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86화 (186/458)

187화 오래된 친구 (3)

에라스트에서 워낙 황당한 일을 겪은 탓일까. 괜히 조금 긴장하며 거미굴바깥으로 나왔다.

물론 동굴 밖에는 아무도 없다.

다시 금화 상자를 묻어 둔 곳으로 걸어간 뒤 뚜껑을 열었다.

다른 세 곳의 은괴들을 전부 합한 수준이다.

이렇게 돈을 끌어모아 뭘 하려고 했을까 싶다.

상자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안쪽에 무언가가 들어 있다.

‘카드?’

상자 바닥에 새카만 카드 한 장이 보였다.

카드 위에는 오각별 하나와 함께 새하얀 글씨가 쓰여 있었다.

<흔들리는 세상, 당신을 위한 철제침대를 마련하세요.>

카드를 손으로 더듬었다. 오돌토돌한 재질이 느껴진다.

본 적이 있는 카드였다. 그라스미어에 방문했을 때, 진네이 유베라는 상인에게 받았던 카드다.

문구도 디자인도 같다.

그때를 회상했다.

<내가 속한 길드의 소개장이오.

고객의 바람을 어떻게든 해결해주려는 훌륭한 상인들의 모임이지.>

<별 하나로는 효력이 없어서. 그별 다섯 개를 모으시면, 그때부터 우리 고객이 되실 수 있소.>

‘별 하나.

유블람의 대머리 경비대장도 그수상한 ‘상인 모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상인 연합회원권을 사려고 했던 걸까?

카드를 품에 챙기고 금화 상자를 들었다. 모아 놓으면 어딘가 쓸모있을지도 모른다.

상인 연합에 속한 진네이 유베는 믿을 만한 인간으로 보였으니까.

그라스미어에 머무르고 있으면 또만나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에게 같은 카드를 받으면 가진

‘별’은 두 개가 된다.

나무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비아를 데리고 유블람으로 들어갔다.

이제 제법 익숙한 도시의 회색 성벽이 보인다. 성 앞에 넓게 펼쳐진 눈 덮인 밀밭을 지났다.

예전에 이곳으로 왔을 때와는 느껴지는 감회가 사뭇 다르다.

유블람은 더 이상 낯선 장소가

아니다. 뒷골목을 한차례 깊숙하게 누벼 본 데다 루비아를 저기에 혼자 보내지도 않을 거다.

은신으로 몸을 숨긴 채 루비아를 따라 들어갔다.

= 나는 이제 안 보일 거다. 말은 이렇게.

[은신 능력이 30% 상승합니다.]

반투명한 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은신 스킬이 한층 더 강화된다는 메시지였다. 다시 봐도 놀라웠다.

하지만 티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루비아에게 <의사소통>에 대해 교육했다.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놀라는지 이미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교육시키는 일은 예전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이루어 졌다.

‘아무리 봐도 재능이 있다니까.

루비아와 나는 경비병들을 향해느긋하게 다가갔다.

- 두근.

탐지 스킬을 쓰자, 경비병들의 목근처 경동맥이 뛰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예전에는 멀리 풀숲에 숨었다.

맞지도 않을 거리에서, 맞히지도 못할 실력으로 어설프게 석궁이나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르다.

바로 뒤에서 단검으로 목을 그을 수 있는 거리다.

비명도 못 지르고 절명할 거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한차례 경련하면서 그대로 숨어끊어지리라.

허튼짓을 한다면.

하지만 경비병들은 루비아를 보고 농담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저 귀찮다는 듯이 손짓을 했다.

“어. 들어가려면 들어가쇼.”

허무할 정도로 쉽게 그녀를 성문안으로 들여보냈다.

별 수상한 점은 느껴지지 않는다.

레나와 들어올 때도 별 특이점은 없던 녀석들이다.

이상한 점이라면 오히려 너무나간단히 검문을 마친다는 것.

여행자가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을 당하든 알 바 아니라는 방관자적태도인지도 모른다.

- 끼이익.

열린 성문 안으로 루비아가 들어갔을 때였다.

“여기가 유블람이구나.

루비아가 작게 중얼거리며 거리를 걸어갔다. 별거 아닌 거리를 생경한 듯 두리번거리는 모습이었다.

어지간히 평생을 책만 읽으면서 살아왔구나 싶었다.

어디로 가라는 둥 참견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내버려 뒀다.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 루비아는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어떤 것들이 엮여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생각할 때였다.

무척 피곤해 보이는 뚱뚱한 중년여인이 루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혼자 왔어요?”

“그런. 데요?”

수상한 녀석일지도 모른다.

여기서부터 납치가 시작되는 건가 싶어 칼을 뽑고 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푸석푸석한 얼굴의 여자는 가볍게 한숨만 뱉을 뿐이었다.

“후.

“왜 그러세요?”

“그대로 뒤를 돌아요. 자연스럽게 도시 바깥으로 나가도록 하세요. 여긴외지인이 올 곳이 아니거든.”

‘뭐라고?’

루비아를 걱정해 주는 인간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전에도 이뚱뚱한 여자가 나타났을까?

같은 경고를 들었을까.

“뭐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아가씨, 그냥 내 말 들어. 밖으로 나가야 된다니까.”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꼭 사야 하는 물건이 있어서요.”

루비아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오래 말 못 나눠. 빨리빨리 나가요. 난 분명히 경고했어.”

주위를 슬쩍 둘러보던 여인은 곧뒷골목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 경고를 들었는데. 이제 밖으로 나갈 생각인가.

루비아를 슬쩍 떠봤다.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그럴 리가요! 혼자가 아니잖아요.

무슨 일이 생겨도 절 지켜 주실 건데 제가 왜 도망치나요? 갑옷 사러가야죠.

- 해골님.?

나는 알고 있다. 루비아는 혼자 들어왔더라도 도시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무언가 양쪽에서 마음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경고를 듣고도.

내게 갑옷을 사 주고 싶은 마음에 여기 남았다가, 그런 비참한 일을 당한 것이다.

자괴와 비탄이 뼈 사이로 모래알처럼 흘러내렸다.

무슨 일 있냐고 묻는 루비아에게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천천히 거리를 걷던 그녀가 문득 나에게 말을 건넸다.

- 거리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요.

= 아편이다.

- 아편이요? 와.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요. 이렇게 옅은 달달한 향이라고 책에서 읽었어요.

- 정말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해골님은 아무래도 전생에 엄청난 분이셨을 것 같아요!

전생에 루비아를 지켜 주지 못한게 생각나서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있었다. 루비아는 잠시 침묵하더니 앞쪽을 가리켰다.

- 저기 있어요. 대장간.

그녀의 말대로였다.

바로 앞에서 깡깡거리며 망치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얼굴의 노인이 보였다.

‘또 만났군.’

아편에 중독되지 않은 눈동자와 흰수염을 가진 노인이었다.

레나와 함께 왔을 때, 우리들을 한 차례 유심히 훑어봤던 자.

<불>을 우리에게 건네줬던 노인이 망치를 두드리는 대장장이 근처에 서서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루비아가 대장간 진열대 근처로 다가갔다. 흰 수염 노인이 슬며시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뭘 사러 왔소?”

“갑옷 좀 보여 주실래요?”

그녀가 암살당한 에라스트 영주의 딸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꽤 호의적이었다.

“이쪽으로 오시겠소?”

그가 하나씩 물건을 소개했다.

‘이건가.,

진열장에 있는 것 중에 루비아가 샀던 갑옷을 곧 알아봤다.

오래 입은 갑옷이라 손쉽게 알아볼수 있었다.

“이게 딱 맞겠는데요?”

어김없었다.

그녀는 그 갑옷을 골랐다.

“크음. 비싼 건데 괜찮으시겠소.

나름의 역작이라서. 이 정도 되는 물건은 어디서 구하기 힘들 거요.”

“얼마인데요?”

돈은 넉넉하다. 아무리 비싸 봐야 은괴 하나만 족하다.

“홈.

머뭇거리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에게서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누군가가 당신을 지켜 주는것 같아.”

“그래요?”

확실히 감이 좋은 노인이다. 저번생에도 갑옷 안에 들어 있는 내정체를 알아챘다.

‘<불>을 만들어 낼 정도의 대장장이라는 건가.

“얼마에요?”

“150로티만 받지.”

150이라면.

내가 처음 루비아를 만났을 때 준금액은 72로티다.

전혀 액수가 맞질 않는다.

‘그때는 어떻게 샀던 거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루비아가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주세요.”

처음 보는 지갑이었다.

= .은괴를 내놓으면 넉넉할 텐데.

- 아니에요. 제가 억지로. 관에서 일으켰는데 제가 사야죠.

당황스러운 논리다.

- 여기선 제가 살게요. 앞으로 잘부탁드려요.

과거가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생각해 보면 눈앞에 놓인 갑옷은 이음새가 몹시 좋다. 72로티라는 돈으로 구할 정도는 아니다.

200, 300을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저번에도 자기가 샀던 건가.

생각해 보면 그녀 역시 영주의 딸.

에라스트에서 탈출하면서 비상금한 푼 갖지 않고 나왔을 리 없다.

그리고 그 비상금을 나를 위해서 아낌없이 사용한 거다.

“단검은 서비스로 주도록 하지. 품에 잘 안고 있도록 하게나.

‘몸을 조심하라는 건가.’

- 좋은 걸 싸게 산 것 같아요!

루비아가 기뻐했다.

- 당장 입혀 드리고 싶은데

= 여관에서 입자고.

노인을 흘끗 돌아보았다.

‘날 한 번 죽였었지.

<불>을 건네주며 일부러 사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루비아에게 잘해 주는 모습을 보자 한 번 정도는 봐줄까 싶었다.

그때 였다.

‘저건?’

철로 된 작은 검은색 통이 선반한구석에 놓여 있는 게 보였다.

그라스미어의 불이다.

‘집이 아니라. 여기에 보관하고 있는 건가.’

가게에 있을 때는 가게에, 집에 있을 때는 집에 보관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혹은 두 통을 가지고 있을지도.

어쨌거나 이건 압수다.

노인이 루비아를 보고 사람 좋은 척 웃음을 짓고 있을 때, 스리슬쩍흑철로 된 분사기를 빼돌렸다.

찰랑거 리는 감각이 틀림없었다.

‘적당히 희석해서 써야겠군.’

가져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3층짜리 흰 건물 앞에 멈춰섰다.

- 여관이. 여기 하나래요.

- 무슨 일 있으세요?

= 아니. 들어가지.

삐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여관 문이 다시 열렸다. 루비아가 혼자 들어갔던 여관이다.

레나와 올 때에는 주인이 바뀌어있었고, 루비아가 죽은 뒤로 한참 지났다.

지금은 루비아가 살해당했던 바로 그 시점.

성불구자인 여관 주인이 손님들을 팔아먹던 바로 그 시점이다.

“어이구, 반갑습니다. 어서 오십쇼, 손님. 짐은 제가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요.”

유블람에서 두 번째 보는 익숙한얼굴.

여관 주인이다.

그는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심한 멍도 들어 있지 않고, 귀에서 진득한 핏물도 흘러내리지 않는다.

살갑게 웃으면서 손님을 맞는다.

“아, 괜찮은데.

루비아가 갑옷을 안고 돌아선다.

그 순간 여관 주인의 눈이 뱀처럼 번뜩인다.

차갑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이 섬뜩할 정도다.

‘이런. 시선을 받으면서 여관에 들어왔단 말인가.’

“어휴, 손님. 마침 방이 딱 하나남았습니다요. 이리 오십시오.”

‘탐지.’

물론 거짓말이었다. 3층 건물의 방은 전부 다 비어 있었다.

그리고.

레나와 함께 올 때에는, 어렴풋이 밖에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명확하다. 지하에 꽤 큰 공간이 있는 게 느껴진다.

‘이번에는 꼭 확인해야겠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