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90화 (190/458)

191화 오래된 친구 (7)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다.

나와 연을 맺고 싶다며<카드>를 건넸던 인간.

혹시, 붐비는 선인장에 지금도 머무르고 있지는 않을까?

‘언제든 들러 찾아 달라고 했지.’

그라스미어에서 일종의 거점으로 쓰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 좋아. 붐비는 선인장으로 가자.

- 어, 정말요? 제가 찍어서 그런 거면 꼭 여기가 아니라도 괜찮아요.

= 그런 건 아니고.

루비아가 붉어진 양 볼을 손으로 감쌌다.

괜히 민망하게 만든 것 같다.

- 그럼. 갈게요.

고개를 푹 숙인 그녀가 성큼성큼앞으로 걷는다.

그녀에게 따라붙으며 생각했다.

‘흐음.

진네이 유베가 지금도 그 여관에 머물러 있다면.

그자에게 루비아의 신변 보호를 잠시 맡기면 어떨까?

오래는 아니라도.

아이작을 다시 봉인할 때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초면인 주제에 그런 부탁을 한다는게 황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네이 유베는 ‘유능함’에 매우 끌리는 인간이다.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기계공학에 관한 지식을 보여 주자 눈빛을 반짝이며 친해지려 했다.

굳이 기계공학은 아니더라도.

검기나, 마법 같은 능력을 보이면 틀림없이 호의적인 반응일 거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생에서 간접적으로 접한 바로 추정하자면 상당히 신뢰할 만한 인간.

마침 ‘카드’도 하나 가지고 있겠다.

녀석이 여관에 있길 바랐다.

“여기예요!”

어느새 여관 앞에 도착했다.

은신을 풀고 여관 문을 열었다.

가운데 큰 화덕 근처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바드가 보인다.

한눈에 봐도 북적이는 여관.

아기자기한 맛은 조금 부족해도, <옛 숲 엘프>보다 오히려 규모는 한층 더 크다.

“어서오십시오!”

인사하는 점원에게 곧바로 다가가 물었다.

“바토 시마라는 자가 여기 있나?”

그때 였다.

주위의 의자에서 세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일어나서 나를 둘러쌌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오?”

“왜 그분을 찾는 거지.”

목소리에 경계심이 가득하다.

진네이 유베의 수행원들인가?

‘이거 반가운데.’

좋은 현상이다. 내가 찾는 녀석이 근처에 있거나, 이들을 족치다 보면 녀석이 탁 튀어나올 거다.

나는 대놓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진네이 유베라고 해야 하나? 너희주인은 어디 있지?”

“이자가 건방지게.!”

나름대로, 한 명 한 명이 단순한 상인의 호위라고 말하기에는 포위해들어오는 자세가 제법이다.

“실력 좀 볼까? 덤벼.”

“뭐 야?”

- 쌔앵!

세 방향에서 동시에 주먹이 날아들어온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제법.

- 콰당.

세 명의 팔을 각각 한 번씩 꺾어전부 바닥에 내팽개쳤다.

“끄흐윽!”

“으어어어.

놈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파악이 안 되는 표정이다.

“으윽. 끄응.

고통에 신음하며, 녀석들은 힘겹게 다시 자세를 잡고 일어난다.

“그래. 계속해 봐.”

코드네임 별빛청여우, 엘윈 에사우에게 흡수한 체술이 있다.

이런 것들이 부리는 애교 정도는.

굳이 공포 스킬을 쓰지 않고 놀아줄 의향도 있다.

“마법사.?”

나를 둘러싼 놈들 중 가장 우람한 체구를 가진, 뻣뻣한 턱수염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묻는다.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내 움직임이, 웬만한 것들에게는 마법의 영역으로 보이고 있다.

“진짜 마법 봤다간 어쩌려고.”

w 크으으.?

턱수염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눈치는 있는지, 세 남자는 곧바로 다시 달려들지는 않고 경계 자세만을 유지했다.

‘완전히 병신들은 아니군.’

그때 였다.

“모두 물러서시게!”

2층 계단 위에서 한 명의 인간이 나타났다.

진네이 유베.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이번에는 전과 같은 초록색 로브가 아닌, 그럴듯한 장식이 달린 고급코트를 입고 있었다.

“어허!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다들날 부르지 않고 뭘 했나!”

그 반응이 재미있다.

주위의 세 남자가 진네이 유베의 말 한 마디에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몇 걸음 뒤로 물러갔다.

나는 진네이를 바라보고 물었다.

“나를 처음 보지 않나?”

그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감히 무례를 범한 수하들을 살려주셨으니 어찌 귀한 손님이 아니겠습니까? 2층으로 모시겠습니다.”

‘이 정도였다니.’

예상보다 보는 눈이 더 뛰어나다.

한순간에 세 남자를 다 죽일 수 있었다는 걸 금세 파악한 것 같다.

루비아가 속으로 말을 걸었다.

- 아는 사람이에요? 혹시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분?

= 믿을 만한 인간이다. 뭘 좀 부탁하려고 왔지.

- .어떤 걸요?

= 네 보호를 맡기려고.

눈만 깜빡거리며 굳어 있는 그녀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간단히 두 분 소개를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무도 없는 방에서, 유베가 나와 루비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방에 있던 호위들은 모두 밖으로 물린 채였다.

루비아는 상황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저. 제가 자기소개를 하는 건 위험할까요?

= 잠시만.

일단 무력시위부터 하기로 했다.

단검을 들고 검기를 일으켰다.

칼날 끝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푸른 기운이 맺히자 유베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검기.!”

“어엇.

루비아도 놀랐는지, 뒤로 한 걸음물러서 벽에 기댔다.

깜짝 놀란 두 인간을 한 차례씩 돌아보고는, 품에서 카드를 꺼냈다.

오각별이 그려진 검은색 카드.

유블람 경비대장의 비밀 상자에서 빼앗은 카드였다.

그리고 은괴 하나를 얹어 유베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걸로 의뢰를 하나 하려고 한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야.”

유베는 파드득 놀랐던 얼굴을 다시 천천히 추슬렀다.

“아니요. 이렇게 검기를 능숙하게 쓸 수 있는 분에게 돈 받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건!”

루비아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카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는 거냐?”

“이걸 아십니까?”

나와 진네이 유베가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네. 이건 드-루즈의 별이잖아요.

거꾸로 뒤집고 원을 그리면 타락한 세레르(Serer)의 상징. 좌우로 조금좁히면 정체불명의 알(Baha’s Faith)이고 안을 채우면.

잠시 오각별의 기원과 상징에 대해 설명을 이어 가던 루비아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아저씨는. 상인이시죠? 이 별이 가장 널리 쓰였던 건, 역시 최초의 상인 연합인<하크스 베르겐>에서 였으니까요.”

“.무슨 얘기냐?”

“<세상의 모든 로고>, <오컬트의 상징주의>, <메타포의 고백>에 전부 쓰여 있는 내용들이에요.”

나는 멍하니 루비아를 바라봤다.

눈만 껌백이고 있던 진네이 유베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정말 영특하시군요. 저도 아가씨의 정체를 알 것 같습니다.”

“저요?”

“예. 에라스트 서재를 고서古書의 전당으로 만든 레이 백작의 장녀분아니십니까?”

“어엇.

나도 놀라서 유베를 바라봤다.

“비극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진네이 유베가 말을 이었다.

“영주님께서는 따님께 가져다줘야 한다며 서책들을 많이 구입하셨죠.”

“그러셨군요.

“돌아가신 백작님께서 안심하시겠군요. 이런 실력자 분께서 따님과 함께 계신다니.”

“그렇죠?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한참 부족한 저를,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

루비아가 뿌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지금까지의 기억이 떠오르며, 그 시선이 민망해 고개를 돌렸다.

유베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런 정도의 검기를 보다니, 눈이 확 트이는 기분입니다. 그럼.

어떤 일을 의뢰하시겠습니까?”

나는 루비아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 여자를 잠시 맡아 줬으면 좋겠는데.”

루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보호 말씀이십니까?”

“그래.”

“기본적인 건 가능합니다만. 혹시암살단에라도 찍혀 있는 거라면 좀곤란합니다.”

“그런 건 아니야. 그다지 오래 할 필요도 없어. 일주일. 아니 삼 일이면 충분하겠군.”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다.

사흘을 이야기했다.

그 안에 벨’호멧 아이작을 봉인할생각이다.

“알겠습니다. 돌아오실 동안, 여기 머무르면서 보호하겠습니 다.”

나는 은괴를 만지작거렸다.

“정말 아무것도 받지 않을 건가?”

유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제 일꾼 세 명을, 몸 성하게 살려 주신 것만 해도 이미 의뢰비는 넉넉히 받았습니다. 후한 책정에 감사드립니다.”

재미있는 태도다.

결코 눈앞의 돈만 보지 않는다.

쓸모 있어 보이는 상대를 발견하자 어떻게든 은혜를 입히려고 한다.

조금 더 편하게 녀석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물어볼 게 좀 있는데. 챈들러남작에 대해 알고 있나?”

“그분은. 아직 동방에 있는 거아닙니까?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직인가.‘

그건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절대다수의 미래가 바뀌지 않았다.

레나 하나를 제외하고는.

레나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네크론 장부를 보고 멋대로 던진 추측일 뿐이다.

유베는 이 여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았다. 루비아가 묵을 방을 곧바로 준비해 줬다.

“그럼 며칠 뒤에 여기서 보자.”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하실일이 있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모험일 거 같아서 약간서운하긴 하지만.

루비아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금으로서는 전 짐만 되겠죠.”

“그건 아니야.”

“아니에요. 맞아요.”

루비아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제가 필요하면. 아니, 필요 없어도 꼭돌아오셔야 해요!”

“당연하지.”

“나중에 모험담을 들려주시면 더좋고요.”

그녀가 애써 웃었다.

짧게 스쳐 가는 웃음에서 떨어지기 싫은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루비아를 떼어 놓고 내성으로 걸어갔다.

도시 자체가 워낙 큰 탓에, 성문근처 사거리에 있는 여관에서부터 내성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질주를 썼으면 금방 도착했겠지만 굳이 서두를 기분은 아니었다.

어차피 ‘하룻밤’이 필요하다.

벨’호멧 아이작이 영주의 꿈속에 개입할 하룻밤이.

그라스미어 내성에 다가갔다.

구불구불한 긴 계단을 태연히 걸어올라갔다.

- 철컥.

두 자루의 할버드가 교차되어 나를 가로막는다.

“일단 정지.”

“투구를 벗고 신분을 밝히시오.”

‘그건 안 되지.’

마스커레이드의 지속 시간은 십 분.

이런 경비병 따위에게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영주에게 써야 한다.

그렇다고, 여기서 난장을 치거나 공포감을 조성할 필요도 없다.

나는 대화를 선택했다.

“너희 영주, 아프지?”

“무슨 소릴 하시는 거요?”

“가서 보고해라. 더 이상 고통을 받을 필요 없다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당황하는 녀석들을 보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말파스의 사자가 영주를 구원하러나타났다고 말해라.”

“오라고. 하십니다!”

내성에 갔다 온 경비병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경계하는 건 여전하지만, 극도로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그래야지.”

당연한 일이다.

영주는 벨’호멧 아이작의 노예로 살며 끔찍한 세월을 견뎌 왔다.

마왕 강림 시에 그라스미어가 구원받을 거라는 희망 하나로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견뎌 온 시간들.

바로 그 마왕의 사자가 등장했다고 하는데,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오고 싶은 심경일 거다.

안쪽으로 걸어갈 때마다 경비들이 조금씩 더 붙는 느낌이다.

칼 한 번만 휘두르면 서너 명씩 휘말려 날아갈 수준이지만, 그래도 인간치고는 괜찮은 수준이다.

‘나름대로 소수 정예. 인가.’

주위를 둘러볼 것도 없이 안으로 빠르게 걸어 들어간다.

내성 방문은 이걸로 세 번째다.

- 쿨럭!

곧 주름이 자글자글한 그라스미어영주가 나타났다. 겉으로는 여든이 넘어 보이지만 사실은 오십 정도다.

기대와 경계가 반반씩 섞인 눈빛이 나를 향해 강렬하게 꽂힌다.

저번 생에서 내가 그를 해방시켜 준 뒤, 아들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온천 여행을 간 남자다.

문득 척추를 타고 차가운 감각이 올라온다.

정말 전쟁 전에 모든 걸 버리고 온천 여행을 간 걸까?

혹시, 유령들에게 여행당했다거나 했던 건 아닐까.

“귀하가 말파스의 사자를 자칭한 분이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