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오래된 친구 (2)
하지만 그라스미어로 가는 선택 역시 걸리는 게 있다.
챈들러가 날 환영할까.
그보다, 도시에 있기는 할까.
‘수행 중일 텐데.’
동방에서 돌아온 건지 아닌지도 알지 못한다.
일면식도 없다.
인간도 아닌 내게 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벨’호멧 아이작에게서 구해 준다고, 내가 먼저 말해도.
예전처럼 경계 없이 받아들일까?
누구나 자기실현적이다.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판단과 생각을 훨씬더 높게 평가한다.
환영받았던 이유는 그들의 제안을 내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연히 나와 마주친 첸들러.
그와 시선을 공유하던 대주술사벨’호멧 아이작이, 세계에 나가기 위한 첫 숙주로 나를 낙점하고 또다른 거짓 꿈을 챔들러 부자에게 주입했기 때문이다.
가서 빠르게 아이작에게 빙의를 당하고, 다시 한 번 놈을 봉인하는 방법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일단, 챈들러 부자와의 대면에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숨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루비아가 잠에서 깨어 하품하며 눈을 막 떴다.
촉촉하게 젖은 눈이 반짝거렸다.
꿈이 아니었구나, 라는 표정이다.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공포보다는 호감과 호기심이 어려 있다.
“우와. 따듯해요.”
“일어났나.”
“모닥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제 몸 주위로 신기하게 따듯해요.”
그럴 수밖에 없다. 바닥에 뜨겁게 달군 단검을 박아 넣었으니까.
덕분에 내구도가 반쯤 날아갔다.
“어떻게 이런 게 되는. 거예요?
불도 없고. 어. 모피는 어디에서 가져오신 거예요? 그것도 엄청.
보송보송해요! 와.
감탄이 이어졌다.
조금 으쓱해졌는지도 모른다.
“마법을 쓸 수 있지.”
- 화록!
단검에 다시 한 번 불꽃을 피워올렸다. 루비아가 숨을 들이켰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무슨 소리지?”
그녀가 진지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인다.
“죄송해요! 저는 마법사를 깨운 적이 없어요! 말을 할 수 있으신 것도 그렇고. 제가 아니에요. 음, 그러니까. 역시 제가 깨운 분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저는 아무것도 한게 없거든요.
빠르게 쏟아 내는 말에 당황했다.
“말이 통해서 싫은가.”
“아니요! 너무 부담스러워서.
가벼운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루비아가 말을 이었다.
“.저는 책으로만 배웠고, 처음.
처음 해 보는 거예요! 아무래도.
뭔가 잘못됐어요! 잘못된.
- 달그락.
어깨를 으쓱했다.
필사적으로 자기가 아닐 거라고 부정하는 루비아의 모습이 우습다.
하지만 저번에도 비슷한 모습을 봐놓고, 고작 하루 만에 부셔져 버린 나를 생각하면 순전히 웃음만 나오는것은 아니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나 보지.”
“재능. 이요?”
“그래. 처음 배운 거 맞아? 무덤위에 서서 날 부르는 태도가 무척익숙하던데.”
사실, 익숙한 것은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 자체다.
몇 번을 거듭 죽었는지 생각하면 죄책감이 올라온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루비아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날 보고 웃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요. 제가 무슨!”
“농담 아닌데.”
“진심이세요?”
재능이 있는 거라고 적당히 루비아를 납득시킨다.
물론 거짓말은 아니다.
수십 수백을 일으켜 제대로 관리도 못 하던 쓰레기 같은 마왕군의 네크로멘서들에 비하면, 내 곁에 앉아가만히 이야기를 나누는 루비아는 탁월한 네크로멘서다.
기스-제-라이의 말이 떠오른다.
<그녀에게. 사령술사의 재능이 있다는 거요?>
<그럼. 살아 있다면, 내 라인에 끼워줬을 텐데 아쉽게 됐어.>
‘나중에 기스-제-라이에게 가서.
분위기를 보고 소개를 시켜 주든지 해야겠군.’
멍하니 생각에 잠긴 날 바라보는 루비아와 눈이 마주쳤다.
“일단. 옷부터 살까요?”
“갑옷을 사야겠지.”
루비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맞아요! 갑옷이요! 어떻게 말씀드리자마자 바로 아시네요!”
물론 모를 리가 없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했던 이야기니까.
“그럼.
일단 유블람부터 들르기로 한다.
그라스미어까지는 하루 반이 꼬박걸린다. 루비아도 뭘 먹어야 하고 유블람 근처에서 챙길 것도 있다.
내가 의견을 개진하자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혼자 가서 얼른 갑옷을 사올게요!”
“나도 따라간다.”
“.네?”
[은신 Lv.6을 활성화합니다!]
[자취말소(C플러스)가 적용됩니다.]
= 이렇게 갈 거니까 상관없어.
저번 생과 비슷한 상황이 한 차례반복됐다. 능력을 드러내자 그녀는 거의 혼절할 지경이 되었다.
“저를 그냥 버리셔도 괜찮아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어요. 제가 너무. 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물론 둘다 틀리다.
루비아는 혼자서 절대 잘 살 수도 없을 뿐더러, 그녀가 할 일도 많다.
서번트 시스템의 특혜를 포기할생각은 조금도 없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도움이 된다.
“그럼 목표는 유블람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유블람에도 유령이 있는 게 아닐까?’
에라스트에서 워낙 황당한 일을 겪은 탓에, 도시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살짝 꺼려지는 감이 있었다.
하지만 저번에 유블람 경비대를 몰살시키고 들어갔을 때.
유령 따위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걸로 봐서 괜찮을 것 같다.
‘에라스트가 이상한 거야.’
그렇다.
에라스트가 이상한 게 틀림없다.
툭.
나는 바닥에서 캐낸 은괴들을 루비아앞에 던져 놓았다.
루비아는 뭐라 말도 하지 못했다.
눈을 깜빡이면서 입만 떡 벌리고 있었다.
“담아 줬으면 좋겠는데.”
“이, 이게. 이게 다.
“관리해 준다면 수수료는 나쁘지 않게 챙겨 주지.”
나쁘지 않은 수수료는 물론 은괴전액을 뜻한다.
돈 같은 걸 내가 갖고 있어 봐야 쓸모는 없다.
<어쨌건, 돈은 당신이 갖고 있으시오.
그게 돈이라는 걸 알아도 나에겐 쓸모가 없으니.>
처음 살아남았던 밤에 그녀에게 했던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앞의 루비아는 그때의 대화를 기억하지 못한다.
과거로 돌아올 때마다, 쌓아 나간모든 과거가 사라진다.
“제가. 이것들에 손대도 되는 건가요?”
“홈쳐 갈 텐가.”
“아니요! 저, 절대 아니에요!”
“뭐. 두 군데 더 있다. 훔쳐 가도 상관없으니 일단 정리해 두라고.”
“그럼. 이름 써 놓을게요.”
“이름?”
“해골님이라고 써 놓을게요. 나중에 제가 갖고 싶어서 모른 척할 수도 있는걸요.”
“모른 척하든지.”
“으웃.
두 군데서 더 은괴를 파냈다.
거미굴 가까이 있는 마지막 장소에서 은괴를 파내고, 이제 유블람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뭐지?’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거미굴에서 더 가까운 곳이다.
‘탐지.’
기척이 또렷하게 잡힌다. 위험한 상대는 아닐 것 같았다.
“루비아.”
“네!”
“거미 싫어하나?”
거미라는 말에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는.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은 기색이다.
‘굉장히 싫어하는군.’
“여기서 잠시 기다리도록.”
루비아를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한 번 당한 기억이 있으니 조심스럽게 주변을 탐지했다.
하지만 저 앞에 보이는 건 녀석하나밖에 없다.
게다가 주위는 황야.
위험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 팟!
곧장 한명의 인간이 땅을 파고
있는 곳에 접근했다.
놀랍게도 그곳에 있는 건 익숙한 인간이었다.
‘경비. 대장?’
유블람의 대머리 경비대장!
살해한 루비아를 달구지에 담아 버린 자들의 우두머리다.
뒤에서 봐도 머리가 벗겨진 모양새가 분명히 그자였다.
‘저놈이 왜 여기 있지?’
나는 은신 상태를 유지한 채 조심스럽게 놈의 뒤로 접근했다.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가 근처에 있습니다.]
[마스터의<복수>를 위해 상대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이 활성화됩니다.]
[은신 능력이 30% 상승합니다.]
‘나왔군.!’
시스템이 다시 등장했다.
몇 번 접하긴 했지만, 실전에서는 처음으로 제대로 효과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로 뒤까지 접근하는데도 경비대장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거 놀라운데.’
바로 근처에서 놈의 행동을 지켜보는데도 제 행동에 몰입하고 있을 뿐이다.
一 픽! 픽!
작은 손 삽으로 땅을 파헤친 뒤, 안쪽에 있는 상자에 무언가를 넣고 있었다.
- 번쩍!
작은 상자에서 비치는 것은 하얀은괴가 아니다.
누르스름한 금빛!
‘금괴.?’
크기는 작지만, 은과 금의 가치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회귀하며 알아낸 것은 세 군데의 은괴 매설 지점이다.
세 명의 행정관이 관리하던.
‘이건 놈만 아는 장소인가.
lkg 정도 되어 보이는 금괴들은, 놈 혼자만 아는 여기에 모아 놓고 있는 것 같았다.
‘작긴 하지만 금괴만 세 개라니.
거기에 금화까지 잔뜩.’
크지 않은 도시의 경비대장을 하면서 저 정도 돈을 모으려면, 대체 무슨짓을 해야 할까?
절규가 되풀이되어 칠해지며 금괴크기를 늘려 갔을 것이다.
“어이.”
“흐에에엑!”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경비대장이 칼을 뒤로 휘둘렀다.
추잡한 비명과 다르게 나름대로 깔끔한 일격이었지만, 내 수준과는 이미 너무 거리가 멀다.
‘흡착.’
“이익! 이이익!”
단검에 달라붙은 녀석의 장검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포.’
[마스터의 영역 아래 있습니다.]
[<복수>중입니다.]
[스킬 효과가 15% 상승합니다.]
버둥거림이 멎었다.
녀석의 몸이 즉시 굳는다.
‘.이렇게까지?’
잠시 상황에 대해 고민하다 다시 구덩이를 덮었다.
“걸어.”
등을 쿡 찔렀다.
굳어진 몸은 내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인다.
이자가 공포에 질려 있다는 건 사실꽤 우스운 일이다.
어차피 죽을 거다.
뭘 해도 죽인다. 이렇게 바르르 떨까닭까지는 없다.
굳이 유블람에 찾아갈 것도 없이, 이렇게 바깥에서 처리할 수 있다니 의외의 소득이다.
- 끼긱! 끼기기긱!
놈을 데리고 거미굴 안쪽으로 들어가자 거미들이 배가 고픈 듯 덤벼들기 시작한다.
[마스터의 영역을 벗어났습니다.]
[증폭 효과가 사라집니다.]
‘반경은. 이 정도인가.’
경비대장이 움찔거리며 흐끅대기 시작한다. 대충 거미들을 물리치며 안쪽으로 향했다.
우두머리에 먹일 생각이었다.
이놈 정도라면 우두머리에게 먹여야한다. 협곡을 지나 곧 거대한 거미와 마주쳤다.
- 키가아아악!
길이 4미터쯤 되는 거대한 거미가 보인다.
‘언제 봐도. 꽤 빠른데?’
하지만 아무래도 이동 수단으로 쓰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길들이는 건 차치하더라도.’
루비아와 함께할 때는 곤란하다.
이런 거미를 타자고 하면 심장에 마비가 오지 않을까.
대머리 경비대장이 살려 달라면서 곡꼭댄다.
물론, 새로운 금화 매립 장소를 알려준 걸로 녀석의 이번 삶은 제 역할을 다했다.
- 획!
빠르게 음직이는 웹슬링거에게 놈을 던졌다.
‘회귀하면서 너무 많이 죽였지.’
던전을 지키고 가만히 있는 거미녀석을 몇 번이고 죽였다.
마음에 품고 있는 미안함이 있다.
먹이 한 번쯤은 줘도 괜찮을 거다.
- 좌르록!
웹슬링거는 꽁무니에서 하얀 실을 뽑아내어 녀석을 칭칭 감아 버린다.
공포인지 뭔지는 몰라도, 입까지 감긴 유블람 경비대장의 눈에서 탁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때 였다.
- 키갸아아악!
웹슬링거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
“너, 지금.?”
먹이 하나를 확보했다고 달려드는 녀석의 모습이 황당하다.
“어딜.”
- 콱!
배 부분에 경비대장의 칼을 꽂아놓았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작은 칼이었지만 손잡이가 반쯤 들어가도록 꽂아 넣자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거대한 대검 같은 열두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느 것 하나로도 내 칼을 막지 못했다.
- 키갸악! 캬아악!
수십 개의 눈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어지럽게 돌아갔다. 배에서 새카만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상당한 크기의 상처이긴 하지만, 인간의 수십 배나 되는 부피로 봐생명에 위협은 없어 보인다.
- 키기긱!
고통에 차 비명을 지르던 거미는 어서 잊겠다는 듯 확보한 먹잇감을 향해 돌아갔다.
과 C
생생한 먹이를 진득하게 맛보며 고통과 두려움을 잊으려는 몸짓이었다.
촘촘한 이빨과 이빨이, 꽁꽁 묶인 유블람 경비대장의 머리 위로 느리게 닫혔다.
‘이만 물러날까.’
이 정도면 흡족하다.
거미굴의 보스를 혼자 잡는다는, 무리한 짓을 하다 놈이 죽었다는 그림이 그려질 가능성이 크다.
이빨 많고 눈 많은 저 아이까지 같이 죽이면 너무 의심스럽다.
제3자의 개입이 느껴지니까.
상처 하나 정도면 됐다.
‘이 아래는 바알의 제단이었나.
지금 괜히 뒤집을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조용히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