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오래된 친구 (10)
- 푸훗. 마지막까지 네가 숨기고 싶어 하던 게 이거였나?
처형대에 선 기분이었다. 불안과 초조가 정신을 썰어 댔다.
- 너무 걱정하지 마. 응? 내 말만 잘 따르면 저 아이 해칠 일 없어.
끔찍했다. 움직임이 읽힌 건지, 생각이 읽힌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당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더 곤혹스러웠다.
루비아가 옆에 서서 팔 하나를 꼭안으면서 말했다.
“다녀오셨어요? 보고 싶었어요!”
아이작이 큭큭거렸다.
- 숨겨 놓은 부인? 설마 널 일으킨사령술사가 이 아이인가? 그럴 만한 능력은 없어 보이는데.
- 얼른 인사 받아. 뭐 하고 있어?
모르는 척이라도 하려고?
몸이 긴장으로 바짝 굳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비아는 활짝 웃으면서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봤다.
“좋은 소식이 있어요.”
“좋은. 소식?”
그녀의 웃음이 괴로웠다.
이쪽은 끔찍한 악령에 빙의된 채 다가와 버렸는데.
“유베 님이, 캐빈 애슈턴의 책을 한 권 찾아 주셨거든요.”
- 지금 캐빈, 애슈턴이라고 했나?
아이작이 묘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하지만 아이작의 반응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해졌다.
갑자기 말수가 줄어든 놈이 무척신경 쓰이는 와중에, 루비아가 계속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캐빈 애슈턴이 쓴 책을 전부 읽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도움은 전혀못 드리는데. 그런 거라도 잘 기억해야죠!”
루비아는 앞에서 밝게 웃었지만.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손이 나가서 루비아를 부숴 놓고, 그녀의 목을 뽑아 올릴지 모른다.
아이작이 살의를 품는 순간.
내가 루비아를 직접 죽이는 재앙이 시작된다.
“오셨습니까?”
뒤쪽에서 따라 나온 유베가 꾸벅인사했다.
아이작이 깽판을 치기 시작한다면이 인간의 운명도 경각에 달린 건 마찬가지.
“캐빈 애슈턴의 책입니다.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가 쓱 내미는, 붉은 가죽으로 된표지의 책은 꽤 오래되어 보인다.
유베도 대단한 인간이다.
처음 보는 괴한을 위해 이 정도의 호의를 베푸는 건, 자신의 직관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만나는 인간들마다 족족 이런 호의를 베풀다간 이미 오래전 파산했을 테니까.
어쨌건 캐빈 애슈턴에 책을 사양할이유는 전혀 없었다.
<사람을 따라하는 인형>
표지 오른쪽 아래에 캐빈 애슈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안에 있는 것도 함께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살짝 불룩한 부분이 있었다.
책을 펴자 당연하다는 듯 그곳이 펼쳐졌다. 오망성이 새겨진 검은색카드 두 장이 겹쳐져 있었다.
유베에게 보여 줬던 카드에, 그가 추가로 건넨 카드 한 장이 끼워져있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일이 생기면 언제든 저를 찾아 주십시오.”
유베가 뒤로 물러갔다.
“책부터 읽으실래요?”
루비아가 내 왼쪽 팔을 붙잡은 채 물었다.
“그건 잠시 미루지.”
아이작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캐빈 애슈턴의 책을 읽기가 어쩐지 찝껍 했다.
그에게 나에 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덜 주고 싶었는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버린 느낌이 든다.
“무슨. 생각 하고 계세요? 혹시고민 있으세요? 괜찮으신 거예요?”
문득 루비아가 묻는다.
알아 버렸나.
고민하고 있는 걸.
= 루비아.
- 네?
= .아무것도 아니야. 난 괜찮다.
그녀와의 대화를 아이작은 모르는 모양이다. 아니면 못 들은 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여기서 상황을 털어놓아도 루비아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게 낫다.
알면 오히려 독이 된다.
“.내성으로 가자.”
“우와, 해골님은 그라스미어 영주님도 아시는 거예요?”
루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였다면 루비아의 순진한 반응에 웃음이 나왔겠지만, 지금은 그럴여유가 없다.
“너무 신기해요. 아직 일어나신 지며칠도 안 됐는데! 살아 계셨을 때 엄청 중요한 분이셨나 봐요.”
젠장.
아이작이 다 듣고 있겠지.
“어떻게 저 같은 힘으로 해골님을 깨웠는지.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게 진짜 있네요!”
이제 와서 루비아의 입을 막긴 늦었다. 이게 어떻게 이용될지 차마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성으로 최대한 빨리 들어가는 데집중하기로 했다.
“돌아오셨군요!”
집사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헐레벌떡 뛰어간 경비병의 연락을 받은 영주도 곧 뒤따라 나온다.
“그런데 이쪽 분은.?”
영주가 루비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겨우 한 마디씩 뱉어 내듯이 말했다.
‘보호하도록. 최대한. 안전하게.”
- 저를요?
= 잠깐 내 말에 따라 줘.
루비아는 나를 보며 또르륵 눈을 굴리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가 루비아를 안내했다.
그 뒤를 시녀와 경비들이 따랐다.
역설적이다.
내가 보호를 부탁한, 저 경비들이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나.
저들에게는 어떤 승산도 없다.
아이작이 마음만 먹으면 루비아는 물론, 이 성 전체가 죽은 목숨.
그걸 내가 저지할 수 있을까?
그나마 루비아와의 거리가 조금씩 벌어지자 약간 긴장이 풀린다.
“잠시 성을 둘러봐도 되겠지?”
나는 영주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곧바로 안내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안내는 필요 없다.”
방향만 알면 된다. 따라붙으려는 집사를 거절하고, 루비아와 반대로 걷기 시작했다.
그때 였다.
- 야, 뭘 또 그렇게 졸았어. 내가 협조하자고 했잖아. 뭐가 그렇게 못미더운 건데? 응?
루비아가 사라지길 기다리기라도 한 걸까.
조용하던 아이작이 다시 나타났다.
- 뭘 원하는 거냐.
이번 생에도 또 허무하게 루비아를 잃을 수는 없다. ‘내’ 손으로 그녀를 살해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게 두지 않을 거다.
최악의 경우라도.
아이작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천천히 기회를 노리는 게 낫다.
무슨 생각일까.
놈은 기분 나쁠 정도로 친근하게 내게 말을 걸어 댄다.
- 내가 립 하나 주겠는데 말이야.
이럴 땐 저 여자가 어떻게 되든지,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재가 내 약점이다, 하면서 온 사방에 알리지 말고.
- 그러면 나처럼 탁월한 관찰력의 소유자가 아닌 한 잘 모를 수도 있거든. 지금 봐 봐. 성안에 있는 애들 다 루비아가 네 약점인 걸 알아버렸다고.
‘원하는 거나 말해라.’
다시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던 녀석이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 캐빈 애슈턴. 캐빈 애슈턴과 너는 어떤 사이지?
예상외의 질문이다.
캐빈 애슈턴을 어떻게 안다거나, 캐빈 애슈턴의 책을 왜 좋아하냐고 묻는 게 아니다.
어떤 사이냐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하지만 이미 녀석은 강한 심증을 가지고 물어보는 듯하다.
‘좋아하는 작가라고 했잖아.’
진실을 말해 봐야 약점이 될 뿐이다.
물론 아이작은 믿지 않는다.
- 어떻게 캐빈 애슈턴을 아는지 말해라. 그럼 저 여자아이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비웃음이 나왔다.
한두 번 속나.
교단의 멸망을 본 뒤.
말파스에 맹세를 하고도, 묘하게 나를 함정에 몰아넣었던 게 바로 이아이작이라는 자다.
죽음마저 속이고, 석관에서 가사상태로 수백 년을 지내 온 인간.
- 너, 지금 나 의심하는구나? 아직속이는 건 시작도 안 했거든?
‘.생각을 읽는 주술이 대단하다는건 인정하지.’
- 그냥 눈치라니까. 뭣보다 난 너를 속일 필요가 전혀 없어. 아까 개 다시 불러오라고 해 볼까? 응?
칼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주위를 한번 쓱 둘러봤다.
모두를 물린 탓에 다행히 아무도 없다.
하지만 아이작이 소리라도 지르면, 경비병들이 당장 나에게 달려와서 루비아의 위치를 알려 줄 거다.
아직 낮이었지만, 사방이 캄캄하게 느껴졌다.
- 자살은 하지 말라고. 어지간해서 그것도 쉽지 않을 테니까.
‘좋다. 모두 말해 주지. 하지만 네가 캐빈 애슈턴에 대해 왜 묻는 건지도 말해 줄 수 있나?’
어차피 말할 수밖에 없다면, 역시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다음에 다시 아이작을 만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아이작은 지식과 능력, 심리전에서 모두 나를 압도한다.
솔직히 한 번의 생으로 감당하기엔 버거운 상대다.
그렇다고 이 녀석을 석관 안에만 썩혀 두고, 아예 그라스미어 무덤에 접근하지 않기는 아깝다.
- 뭐. 그 정도야.
아이작은 의외로 선선히 수긍했다.
자신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라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른다.
- 물론 네가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 했을 때 일이지만 말이야.
어차피 속일 생각은 없었다.
‘캐빈 애슈턴. 그 인간이 쓴 책을 읽으면. 지혜가 조금씩 오른다:
- 지혜라고? 책을 읽으면 지혜가 오르는 게 당연하잖아. 지금 무슨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냐?
아이작은 여전히 단단히 칼을 잡고있다.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는다.
내 대답이 진실이라는 건 자신의 직감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무슨 소리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 어떤 내용이든지 관계없이, 캐빈 애슈턴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지혜가 1씩 오른다는 거다.’
- 하?
‘캐빈 애슈턴의 책을 읽을 때마다 반투명한 푸른 창이 뜬다.’
- 푸른. 창이라고?
‘지혜가 1 올라갔다는 창이 뜨지.
그게 내가 캐빈 애슈턴의 책을 찾는 이유다.’
- 하". 하하하. 크하하하?
아이작이 음산한 광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결코 적대적이지 않았다.
? 크크크. 크족 좀 더 해 봐라.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나?’
상관없었다.
나는 어떤 거짓도 없이 녀석에게 대답하고 있다.
잠시라도 루비아에게서 아이작을 떨어뜨려 놓고, 그의 의중을 살필수 있다면 어떤 취급을 받든 아무런상관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 나온 말은 전혀의외의 것이었다.
- 지금 너에 관한 모든 것들이.!
네 눈에는 ‘푸른 창’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있는 거냐?
‘어느 정도는 그렇다만.’
- 크하하하하??. 창천蒼天의 구멍을 인식하는 자라니! 캐빈 애슈턴은 그구멍에 이런 안배까지 준비해 놓았단말인가. 그자는 대체.
아이작이 미친 듯 말을 이어 갔다.
- 말도 안 되게 둔한 눈치 주제에,
‘막 일어났는데도’ 수많은 것들을 알고, 날 만나지 않았으면 새기지 못했을 회로까지. 이거 하나면 다 설명이 되겠군.
아이작의 광기가 점점 누적되는 게 느껴졌다. 그가 미친 듯 머릿속에서 스멀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녀석은 잠시 침묵했다.
어둡고 무거운 침묵은 아니었다.
무언가 단단히 묶여 있던 것이 막풀려나기 시작할 때의 그런 기묘한 침묵이 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 나에게 가설이 하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