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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88화 (188/458)

189화 오래된 친구 (5)

‘신의 축복이라니.’

속으로 피식 웃었다.

농담에도 정도가 있다.

이제 와서 내가 무슨 신의 축복을 얻는다는 거냐.

카르마 수치라는 것도 우습다.

여신이라는 것들은 인간을 이렇게 재단하는 걸까.

마왕들에게 인류가 짓이겨질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면서.

인간들에게 섬김을 받는 그녀들이 마물魔物인 내게 축복을 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뜨는 네크론 퀘스트는 꽤 반가웠다.

심문이라는 패시브 스킬도 생겼다.

고통을 가하면 진실을 들을 확률이 늘어난다는 우스꽝스러운 스킬이다.

하지만 유용성만큼은 확실하다.

고통을 가할 상대들도 많고 들을 이야기도 많다.

악의와 뒤틀린 정욕으로 가득 찬지하실을 한 번 더 둘러본 뒤, 문을 열고 1층으로 올라갔다.

여관 주인의 유서에 위치가 기록된수면제를 확보했다.

모두 가루 형태.

물에 타고 빵에 뿌리는 방식으로 쓴 모양.

발견하기 쉽게 여기저기 흩뿌렸다.

여관 주인과 세 경비들의 죽음을 인간들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이다.

에라스트에서 한 번 당한 뒤로는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방으로 올라가자, 루비아는 마치 겨울잠에라도 든 것처럼 세상없이 자고 있었다.

역시 단순한 수면제인 모양이다.

맥박은 평온하다. 탐지를 활성화한 상태로 빠르게 시간이 홀러갔다.

경비대가 여관에 쳐들어오면 모두 죽여야 할까? 아니면 그녀를 안고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 할까.

다행히 선택할 필요는 없었다.

≪으으음.w

루비아가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저. 어떻게. 된 거죠?”

나는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많이 피곤했나 보지.”

“그래도. 저 설마, 밥 먹다 잠든 거예요?”

- 달그락.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루비아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푹아래로 숙인다.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있다.

“얼마나. 잤어요?”

“별로 오래 안 잤어.”

“하지만 아까는 아침이었는데.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다섯 시간 정도.”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간지는, 가만히 곁에 있던 나도 몰랐다.

<서번트 시스템>의 능간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더 자도 되는데.”

“아, 아니에요!”

루비아는 눈을 수줍게 깔았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아무 일도.”

방으로 몰래 들어오려는 경비 셋을 살해한 뒤에도 별일은 없었다.

경비대장이 있었다면 대처가 좀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화 상자와 함께 오각별이 새겨진 ‘카드’ 한 장을 남긴 그는, 이미 거대 거미의 뱃속에서 잘 소화되었을 거다.

‘꽤 꼭꼭 씹던데.

금방 소화되었으리라.

당장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거리 곳곳에서 달달한 아편냄새가 풍겨 오지만.

유블람은 평안하다. 적어도 지금의 나와 그녀에게는 그렇다.

“옷이나 사러 가지.”

루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옷. 이요?”

고개를 끄덕였다. 흙은 털어 냈지만, 산에서 도망치느라 곳곳이 험하게 찢긴 스커트가 눈에 들어온다.

“갑옷은 네가 샀으니까.”

“허리는 남는데. 가슴이 너무 꽉끼네요.”

옷가게 주인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루비아를 보며 말했다.

“이걸 입으셔야 될까.

“아니야. 이것도 가슴이 너무 꽉끼겠는데요.”

- 저

루비아가 빨개진 얼굴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 뭐지?

- 밖에서. 기다려 주실래요?

왜 가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가게 밖으로 슬쩍 빠져나갔다.

삼십 분이 지났다.

‘도대체 뭘 얼마나 사는 걸까?’

한 시간이 지났다.

가게를 그냥 다 사 버리려는 걸까?

옷 사라며 은괴 하나를 건네줬다.

혹시 그 금액을 맞춰서 다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다시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와. 정말 잘 어울리시네! 이게 딱이야! 딱!”

그녀가 호들갑을 떠는 점원과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얼굴이 약간 상기 되어 있었다.

이상하다.

전혀 지친 것 같지가 않다.

나는 반사적으로 루비아의 스탯을 확인했다.

‘체력이.

분명히 낮다.

스탯에는 변동이 없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저 긴 시간을 옷을 고르며 버틸 수 있었던 걸까.

- 저. 괜찮나요?

루비아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회색 로브 대신, 흑백 무늬의 편한 활동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확실히 색다르다.

살짝 묶은 진흥색 띠가 잘록한

허리를 부각시키고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 주고 있었다.

움직이기 편하게 머리를 고정한 장신구도 잘 어울렸고, 옷 곳곳에 있는 무늬들도 훌륭하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게 있었다.

두 시간이 넘게 기다렸는데.

왜인지 그녀의 양손이 텅 비어

있었다.

= 설마 한 벌을 산 건가? 두 시간동안?

- 어. 한 벌 더 사야. 하나요?

이거 안 어울려요? 그럼 다시.

루비아가 섬뜩한 소리를 뱉어 냈다.

나는 당황해서 급히 수습했다.

= 아니. 그러니까, 지금 옷이 딱좋은 거 같아서. 진심이다.

- 정말요? 감사합니다! 전부 해골님덕분이에요! 정말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를 수 있었다니까요.!

‘큰일 날 뻔했군-

활동복을 입은 루비아는 한층 더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걸어갔다.

처음부터 신발도 훨씬 걷기 편한 걸로 맞춘 상태였다.

“같이. 산을 걸으니까 좋네요!”

누가 본다면 미친 여자가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일 거다.

물론 주위에는 아무도 없지만.

내 탐지 스킬은, 비활성화 상태에서도 반경 30미터 정도는 언제나파악하고 있다.

“그라스미어에 가는 거죠?”

“어딜 좀 들렀다가.”

“좋아요. 모닥불 피우고 야영해도 될까요? 아니, 겨울에 불을 피우면 위험하니까.

루비아가 혼자 신나서 중얼거린다.

“야영은 없어. 위쪽에 산장이 있다.

거기서 잔다.”

“와! 산장까지.!”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산장.’

물론 캠프 기분을 내기 위해 가는건 아니다. 그곳에서 캐빈 애슈턴의 책을 확인해야 한다.

단순히 지혜가 1 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번 생에 그 책이 무언가

‘다른’ 걸 보여 주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캐빈 애슈턴.

죽음을 거듭할수록 점점 더 신경쓰이는 이름이다.

<등불>달리아크에서는 아예 캐빈애슈턴에 관한 정보 제공을 단칼에 거부했다.

레안드로 후작에 관해 기사를 쓴, 제국 황색지 발행인의 이름도 캐빈애슈턴이었다. 흔적을 따라가 볼가치는 충분히 있다.

한참을 걸어갈 때였다.

“어? 늑대 울음. 아니, 신음 소리같은 게 들려요!”

- 크르릉.

루비아가 조금 더 잘 들으려는 듯 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물론, 나는 이미 한참 전부터 그신음 소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 길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 중하나다.

“저기! 저기!”

루비아가 앞쪽을 가리켰다.

눈처럼 새하얀 털의 늑대가 한쪽앞발을 뻗은 채 바짝 엎드려 있다.

시커먼 덫에 당해 고통스러운 듯 쌕쌕거리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하루>를 더 굶어서일까.

예전에 봤을 때보다도 더 힘없이 축 쳐져 있다.

내가 함정을 망가뜨리지 않은 미래에서, 트롤을 잡은 사냥꾼들은 새끼늑대 따위는 무시했으리라.

‘죽이지도, 풀어 주지도 않은 채로 그냥 방치한 건가.

그렇게 굶어 죽었을 거라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온다.

“크르르.! 크르. 르.

제대로 짖을 힘도 없어 보인다.

녀석이 버둥거리거나 경계할 틈도 없이 빠르게 접근했다.

- 철컥!

강력 스프링으로, 꽉 물린 쇠덫을 손가락 두 개로 풀어 버렸다.

“크. 크으응?”

새파란 눈을 깜빡이면서 날 올려다보는 녀석을 몇 번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갈기의 느낌이 좋다.

“왜? 상황 파악이 안 돼?”

- 꾸득! 꾸드득!

푼 덫을 손가락뼈 두 개로 아무렇게나 접었다.

한 번을 접고, 다시 두 번을 접자 덫으로서의 기능은 물론이고 외형이 엉망이 되어 버린다.

“와아.

어느새 따라온 루비아가 곁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감탄하고 있다.

늑대를 구해 준 게 마음에 들었던 건지, 우습게도 호감도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수통에 담긴 물에다 육포를 적셔먹이자, 작은 주둥이를 오물거리며 귀를 종긋 움직인다.

“귀엽네요.”

루비아가 옆에 서서 가만히 늑대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제 이런 데 걸리지 말고.

다 먹은 녀석의 엉덩이를 손으로 톡 두드렸다. 밤톨이가 움찔거리며 숲 쪽으로 튀어 가기 시작했다.

함께할 생각은 없다.

하얀 털을 가진 고고한 늑대답게 산에서 혼자 잘 살아가길 바란다.

가던 녀석이 흘끗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냄새라도 기억하려는 것처럼 몇 차례 쿵쿵거린 뒤 멀어진다.

“혹시. 구면이세요?”

너무 자연스럽게, 늑대와 대화하는 내 모습이 의아했던 걸까.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글쎄. 가자고.”

하얗게 쌓인 눈 위에는 아직 녹색핏자국이 많이 남아 있었다.

끊어진 철사와 부러진 나뭇가지가 곳곳에 보인다.

“사냥의 흔적이군.”

“사냥이요? 트롤이 죽은 건가요?”

조금 놀라서 루비아를 돌아봤다.

“어떻게 알았지?”

“책에서 읽었어요. 초록색 피를 가지고, 함정에 걸린 상태에서. 이정도 난동을 피울 만한 몬스터라면 설원 트롤 아니에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트롤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루비아는 공포에 질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갖고 있는 지식은 분명히 거짓은 아니다.

“맞아. 잘 알고 있군.”

“감사합니다! 저, 제가 해골님을 깨웠으니까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살아갈 거예요.”

루비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상한 곳에서 책임감이 발동한다.

“아. 으음.

적당히 얼버무리고 주위를 살폈다.

처음 트롤에게 살해당할 때보다

‘하루 뒤’에 왔다. 이미 트롤 사냥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시점.

‘정확하게. 반복되는 건가.’

내가 개입하지 않은 일들은 그대로 쳇바퀴를 돌고 있다.

“일단 가자.”

“맵!”

산길은 적막했다.

사냥꾼 따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저번에 왔을 때 트롤에게 갈가리찢긴 사냥꾼들은, 잔뜩 투창을 박은 트롤을 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마을에서 파티라도 열고 있을 거다.

산장은 며칠 비어 있을 테고.

한참을 더 걸었다.

걸릴 만한 것들을 앞에서 치우면서 가기는 했지만, 루비아는 성큼성큼걷는 나를 의외로 잘 따라왔다.

해가 졌다.

바람이 완연히 얼어붙기 시작했을 때였다.

“죄송, 죄송, 해요.

- 털썩.

루비아가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음.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힘들면 이야기를 해라.”

“하, 하지만. 버릇.

“버릇?”

“이러면 버릇 들어 버려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건싫다는 건 아닌 것 같다.

“이러려고 소환한 게 아닌가?”

나는 가볍게 루비아를 안아 들었다.

여기서 자는 건 무리다.

w ㅇ n

ㅈ.?

루비아는 눈을 꼭 감았다. 뭐라고 반박을 하려는 듯 입이 작게 오물거리다가 다시 닫힌다.

“할 말이라도?”

“아니요. 없는데.

가볍게 부는 바람에, 긴 갈색 머리카락이 내게 감겨든다.

- 팟!

질주를 쓴 채로, 산 정상을 향해내달렸다.

한층 빨라진 느낌이 든다.

달리는 상태 그대로 상태창을 열어확인했다.

[서번트 시스템]

[스탯이 상승된 상태입니다.]

‘루비아 때문이군.’

스탯이 전반적으로 오른 덕분이다.

땅을 박차는 기본 힘이 상승하니 질주 속도가 빨라진 것.

루비아를 안고 달린다는 패널티를, 훌쩍 상회하고도 남는 상승 폭이다.

옆으로 싁싁 지나가는 지형지물이 더 쏜살같이 느껴졌다.

‘며칠 비어 있을 테지.

산장에 도착한 건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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