 거다.

“네 달 후.<황제>가 남부를 순방한다.”

일부러<황제>라는 단어에 미묘한 악센트를 줬다. 레안드로 후작은 그가 <허수아비>라고 말했다.

눈앞의 여자가 뭔가 알고 있다면.

‘반응이 있겠지.’

“하핫. 뭐야, 이거. 끌리는데?”

여자의 얇은 눈썹이 한차례 더

꿈틀거렸다.

<과장님, 송구스럽지만 더 이상 말섞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즉시제거하라는 지침이.>

내사과장이 주위를 획 돌아보며 말했다.

“어이, 너희들.”

<네, 과장님.>

“니들, 다 이런 거 알고 싶어서 내사과 들어온 거 아니야? 내사과는 그런 곳이라고. 별거 별거 다 알아야돼. 졸리면 가면 벗고, 이 일 청산하든지. 듣기 싫으면 듣기 싫은 놈만나가.”

말이 빠르게 쏟아졌다.

“문은 저기야.”

부스스한 긴 회색 머리칼의 내사과 장이 감옥 정문을 가리켰다.

하지만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창끝에는 짙푸른 기운이 자루부터 빛나고 있었다. 나가는 순간밀고자가 되어 저 창에 꿰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좋아. 좋아. 그러면 이제 우리모두 공범이잖아?”

어두운 감옥 안의 분위기가 한층더 스산해졌다.

창에서 푸른 기운을 지운 ‘과장’이 나를 비스듬히 바라보며 물었다.

“황제가 순방해서. 다음은?”

감옥 안을 떠도는 공기가 칼날을 세우고 나를 둘러싼 것 같았다.

받아 낼 수 없는 압박감이었다.

“그 ‘황제’는. 허수아비다.”

일단 후작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내사과장이 목을 한 바퀴 돌렸다.

“허수아비. 허수아비.

레안드로 후작이 직접 한 말이니틀릴 리가 없다.

그럼에도 압박감을 견디고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그리 쉽지 않았다.

“꼭 틀린 표현은 아닌데, 조금 더정확히 말해 보지 그래?”

여자의 눈빛이 붉게 빛난다.

여기서의 대답에 따라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하고 살해당하느냐, 아니면 대화를 조금 더 이어 나갈 수 있느냐가 결정된다.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황제, 폐하, 만세.]

기스-제-라이의 손톱에 목이 그인채, 붉은 피를 흩뿌리며 죽던 은발황제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까지 황제에게 만세를 부를 허수아비지.”

“뭐. 그 정도면 정답에 가깝다고 해야겠네.”

여자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하다.

한 겹 한 겹 서늘한 공기가 주위에 쌓여 굳어져 간다.

하지만 이번 대화로 불티 몇 개가 허공에 튀어 올랐다.

살아서 도망갈 수는 없더라도.

다음 생에 활용할 정보는 될 수 있을 불티가.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계속 불을 지펴야 한다. 일방적인 질문 같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상대의 반응으로 나도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

‘일단은.

눈앞의 여자는 황실의 비밀을 꽤 깊은 수준까지 알고 있다.

다른 유령들이 움찔거릴 때에도 눈빛한 번 변하지 않고 똑바로 내 쪽을 바라본다.

“엠버의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가 황제를 살해한다.”

“호오.

처음으로 그녀의 눈이 크게 한 번깜빡였다.

붉은색 열은 눈동자가 호기심을 띠기 시작한다.

‘기스-제-라이.

그녀를 팔아먹을 생각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기서 죽는다면, 기스-제-라이는 어차피잿빛 기사에게 살해당한다.

붉은 회로가 흐르는 갑옷을 입고, 흐물거리는 공간을 뚫고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하지만 이들이 끼어든다면?

내가 정보를 홀려 훼방을 놓으면 어떨까.

황제 암살에 방해를 받은 그녀는 암살을 단념할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계획을 변경하게 되면, 기스-제-라이의 사망이라는 미래가 바1 가능성이 있다.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는 어쩌면 그 잿빛 기사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과를 바꾼다.

기스-제-라이를 살린다.

“이거 말 되는데? 연합과 엠버는 그게 가짜 황제라는 걸 모를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주위의 유령들을 둘러보며 여자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4검주나 2검주 같은 분은 적에게 포섭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정보가 밖으로 새어나가지를 않은 건가?”

<과장님께서 내사과를 잘 이끌어주신 덕분 아닙니까. 항상.>

“왜 아부를 떨고 그래? 내가 기분좋으면 꼭 한 사람씩은 죽이는 거몰라서 그래?”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기분 좋은데 말이야.”

내사과장의 목소리는 노래하는 것 같은 음률을 띠고 있었다.

조금 흥분한 듯한 색정적 울림이 답답한 감옥 안을 맴돌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럼네가 묻고 싶은 건 뭐야? 적당히 봐서 대답해 주도록 할게.”

한층 호의적인 태도였다.

물론 밖으로 보내 줄 기미는 없다.

“.너희 같은 강자들이 왜 이런시골에 와 있는 거냐.”

“상부 지침이라고. 황실 비역에서 내려오는 지침.”

가만히 있자 여자가 말을 이었다.

“국장 후보자들은 에라스트에서 필히 1년씩 근무해라. 수상한 게 등장하면 깔끔히 정리해라. 묻지도, 따지지도말고. 왜 이런 지침이 있는지는 나도몰라.”

황실의 지침.

‘설마. 내가 여기에 나타나는 걸 누군가가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단말인가?’

흠칫했다. 뼈 사이사이를 흐르는 공기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여자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 이제 ‘너’룰 정리해야지.

깔끔하게.”

“.현 영주는 어쩔 거냐.”

곱게 그대로 내버려 둘 가능성도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순순히 내두개골에 칼을 박는다.

이 세계선의 루비아가 편안하다면 그걸로 작은 위안은 된다.

“누가. 누가 영주 자리에 앉아 있건황실 방침에 협조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어. 그래서?”

“현 영주는 살려 줬으면 하는데.”

“그런가? 별로 걱정할 거 없어.

허수아비로 잘 써먹어 줄게.”

<과장님, 하지만 그것도 ‘신형’이 개발되면 끝 아닙니까?>

유령 한 놈이 끼어들었다.

문득 정신을 사각사각 갉아먹는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스쳐 갔다.

“너희가 키우는 애벌레를 말하는건가?”

“얘, 뭐야?”

<아니, 그걸 어떻게.!>

‘신형.’

잡아먹는 대상의 모습을 복제하는 커다란 애벌레.

챈들러가 와그작와그작 먹히는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루비아가 애벌레에게 먹히는 모습같은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도망친다.’

루비아를 데리고.

- 팟!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주먹을 휘둘렸다. 높은 랭크의 체술로 보정된주먹이 유령의 어깨를 때렸다.

‘냉기폭풍.’

가격과 동시에 손에서 얼음 바람을 뿜었다. 살상력은 약해도, 얼어붙은 유령의 몸이 순간적으로 느려졌다.

칼을 흡착으로 빼앗아 들고 옆에 있는 놈에게 휘둘렀다. 칼을 피해휘청거리는 사이 복부를 걷어찼다.

<끄헉!>

배를 받침돌처럼 디뎌 빠르게 여자에게 돌진했다.

‘검기.’

- 우우우우!

어느 때보다 필사적으로 검기를 칼날에 싣고 ‘내사과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럿과 싸울 때는 우두머리를 쳐야 한다. 일단 그녀만 제압하면 승산은.

“어이구.

회색 머리칼의 여자가 비뚜름히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럴까.”

- 차르륵!

소매에서 쇠사슬 두 개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튀어나왔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 치이이익!

산성 스킬로 검기를 강화해 베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튀어나온 사슬에도 푸른 기운이 맺혀 있었다.

내가 두 손으로 잡은 칼에 맺힌 기운보다 얇은 쇠사슬에 각각 맺힌 푸른 기운이 훨씬 더 짙었다.

“오러는 이렇게 쓰는 거다.”

- 콰광!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쇠사슬이 칼에 감기며 칼을 찢고, 온몸을 통째로 묶으며 바닥에 나를 강하게 구속시켰다.

“나도 듣는 귀가 신경 쓰여 더는 얘기 못 하겠네. 언제 어디서 도청되고 있을지 모르니까.”

- 달그락!

사슬에 맺힌 오러로 만신창이가 된채 억지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언데드 따위가.)

<방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끼긱!

- 끼긱!

갑옷을 뚫고 몇 개의 칼날이 몸에 더 틀어박혔다.

다리가 끊어졌다. 팔이 끊어졌다.

척추가 끊어졌다.

- 파삭!

빛살처럼 날아온 내사과장의 창이 두개골에 꽂혔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습니다.]

[체력이 20% 이하로 떨어집니다.]

- 파사삭! 파삭!

[체력이 5% 이하로 떨어집니다.]

두개골이 완전히 깨지는 소리가 아득하다.

세계가 까맣게 흐트러진다.

‘열 번을 넘게 회귀했는데.

첫날에 죽는다.

여러모로.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마지막까지 의식에 매달려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