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오래된 친구 (12)
이 세계가 아이작의 말대로 결계라해도, 캐빈 애슈턴이 썼다는 대로 주인과 손님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결국 지금 달라지는 건 없다.
꼭 지키고자 마음먹은 루비아조차 안전하지 못하다.
아이작은 내 몸을 빠져나가 칼에 깃들었다.
하지만 하필 대검에 빙의한 건.
언제든지 루비아를 죽일 수 있다는 무언의 시위인지도 모른다.
‘협력하겠다.’
당장 눈앞의 걸림돌을 치우면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
- 당연히 그래야지.
검이 만족스럽게 응- 하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루비아의 안전을 보장할 것.’
내 말에 아이작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수긍했다.
- 뭐, 그쯤이야. 다른 하나는 뭐지?
‘캐빈 애슈턴. 그를 반드시 만나게 해 줘야 한다.’
아이작이 클클거리며 웃었다.
- 크흐흐. 내가 너에게 협조하는 이유가 바로 캐빈 애슈턴 때문이다.
당연한 소린 그만 지껄이고 일단전당부터 가라. 그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애도 데리고.
“그렇게 된 거다.”
나는 루비아에게 사실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물론 아이작이 듣는 앞에서.
비밀리에 전달한다고 눈치채지 못할녀석이 아니다.
숨겼다간 공연히 안 좋은 쪽으로 일이 흘러가게 될지도 모른다.
벨’호멧 아이작.
녀석을 절반도 믿고 있지 않지만, 일단 협조하기로 했으니까.
“여기에. 정말로 영혼이 깃들어있다고요?”
내가 말리기도 전.
루비아는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서, 대검 구멍에 숙 넣었다.
“루비아!”
검신이 응웅거리며 떨렸다.
- 뭐야? 인질 주제에 왜 막 나를 함부로 건드리느냐? 못 하게 해라.
“루비아!”
“앗. 죄송해요. 칼이 혼자 떨리는게 너무 신기해서요.”
“닿지 않도록 조심해라. 위험한 녀석이 들어 있으니까.”
“위험한. 녀석이요? 누구. 요?”
- 흠. 아무것도 모르는 아둔한 이 아이에게 내 존성대명을 가르쳐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의외로 아이작은 당장 그녀를 해칠생각은 없는 듯했다. 대신 녀석은 거만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 고금제일의 주술사. 제국 남부의 지배자, 창천을 검은 깃털로 뒤덮는 말파스의 대리자가 나라고 전해라.
내 앞에 서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고 복종하라고 하도록.
너무 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별로 옮겨 주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어. 그러니까:
- 뭐냐?
‘직접 하지 그래?’
저번 생에서, 아이작은 메달 안에 봉인된 채로도 레나에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 그럴 수야 있지만.
나를 소통의 매개로 사용하는 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둘의 정신을 연결했다.
아이작과 루비아가 나를 통해서 대화하기 시작했다.
= 이분인가요?
- 그러하느니라. 이 몸은.
갑자기 근엄한 척을 하는 말투가 우스웠다. 티는 내지 않았다.
= 흠.
제 자랑을 잔뜩 늘어놓은 녀석의 말을 듣고, 루비아는 뭔가 심각한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
= 저. 궁금한 게 있어요.
- 무엇이든 고해 보거라.
= 아이작 님은. 사실 저도 책에서 읽었어요. 갑자기 여신의 저주만 받지 않았으면, 어쩌면 제국 전체를 지배하실 수도 있었다고 하던데.
역시 유명한 녀석인가?
하긴, 아이작이 맨날 자랑하는 게 사실이라면 책에 실려 있을 법하다.
루비아가 말을 이었다.
= 특기인 주술만 말씀해 주셨지만 사실 불세출의 전술가셨다면서요?
심심풀이로 쓰신 회전會戰 교본은 아직도 제국에서 쓰인대요.
- 크흠. 그런 것까지 아느냐.?
역사를 아는 아이의 미래는 밝느니라.
이 멍청한 해골이 본받을 여지가 있구나.
= 그런데
- 흠흠. 고하거라.
자신이 인정받았다는 생각.
기억되고 있다는 생각 덕분인지, 아이작은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루비아가 질문을 이어 갔다.
= 그런 분이 왜 지하에 계속 갇혀계셨던 거예요? 지금은 왜 또 이칼에 갇혀 있고요?
나도 궁금했다. 아이작은 왜 계속지하에 갇혀 있었을까?
왜 석관을 결계로 해서 그 안에만 가만히 머무르고 있었을까.
-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갇히긴어딜 갇힌다는 말이냐!
근데 갇혔잖아, 라고 말하려다가 루비아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 그러니까요. 아이작 님의 수준과 비슷하게 도달한 결계사도 없다고 하던데. 갇힌 건 아니고.
- 당연한 소리!
= 그럼 왜지.
루비아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둣, 머리칼을 살짝 꼬며 물었다.
= 혹시 뭔가로부터 피하셔야 했던 건가요? 숨어야 했다거나?
그건가 싶은 순간.
아이작과 루비아의 연결이 끊겼다.
“어, 이분 어디 가셨죠?”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 네 능력이 부족해서 연결이 끊어졌다고 해라.
‘응? 무슨 소리야?’
- 아무튼 네가 부족해서 연결이 끊어졌다고 해. .내가 전당 안에서 좋은 거 찾아 줄 테니까.
녀석이 갑자기 의기소침해졌다.
“아. 그게. 오래 연결하고 있으면 내가 좀 피곤해서.”
“저는 그런 줄 모르고. 죄송해요!”
‘이제 됐냐?’
- 흠흠.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녀석은 티는 안 내도 은근히 고마워하는 듯싶었다.
전당 문 앞.
- 끼기기기긱.!
예전 이 문을 챈들러가 열었던 게 떠올랐다.
이번에는 집사에게 열쇠를 받아서, 나란히 뚫린 두 구멍에 넣고 그대로 돌렸다.
- 제법 자연스러운데. 언제 여기 문 열어 본 적 있느냐?
‘글쎄.’
- 보통 열쇠 구멍 찾기도 힘든데.
왠지 이 몸이 함께 있어서 축복이 깃든 것 같군.
너 몸 없잖아, 라고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문이 열린 뒤 루비아가 내는 탄성소리에 그런 생각이 묻혀 버렸다.
“우와.!”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먼지 쌓인 골동품들이 취향에 맞는 모양이었다.
“저. 조금 살펴봐도 되나요? 너무신기한 게 많은데.
“그러든지.”
- 흠흠.
아이작이 헛기침을 했다.
= 왜 네가 거들먹거리냐?
내 노예들이 만든 것들인데 이 정도도 못 하느냐?
= 노예라니
물론 아이작의 인성에 대해서는 알만큼 아는 터라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루비아가 지루해하지는 않았을까고민했지만 기우였다.
그녀는 전당 내부를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다녔다.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일단 챙겨.
고민하지 말고.
그녀가 옷 가게에서 한나절을 골라겨우 한 벌을 맞춘 기억이 난다.
“위험해 보이는 건 만지지 말고.”
재가 애냐? 너보다 훨씬 똑똑해.
진짜 별걱정을 다하시네.
“네! 그런 건 구경만 할게요.”
- 재는 냅두고, 넌 따라오기나 해.
어휴. 칼에 깃들어 있으려니 진짜재미가 없네.
대검이 웅웅거렸다.
- 아, 빨리 왼쪽으로 가라니까.
어. 거기서 직진. 쭉.
뭘 주려고 이렇게 나를 끌고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이 나를 인도했다. 그리고 커다란 상자 앞에서 멈춰 섰다.
본 적 있는 익숙한 상자다.
‘‘이건.
- 뭐야? 아는 거야?
저번에 전당을 방문했을 때.
휴대용 대포라고 생각한 물건이다.
길이는 160cm 정도.
“그냥. 특이하게 생겨서. 이걸 챙기면되나?”
슬쩍 대포를 들고, 안에 있는 설명서를 읽으려 할 때였다.
[기계공학 Lv.3을 활성화합니다!]
- 야, 뭘 그딴 걸 읽어? 버려.
“설명서도 안 챙기.
- 장갑 벗고, 통 안에 손부터 집어넣어 봐.
“안으로?”
- 시키는 대로 좀 해라.
흐.w
- 안으로 손을 넣어서. 위에 작은 돌기 있는 부분을 오른쪽으로 쭉 당겨 봐.
‘여기 말인가.”
- 어, 거기! 그리고 손 빼!
손을 뺀 직후였다.
- 파캉!
작은 폭음이 터지며 구멍 안에서 강하게 메아리쳤다.
직경 1미터 정도의 커다란 대포가 줄어들며 쥐기 편한 형태로 변했다.
“이게. 뭐지?”
- 타이탄 전용 저격기지.
‘타이탄. 이라고?’
- 연합 의회의 의원들이 파일럿으로 타고 다니는 거 말이다. 번외급 철인鐵人이라고 보면 된다.
기억났다.
자유 연합의 정예 기사들은, 말이 아니라 강철로 된 기계에 탑승해서 움직인다는 이야기.
활동하던 지역 때문에 그들과 직접부딪쳐 보지는 않았지만.
들은 적은 있었다.
‘그 철인이라는 거. 본 적 있나?’
- 뭐? 당연하지. 5선 이상 의원용타이탄까지 타 본 적 있다고.
‘그거. 세냐?’
- 큭큭큭_
아이작이 웃었다.
- 궁금하면 너도 한번 타 보든지.
나만 잘 따라오면, 머지않아 거기 올라타게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자.
하나 더 챙길 게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