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오래된 친구 (15)
우리는 그라스미어에서 빌려준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영주의 호의였다.
마차는 화려함보다는 견고함과
탑승감에 중점을 둬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 다그닥! 다그닥!
무척 상태가 좋은 말이 두 필이나 붙었는데도, 마차의 폭이 좁아서 샛길도 잘 달렸다.
좁은 마차 안에서 루비아와 나의 거리는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 덜컹.
커다란 돌멩이라도 밟고 지나가는걸까. 웬만해서는 충격이 느껴지지 않던 마차가 한차례 흔들렸다.
- 파드득!
마차 지붕에 앉아 있던 아이작이 갑작스레 날갯짓을 하며 위로 솟아올랐다.
“앗. 저분, 놀랐나 봐요.”
곁에 앉은 루비아가 손가락으로 지붕을 가리켰다.
그나저나. 마차가 흔들리며 몸이 좀 겹쳤는데.
떨어질 생각은 없어 보인다.
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뒀다.
불편하면 알아서 멀어지겠지.
“저분이요. 놀라서 막. 파드득움직였어요.”
몸은 가까이 다가오면서, 화제는 먼 곳을 향하게 하는 방식인가.
다행히 아이작의 목소리가 마차 안의 어색함을 깨트렸다.
- 다 들린다.
‘들리면 어쩔 건데?’
- 이 건방진 것들이.!
아이작이 부들거린다.
하지만 별 신경은 쓰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아이작이 다시 빙의해서 루비아를 해칠까 봐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루비아가 나에게 들려준이야기를 듣고 난 뒤 그런 걱정은 조금 덜어졌다.
루비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사실 저분이 걱정돼요.>
<아이작이? 왜 그렇지?>
<‘혼魂은 그릇에 담긴 물과 같아, 옮겨 다닐수록 그 절대치가 계속줄어든다.’ 사령술의 기본 교과서에 쓰인 내용이거든요.>
<아이작, 사실이냐?>
<.흥. 날 그런 기본적인 법칙이 적용되는 존재로 보면 곤란하다.>
하지만 결국 법칙은 법칙이라는 이야기.
부수려면, 자칭 대주술사 벨’호멧아이작이라 해도 힘깨나 들겠지.
대검에 들어간 건 내 믿음을 사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전당에서 찾은 까마귀는 준비된 빙의체일 거다.
임시로 깃들기 위한 최적의 그릇.
좀 열 받게 했다고 해서.
그 까마귀 인형에서 함부로 나올가능성은 낮겠지.
- 파닥! 파다닥!
아이작은 불쾌한 듯 마차 주위를 빙빙 돌아가며 파드득 날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흘끗 내밀었다.
아이작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묵묵히 마차를 모는 중년 마부가 대단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딱 하나만 물었다.
<이 까마귀도 일행이십니까?>
그렇다는 대답에 마부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 파득! 파드득! 파드드득!
숙련된 마부의 요건이 신경줄이 굵은 것이라면 무척 잘 만족시키는 남자다.
마부 경력 30년이라 했던가.
마차는 서부를 향해 달렸다. 아직교단까지는 한참이다.
커튼을 걷고 풍경을 바라봤다.
겨울 산은 여백이 많아 좋다. 중턱이 햇볕에 천천히 그을린다.
돌 위에 흔적처럼 남은 눈이 투둑조금씩 녹아내렸다. 루비아도 내게 살짝 기대어 바깥을 바라봤다.
개울 위 얇은 빙판이 졸린 햇살에 조금씩 부서졌다. 겨울 꽃은 그런 식으로 핀다.
힘들게 이리저리 뛰다가, 알아서 움직이는 마차 위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니 다 때려치우고 여행이나 다닐까 싶기도 하다.
진심으로.
물론 모두 잊고 도망친다고 해도 유유자적 여행 다닐 수 있는 미래따위는 오지 않는다.
일 년 뒤 전쟁이 예정되어 있다.
바람에서 피 냄새가 나는 세월이 지나면 마왕이 강림한다.
어디로 도망쳐도 세상의 시선을 피할수 없다. 독 오른 칼날들이 루비아를 노릴 것이다.
- 달그락.
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닥쳐오는 운명은 정면으로 마주할수밖에 없다.
- 스르록.
유베가 구해 준 책을 펼쳤다.
잠시 외면하고 있었지만, 역시 삶을 마주보는 첫 시작은. 애슈턴의 책을 읽는 것부터.
“옆에서 같이 읽어도 되나요?”
루비아가 내 쪽으로 몸을 붙였다.
겨울의 산길이다.
온기가. 싫을 리는 없다. 이렇게 곁에 붙어서 책을 읽자니 떠오르는 분이 있다.
서큐버스님이.
그분은 어떤 존재였을까.
아이작의 말을 무시하려 해도, 끝끝내 불투명한 의구심이 머릿속에 거뭇거뭇 번져 온다.
"저.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전그냥 옆에만 있어도 좋아요.“
“아니. 같이 보자고.”
루비아를 괜히 긴장하게 만든 듯하다.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지만, 어딘가 들뜬 둣도 했다.
혹시 책을 읽는다는 생각만으로 저렇게 되는 걸까.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여자다.
<사람을 흉내 내는 인형>
<캐빈 애슈턴>
첫 장을 넘겼다.
텅 비어 있는 백지에, 알아볼 수 없는 꼬불꼬불한 글씨가 있었다.
제국 공용어도 아니었고, 분명히 동방어도 아니었다.
루비아가 곁에서 글씨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타락한. 영혼과 순수한 육체? 뭘말하고 싶은 걸까요.”
깜짝 놀라 루비아를 바라봤다.
“이걸 읽을 줄 안다고?”
“네. 룬어로 그렇게 쓰여 있어요.”
격렬한 반응에 루비아는 부끄러운 표정이었다. 그녀가 양 볼을 살짝비비며 말했다.
“도서관에 있는 책 중에 고대어랑룬어로 쓰인 책도 몇 권 있어서.
“사전인가?”
“아니요, 그건 아닌데. 계속해서 보고 또 보다 보니 어느새 읽을 수 있게 됐어요.”
나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모르는 언어로 쓰인 서적을 계속읽기만 하면 뜻이 와 닿는다고?
아예 배운 적도 없는데?
대체 얼마나 언어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야 그게 가능한 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게 되는 건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부끄러워요.
아버지에게만 말했거든요. 아빠도 사실 처음에 안 믿으시다. 룬어와 고대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꼭비밀로 하라고 했어요.”
“그건 왜지?”
“그건 마법사들만 남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금어禁語거든요.”
“호오.”
루비아의 말에 이런저런 호기심이 솟구쳤다. 하지만 앞으로도 들을 기회는 많으리라. 일단 애슈턴의 책부터 읽기로 했다.
다행히 첫 장에 쓰인 문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내가 읽을 수 있는 대륙 공용어로 쓰여 있었다.
<어린 시절, 내 친구는 목이 잘린 알몸의 인형을 주워 온 적이 있다.
친구는 자기 목을 대신 그 인형에 끼워 넣고 싶다고 말했다.>
“무서운 이야기네요.”
캐빈 애슈턴의 책이 그렇듯 초반몇 페이지는 실용적인 내용과 별상관없는 글줄들이 자리했다.
<나는 생각했다. 굳이 목이 잘린 인형을 찾아서 제 목을 끼워 넣을 필요는 없다.>
<완벽한 인형에 제 영혼만 뽑아서 집어넣으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순수한 육체를 가지리라.>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72.14%.]
어찐지 울렁거리는 기분이 든다.
“괜찮으세요?”
루비아는 걱정이 가득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나는 피에 절어 있는 살인마 해골인데, 마치 강가에 내어 놓은 어린 아이라도 보는 것처럼 불안하기 그지없는 눈빛이다.
그녀의 걱정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멀미가 있으신 건가요?”
그럴 리가 없다.
흔들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
숙련된 마부가 끄는 마차는 굉장히 편안하다.
그냥 이 책이 문제지만, 그렇다고 안 읽을 수는 없다.
“계속 읽자고.”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페이지는 제가 넘겨드릴게요!”
과도한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에 나서 들뜬 그녀를 굳이 제지할 필요도 없다.
루비아의 곁에 가만히 앉아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그녀와 보조를 맞춰 가며 읽기 시작했다.
책 뒤로 갈수록 실용적인 내용이 많이 등장했다.
하지만 역시 이해하기는 어려운 내용들이 많다.
룬어라고 했나?
읽을 수 없는 꼬불꼬불한 글씨도 종종 등장했고.
“먼저 다리에 입고, 그다음으로 흉갑. 마지막에 양팔을 장착하는 거네요.”
루비아가 주석과 그림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말했다.
연합에서 쓰는 철인鐵人들.
읽다 보니, 처음 어렴풋이 가졌던 이미지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거대한 강철 기계 위에 올라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탑승한다기보다 착용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장치들이다.
“신기하네요.
루비아도 눈을 반짝이면서 책을 바라보고 있다.
책 읽기 스킬이 높아서 그런가.
읽는 속도가 무척 빠른 데다, 책내용에 대한 이해마저 굉장히 높아보인다.
생소한 내용을, 나에게 하나하나제대로 설명해 주는 것도 고맙고.
“신기하네요.
그녀는 나와 책을 한 번씩 번갈아바라봤다.
“연료를 등에 꽂아 넣으면, 자기 힘이 아니라 착용한 철인의 힘을 낸다는 것 같아요.”
자유 연합의 <파일럿>들이 타는 거대한 철인들.
크기 4미터의 전투병기.
그 기계가 어떤 힘을 낼 수 있는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연합은 제국에 참패했다.
검주劍主들이나, 아쥬라의 탑주급마법사들보다 분명히 약할 터.
솔직히 큰 흥미는 생기지 않는다.
다만.
혹시 루비아도 그 기계를 입으면 강해질 수 있는 걸까?
난전 중에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좋을 텐데.
나는 루비아에게 물었다.
“연료로 움직인다고? 그럼 원래 힘은 상관없다는 건가?”
그녀가 슬쩍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장비를 착용하고 활용하는 것 자체가 굉장한 체력을 필요로 한대요. 하지만.
“하지만?”
- 스르륵.
루비아는 하얗고 가는 손가락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시선이 그대로 따라갔다.
“스스로도 자아를 갖는 타이탄급철인 같은 경우는, 공조共助현상을 일으키면 힘을 빌려준다고 쓰여있어요.”
“공조 현상이라.
“단어에 대한 설명은 여기 없는 것 같아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는걸까? 잠시만요.”
루비아가 막 책을 뒤적거리려고 할 때였다.
- 흠흠_
아이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은 마차 지붕 위에 앉아서, 대화를 엿들은 것 같다.
뭔가. 끼어들 틈을 계속 노리고 있던 것 같은데.
조금 우습다.
헛기침을 하는 녀석에게 물었다.
‘뭐. 아는 거 있나?’
- 타이탄의 공조는 파장이다.
‘파장?’
- 영혼의 파장이다. 본신의 능력이 뛰어나도 타이탄이 거절하면 못 타는 경우가 있지.
아이작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 반대로, 벌레 한 마리 못 잡는 어린아이라도 타이탄이 허락하면 탑승이 가능하다. 200년 전에는 빈민가에서 태어난 열다섯 살 약골남자아이 하나가, 초월급 타이탄<잔-메랄>의 선택을 받았었지.
초월급 타이탄, 이라는 말에 아이 작의 힘이 들어갔다.
조금 들뜬 듯한 어조에서 그것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난전亂戰 중에 제 몸을 가릴만한 것보다는 훨씬 강하리라는 느낌이 온다.
‘???그럼 루비아도 된다는 거냐.’
- 큭큭. 타이탄이 누군가를 선택하는 경우는 수백 년에 한 번이다.
‘수백 년에 한 번?’
- 그래 녀석들은 웬만한 인간보다훨씬 비대한 자아를 갖고 있거든.
받을 거 다 받고 탑승을 허락하는것도 드문데, 스스로 도와주는 건 정말 없다고 봐야 하지.
‘흐음.
- 네 옆의 아이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네놈이 탑승할생각은 안 하느냐?
‘어차피 제국에는 없지 않나?’
- 잘 찾아보면 또 모르지. 연합에 가도 되는 거고. 뭐, 일단 교단부터 가고 나서 말하거라.
아이작은 갑자기 대화를 끊었다.
말은 자기가 먼저 걸어 놓고.
- 툭.
루비아와 조금씩 대화해 가며, <사람을 흉내 내는 인형>을 모두 읽고 책을 덮었을 때였다.
- 띠링!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올랐다.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와 함께 책을 읽었습니다.]
[지혜가 3 올랐습니다!]
[마도공학 Lv.O을 습득했습니다.]
[경험치가 약간 올랐습니다.]
이렇게까지?
여러모로 놀라웠다.
<캐빈 애슈턴의 업적 - 17>이나, <음란한 슬라임 메이드>를 읽었을 때와는 다르다.
지혜가 1 오르는 데 그치지 않고 무척 많은 폭이 올라갔다. 게다가Lv.O에 불과하지만, 무려 마도공학이라는 스킬까지 습득했다.
그러니까.
연합의 철인이라는 걸 이해하려면이 스킬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진네이 유베.
그는 어디서 하루 만에 이런 책을 구해 온 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책도 책이지만, 서번트 시스템과 루비아의 영향력이 훨씬 큰 거라고 느낀다.
룬어가 곳곳에 적힌 책.
루비아가 곁에서 하나씩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이만큼 깊게 이해할 수 없었겠지.
아이작 놈이 설명해 줬다고 해도, 서번트 시스템은 당연히 발동하지 않았을 거고.
루비아를 곁에 둬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진다.
그나저나.
- 다그닥! 다그닥!
슬슬 산세가 험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