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오래된 친구 (1)
- 우르릉! 광!
- 투두! 투두두두둑.!
<어젯밤>으로 되돌아왔다.
- 쏴아아.|
- 번쩍!
‘.하루.’
단 하루를 버티지 못했다.
곧바로 에라스트에 간 게 그렇게 잘못된 선택이었나.
루비아를 영주로 세우려 한 것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나?
너무 빠르고 허망하게 죽었다.
관을 박차고 일어날 기분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독촉하듯 반투명한 상태창이 허공에 빼곡히 떠오른다.
- 띠링!
[계승되었습니다.]
[특전 갱신!]
[네크로멘서의 연인플러스(new!)]
당신은 특정한 사령술사를 위해서 목숨을 세 번 바쳤습니다.
- 사령술사의 재능을 한층 강렬히 자극합니다.
- 사역 관계로 맺어진 사령술사의 네크로멘시 숙련도가 15% 빠르게 증가합니다.
나쁘지 않은 소득이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더발버둥 친 보람이 있었던 걸까.
띠링,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상태창들이 연달아 떠오른다.
서른 명 정도의 인간을 죽여 얻은 능력치가 스탯에 반영되어 있다.
힘 스랫과 민첩 스탯이 모두 80을 훌쩍 넘는다. 죽고 사는 걸 반복할때마다 끊임없이 올라간다.
이것만 목표로 끊임없이 회귀를 반복해 볼까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쓸 수 없다.
“망자여.!”
뼈마디를 때리는 빗줄기 사이로 루비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혹시라도.
내가 죽을 때마다, 지켜 주지 못한 그녀는 평행세계에 남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생 한생을 최후까지 버둥거릴 수밖에 없다.
최소한-
이 여자의 안정安定이 확정되는 순간까지 라도.
“내가 그대를 깨웠습니다!”
그녀가 다시 나를 부른다.
- 달그락.
“레이 루비아.”
“흐에에옛!”
- 덥석.
놀라는 것도 물론 모두 예측 범위안에 있다. 가볍게 손을 뻗어 뒤로 넘어지지 않게 잡아 준다.
하루 사이에 보는 그녀의 얼굴에 붉게 홍조가 들었다. 아무리 사령술사라고 해도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놀라 기겁해 도망치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제 익숙하다.
기본 특전으로 인한, 30이라는 높은 호감도가 주는 효과에도.
“어.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당신을?”
“선택. 지명. 아니, 깨웠어요!”
“고마워.”
- 번쩍!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커다랗게 떠져있다.
“그런데 제.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말을. 말을 할 수 있으신 거예요?”
놀람으로 가득한 눈빛 아래, 나에 대한 진한 호기심이 읽힌다.
“일단 가자.”
“앗. 네! 그럴게요!”
어디로 가자고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일단승낙부터 한다.
“이리로.”
“넵! 넵!”
루비아의 손을 잡고 동굴을 향해빠르게 걸어갔다.
아예 그녀를 안아 들고 빨리 움직일까 싶기도 했지만.
저번 생에서 하루조차 지켜 주지 못했던 주제에, 그런 일을 하는 건 어쩐지 망설여졌다.
손을 잡은 채 걸어갔다.
동굴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이 통하는 나를 보고 잔뜩 들뜨기라도 했는지, 루비아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바뀐 건 없군.’
예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저번 생에서 레이 커크를 죽이고, 영주를 루비아로 바꾸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대로다.
아버지가 살해당한 것도, 삼촌도 영주가 된 것도.
황급히 에라스트 밖으로 도망가야 했던 것도.
영주로 만든 것 자체는 ‘변경점’이 아니었다.
레나를 T&T 지부장으로 만든 뒤회귀 시점이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네크론 노예 수첩에서 ‘레나’라는 이름이 사라져 있었다.
루비아도 그런 과거의 개변改變을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 무슨 생각. 하세요?”
“글쎄.”
할 생각이 너무 많다.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는. 약해요.
“상관없다.”
“감사해요. 일어나 주셔서.
졸음이 묻어 있는 갈색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 툭 감긴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그녀의 몸이 어느새 스르륵 풀어진다.
‘잠들었군.’
어디로 가야 할까.
일단 에라스트는 아니다.
그곳에는 유령 중에서도 특별한 녀석들이 숨어 있다.
‘내사과랬나.’
붉은 눈동자의 그 여자는 황제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비역의 지침이라는 것.
무언가 나타난다는 것을, 그곳의 유령들은 알고 내려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설마 내 등장을 황실에서 알고 있었다는 건가? 대체 어떻게? 내가 뭐라고.!’
- 달그락.
고개를 흔들었다.
남부 시골에 저 정도 최정예 유령들이 박혀 있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황실 비역에 일개 해골병사인 나따위가 기록되어 있을 리가 없다.
‘우연의 일치겠지. 한데 그자들은 언제까지 여기 있는 거지?’
기억을 정리했다.
토너먼트에 참가할 때는 그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난동을 피우지 않고 가만히 왔다 가기만 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때라고 유령들이 에라스트에서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자신이 생길 때까지 확실히 회피지역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유령의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인 것 같았다.
특히 그 붉은 눈의 내사과장은, 적어도 후작에 근접하지 않고는 압도할 자신이 없었다.
‘너무 목표치가 높은데.
지금보다 서너 차원은 다르게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루비아를 에라스트영주 자리에 계속해서 올려놓는 건 불가능하다.
한창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들어왔군.’
동굴 입구 쪽에서 인간 두 명의 기척이 느껴진다. 나와 루비아가 있는 곳에선 한참 떨어져 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조금만 침착했어도, 쉽사리 길을 잃을 동굴이라는 건 알았을 거다.
하지만 바로 앞에 사냥할 수 있는 젊은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추적. 사냥.
어떻게든 루비아의 따듯한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
저들은 그것에 완전히 눈이 멀어미로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서로의 시체를 뜯어 먹다, 안에서 굶어 죽게 될 거다.
누가 먼저 상대의 등에 칼을 박아넣을는지 모른다.
벤슨 프레쳐가 전투력이 조금 더위다. 하지만 장전된 석궁이 먼저급소에 쏘아진다면, 누가 승자가 될지 쉽게 짐작할 수는 없다.
‘조금 도와줄까.’
- 팟!
“무슨 동굴이 이래. 이러다가 길잃는 거 아니야?”
“이렇게 날 고생시켰으니. 반항하면 눈알을 파 버려야겠어.”
“제대로 허리를 안 흔들면 아주 토막토막을.
“쉿.”
“쉿은 뭐가 쉿이야? 헤으웃!”
“히익! 히, 히이익!”
크라켄에게 흡수한 공포 스킬은 언제나 유용하다.
처음 날 봤을 때는 다짜고짜 망치부터 휘두른 벤슨 프레쳐가 꼼짝도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받아 쥐는 것처럼 무기를 빼앗고 프레쳐의 한 손을 망치로 으쨌다.
피와 뼈와 살이 분해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드러난 신경들이 동굴바닥에 눌어붙는다.
여유롭게 움직여도 도망갈 엄두는 내지 못한다.
- 퍽!
프레쳐의 발 하나를 으깬 뒤 석궁수의 손을 맞잡았다.
- 꽈?드득!
그리고 새끼부터 엄지까지 다섯 개의 손가락을 동시에 뒤로 완전히 접었다.
“끄헤에에에엑!”
좀처럼 듣기 어려운 진귀한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아주 깊은곳. 이들에게도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그런 곳에서 날 것 같은 찐득한 비명이다.
다행히 동굴 구조상 비명 소리가 바깥으로 나가는 게 다행.
경련과 공포로 몸을 바르르 떠는 두 남자를 놓아두고 적당히 겉옷와 무기 등의 아이템을 챙겼다.
“간다. 좋은 시간 보내.”
뒤처리는 서로 알아서 할 거다. 내가 더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
루비아에게 돌아왔을 때, 그녀는 돌바닥 위에서도 완전히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쌔근거리는 그녀의 숨소리에 조금은 안도감이 든다.
빼앗은 모피를 바닥에 깔아 놓고, 그 위에 가만히 루비아를 눕혔다.
- 화르르!
빼앗은 단검에 화염 검기를 발현시킨채 루비아 근처에 커다랗게 원을 그렸다.
배 주위나 하체 쪽은 조금 좁게, 머리 쪽은 조금 거리를 두고 바닥에 칼을 박았다. 그녀의 젖은 몸이 천천히 마르기 시작했다.
- 끼긱.
무리하게 화염 검기를 감당시킨탓인지, 단검이 급속히 파손되기 시작했다.
‘그냥 뼈에는 안 되나.
위험 부담은 상당하지만, 뼈 자체에서 불꽃은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면 검기는 어떨까.
하지만 결국 실패였다.
[검기 레벨 5 이상이 요구됩니다!]
[현재: 검기劍氣 Lv.3]
‘이건 안 되는군?
아쉬움이 느껴졌다.
‘후작을 한 번 더 흡수할까?’
그 루트로 가 볼까 싶었다.
하지만 그건 몇 개의 우연이 겹쳐 일어난 일.
후작이 황실에 반기를 들고 몰래살해당하며, 내가 트로핀 나냐우의 도움을 받아서 비밀 통로를 쓸 수 있어야 한다.
시도한다고 해도 당장은 아니다.
가만히 다음 선택지를 생각했다.
던전 정보를 얻어 강해지려면.
슬라임에게 가야 한다.
푸르손의 부하이긴 하지만, 그는 안전하고 확실하게 내 성장 루트를 계획해 줄 수 있다.
그의 성향은 이미 알고 있다.
친해지는 게 어렵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그 선택지는 나를 마왕의 휘하들에게 노출시킨다.
게다가 내 몸에는 루-륨 회로가 흐르고 있다.
말파스의 인장이 찍혀 있을.
슬라임은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큰선택지다.
‘기각’
두 번째는 T&T의 시조, 트로핀
나냐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비밀 통로를 보유한 데다가, 수는 적어도 멤버의 구성은 압도적으로 보였다.
예언자에다 마법사까지.
게다가 잠깐 본 것에 불과했지만, 나냐우 본인의 전투력은 내가 감히 측정할 수 없을 정도.
문제는, 그 녀석들도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처지.
T&T는 마왕 푸르손의 계파에게
이미 대부분이 점령당해 있다.
나냐우가 나를 좋아할지 어떨지는 차치하더라도, 그들이 제대로 된 세부정보망을 나에게 제공해 주지 못할가능성이 크다.
‘이것도. 일단 보류.’
곧이어 머릿속에 세 번째 선택이 떠오른다.
‘기스-제-라이.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는 분명날 좋아할 거라는 사실이다.
매우.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가 가진 <네크로멘서의 연인>
특전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의 성격과 맞물리면, 일단 가면 감당할 수 없다.
‘.살려야 하는데.’
만나긴 해야 한다.
정수 흡수라는 에픽 스킬을 내게 심어 준 그녀를 절대로 죽음 앞에 방치할 수는 없다.
황제 암살을 저지시키기고 그녀를 살리기 위해, <린트부름의 꿈>을 걸으라고 해 주어야 한다.
- 달그락.
하지만 고민은 점점 깊어진다.
강렬한 호감은 어떻게든 몸으로 받마"
낸다고 치더라도.
역시 걸리는 게 있다.
루비아다.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는 과연인간 여자인 루비아를 어떤 식으로 취급할 것인가?
‘?"무슨 짓을 해도 안 이상하지.’
자세한 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의외로 다정하게 대해 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지만, 기스-제-라이의
‘다정함’은 너무 해석이 다양하다.
기스-제-라이에게는 가더라도 나혼자서 가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
그라스미어!
무기의 도시 그라스미어.
지금은 그곳에 갈 수밖에 없다.
최소한 영주가 ‘먹히기’ 전까지의 1년 정도는 루비아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무기나 갑옷 같은 것도 취득하기 딱 좋다.
챈들러 가문의 약점을 알고 해결해줄 수 있다는 건 회귀를 하면서 얻어 낸 큰 자산이다.
그걸 활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어쩌면 루비아가 그곳에서 정치적지분을 1 수도 있을 거다.
벨-호멧-아이작.
녀석이 잠시 몸을 탈취하긴 하겠지만, <진명>을 찾도록 놓아두면 다시 역으로 가둘 수 있다.
‘나쁘지 않군.’
적어도 1년은 보장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