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89화 (189/458)

190화 오래된 친구 (6)

“루비아?”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있다.

아직도 달리는 거라고 생각하는지, 내 팔을 잡은 손에서 힘을 빼지 않는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도가 신경쓰인다.

“다 왔는데.”

“후우. 죄송해요. 좀 놀랐거든요.”

루비아는 약간 떨리는 어조로 말을 뱉으며 내 팔에서 내려왔다.

장애물 같은 건 닿지 않게 하면서 빠르게 왔는데, 정상까지 순식간에 질주한 속도 자체가 그녀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

“정말 이런 산장이 있네요. 그런데 잠겨. 있는데요?”

“열면 돼.”

- 투둑!

강철 자물쇠를 수수깡처럼 손으로 뜯고 안으로 들어갔다.

“헛.!”

“자물쇠가 좀 약하네.”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다.

나는 이미 순수한 힘 스탯만으로 오우거를 가볍게 제압할 수준이다.

- 끼이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등불을 켰다.

일렁이는 불빛에 커다란 트롤 박제가 비친다. 루비아가 깜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시체다. 죽어 있어.”

“아아.

잠시 신음을 홀리던 루비아가 말을 잇는다.

“박제. 네요. 여기 사냥꾼들이.

저렇게 한 건가요.”

“그래.”

“트롤은 꼭 한 쌍이 함께 산다고 하던데요. 혹시. 암컷은.

흘끗 루비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우둔하지 않다. 이미 암컷이 어디있는지 짐작하는 눈빛이다.

내 침묵에도, 그녀는 스스로 답을 찾는다.

“아까 거기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트롤에게 감정이입이라도 하는지, 루비아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화르륵!

벽난로 불씨를 피웠다. 산장 안이 한층 밝아졌다.

이번에는 피 냄새는 나지 않았다.

트롤 수컷을 사냥한 건 꽤 오래전일인 것 같았다.

“2층으로.”

피와 내장을 빼고, 솜을 채운 뒤얼기설기 철사로 엮은 트롤 시체를 루비아와 함께 둘 생각은 없다.

“.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곁에 바싹 붙어서 나를 따라온다.

2중으로 된 창문을 열자 시원한 공기가 들어온다.

“하아.

루비아가 숨을 내쉰다.

팽팽히 당겨졌던 신경이 조금 풀린 모양이다.

그녀가 침대를 짚으며 말했다.

“여기 누워서 밖을 보면 별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일 것 같아요.”

“마음에 드나.”

“네.! 산 냄새가 확 들어와요.”

루비아가 원하면 며칠 더 머물러도 별 상관은 없다.

사냥꾼들이 다시 올라오기 전에, 기척을 탐지하고 떠나면 그만이다.

아니면 올라오는 것들을 그냥 다죽여 버리면 끝이기도 하다.

눈을 깜빡이며 침대에 앉아 있는 루비아를 바라보다, 원래의 목적을 떠올린다.

‘여기 그대로군.’

침대 옆 협탁.

가지런히 놓인 캐빈 애슈턴의 책이 보인다.

<당신이 트롤을 죽이고 싶다면>

다시 첫 장부터 페이지를 펼쳐 갈때였다.

“해골님. 뭘 보시는 거예요?”

루비아가 곁에 다가와 책을 흘끗거렸다.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시선이 묘했다.

매번 내가 중간 부분을 다 읽기도 전에, 그녀의 시선은 이미 페이지 끝에 가 있었다.

넘기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한 번 꼼꼼히 읽은 책이라서 속도가 꽤 붙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놀라운 상황이다.

고개를 돌려 루비아를 바라봤다.

“속독이라도 익혔나?”

루비아가 입술을 살짝 말았다.

“앗. 들켜 버렸네요. 책을 좀 빨리읽기는 해요.”

“지루하겠군.”

루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같이 읽는 분이, 어디를 읽고 계신지 생각하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다고요. 게다가.

그녀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어릴 때를 제외하면, 책은 항상혼자서만 읽어야 했거든요. 이렇게 같이 책 읽는 걸 꼭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영주의 딸치고 터무니없이 소박한 희망이다.

들어줘도 상관은 없다.

“그런데.

“뭐지?”

“아, 네. 아까 흘끗 봤는데, 혹시작가가 캐빈 애슈턴인 건가요?”

- 달그락.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멈췄다.

“앗, 혹시 제가 뭔가 실수라도.r

“아니.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캐빈 애슈턴을 알고 있나?”

루비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럼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예요.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사실 그 사람책을 한 권밖에 안 읽었지만요.

<시간의 틈바구니에 갇힌.>”

“천재 대마법사?”

내가 루비아의 말을 받았다.

“헉!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루비아가 숨을 들이켰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라서.

그자의 책을 다 읽는 걸 목표로 삼고있지.”

좋아하는 건 몰라도.

뒤의 이야기는 진심이다.

캐빈 애슈턴에 대한 내 호기심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세상에.

“저희는 취향이 정말 비슷하네요!”

루비아가 방긋 웃었다.

“그래서. 제가 엄청 약한데도.

소환되어 주신 건지도 모르겠네요.

감사드려요.”

언젠가 에라스트 서고에 들어가서, 방금 루비아가 말한 책도 찾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유령 <내사과>가 지키고 있는 그 도시에 직접 가기에는 몹시꺼려지는 게 사실.

‘그런데, 캐빈 애슈턴이 루비아가 좋아하는 작가라니.

생각에 빠져 있는 나를 바라보며 루비아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저도 캐빈 애슈턴이 쓴 작품을 다읽어 보고 싶어요. 다른 이름으로 쓴 작품들도요.”

“다른 이름.?”

“네. 계속해서 필명을 바꿔 가면서 쓴다고 하더라고요.”

슬라임에게 그의 책을 빌리며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름을 계속 바꾸는 성격이라서, 캐빈 애슈턴이라고 말하면 모르는 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또. 뭐가 있는데.’

다른 누군가에게 비슷한 이야기를들은 적이 있다.

‘이름을. 계속. 바꾸는.

기억을 차근히 되짚어 갔다.

분명히 떠오르는 게 있었다.

기스-제-라이와의 대화.

<제대로 된 마법사는 딱 하나야.

그년 말고는 없어.>

<이름 바꿔 가면서 노는 또라이 같은 년 하나 있어. 누가 확 찔러서 시체로 안 만들어 주나? 그럼 내가 나긋나긋하게.>

‘그게 설마. 캐빈 애슈턴인가.’

그때는 짐작도 하지 못했었지만.

기스-제-라이를 만나서 물어봐야 할 게 생겼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별로.”

“궁금한데. 흐응. 이 책이 여기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예언 능력이다.”

“예언. 이요?”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어떤지, 루비아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그럼 제 운명도 예언해 주실 수 있는 거예요? 알고 싶어요!”

“일단 이것부터 읽자고.”

곁에서 눈을 깜빡거리는 루비아를 외면하고, 다시 트롤에 관한 책을 펼쳤다.

루비아는 내가 신기한 듯, 곁에서 먼저 빨리 읽고 남는 시간은 책을 읽는 나를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신경 쓰인다고 말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내버려 두고 책을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을 때였다.

“깨진. 조각들과 접촉할 것? 이게 뭘까요? 책에 이런 내용은 없는데.”

고개를 돌려 루비아를 바라봤다.

“동방어도 읽을 줄 아나?”

“네. 조금은요. 그냥 배워 봤어요.”

“놀라운데.”

“하핫. 별거 아니에요. 해골님이 훨씬 더 대단하신걸요.”

“별로.

책을 덮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지혜가 1 올랐다는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역시 다시 읽어도. 오르는 건가.’

하지만 동화율은 떨어지지 않았고, 깨진 조각들과 접촉하라는 마지막문장도 예전 그대로였다.

알아보기 쉬웠다.

세계가 흔들리거나, 글씨가 ‘일그러져’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미묘하게도 문장 아래 적힌 숫자가 달라져 있었다.

<2/7>

‘늘어. 났어?’

분명하다.

전에 봤을 때는<1/7>.

숫자가 하나 늘었다.

누군가 숫자만 바꾸고 갔을 리는 없다. 애초에 수정한 흔적조차 전혀없는 문장.

“루비아.”

“네?”

“이 글자가 보이나?”

나는<2/7>을 가리켰다.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2. 7 이라고 쓰여 있네요?

이게 뭘까요?”

나에게만 보이는 숫자는 아니다.

루비아가 이 숫자를 읽는다고 생각하자, 어쩐지 고립되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겠군.”

“흐음. 깨진 조각이 일곱 개라니생각 좀 해 봐야겠네요.”

“일곱이라는 숫자에 대해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나?”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지개나 별자리, 혹시 요일을 말하는 걸 수도 있죠. 주사위의 마주보는 숫자도 일곱. 7대 죄악이나, 그걸 관장하는 악마도 일곱이에요.

동방에서는 일곱 명의 무사가 용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루비아의 말을 쭉 들어도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건 없었다.

무엇보다 숫자가 왜 하나 더 늘어났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여기서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겠군.’

캐빈 애슈턴의 책을 챙기고 휴식을 취한 뒤 루비아와 산을 내려갔다.

곧 높다란 이중 성벽으로 보호된그라스미 어 가 내 려 다보였다.

해자는 여전히 깊고 넓다.

‘저건 못 뛰어넘겠군.’

숨어들면 간단하지만, 일단 성문은 열려 줘야 한다.

저번에 왔을 때와 달리 그라스미어근방 산길은 조용했다. 여행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저 멀리 가도에서 상단이 접근하고 있었다.

“조금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지.”

“네, 그게 좋겠어요.”

아직 전쟁 직전은 아니라서인지, 경비는 저번보다 덜 삼엄해 보인다.

성벽 위로 거대한 발리스타가 나타나는 일도 없었다.

루비아는 손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도 몸을 숨기고 루비아를 따라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얼굴이군.’

처음 그라스미어에 들어갔을 때, 내 출입을 보증했던 감독관이 보인다.

근무가 지루한 듯 스트레칭을 하며 한가한 표정을 짓고 있다.

녀석의 얼굴을 보자 그라스미어가 한층 친숙하게 느껴진다.

전혀 유해해 보이지 않아서일까.

루비아는 상인들 틈에 섞여서 딱히 취조도 없이 통과됐다.

- 깡! 깡! 깡

“전쟁이 일어난다면서?”

“이미 황실에서 엄청나게 주문을 했다는구만.”

“그래서 이렇게 발주가 많나.

“벌써부터 아주 어수선하잖아.”

대장장이들이 망치를 두드리면서 나누는 대화가 모두 파악된다.

탐지 영역 안이긴 해도, 루비아가들을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그녀는 살짝 입을 벌리고 주위를 돌아보고 있다.

- 와. 도시가 정말 커요. 사람도 굉장히 많네요.

제법 들떠 보인다.

- 그냥 여기 앉아서 사람 구경만 해도 시간 잘 가겠어요. 여기가.

책에서만 보던 그라스미어네요.

= 다른 도시를 아예 안 다녔나?

- 그게. 어릴 때 다리에 병을 앓았거든요. 꾸준히 치료는 받았는데.

몇 해 전에야 나아서 제대로 걸어다닐 수 있게 됐거든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 이제 무기를 살 생각이신가요?

= 구하기는 해야겠지만. 일단은 여관부터 가자고.

루비아는 다른 곳에 놔둬야 한다.

그라스미어 영주 부자를 만나는 건 혼자 할 생각이다.

이야기가 잘못될지도 모르고.

‘잘된다고 해도.

아이작을 봉인하기 전까지, 놈이 내 몸을 점거하는 시기가 있다.

그때 그가 루비아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 여기 지도가 있어요!

루비아는 곧 사거리 한복판에 놓인도시 지도를 가리킨다.

방문객이 많은 도시인 만큼, 이런시설이 잘되어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지도에는 여관이 특히 잘 보이게 표시되어 있었다.

‘어딜 가지.

예전에 왔을 때는<먼 숲 엘프>라는 여관에 묵었다.

챈들러와 레나가 전세를 내고 날기다리고 있던 곳이다.

이번엔 다른 데를 가 볼까 생각할때였다.

- 여기가 제일 가깝네요?

루비아가 한 곳을 짚는다. ‘붐비는 선인장’이라는 이름의 여관이다.

‘여기는.

진네이 유베라는 남자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붐비는 선인장’에 묵을 생각이오.

혹 필요한 게 생기거나, 내키신다면 언제든 들러서 ‘바토 시마’를 찾아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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