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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00화 (200/458)

201화 오래된 친구 (17)

가볍다.

상자를 들고 느낀 첫 감정이었다.

내 말에 아이작이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 가볍다고?

의아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힘자랑을 하려는 건 아니다.

어차피 스탯이 잔뜩 올라간 지금, 뭐가 들었다 해도 상자 따위가 들기 어려울 만큼 무거울 리는 없다.

그러니까, 가볍다는 건.

상대적인 문제다.

예전보다 가볍다는 이야기.

- 달칵!

상자를 열었다.

1리터짜리 유리병 열두 개가 안에 변함없이 담겨 있었다.

“텅. 비어 있네요?”

루비아가 눈을 깜빡였다.

-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아무것도 없어?

아이작이 놀라서 외쳤다.

열두 병.

병은 전에 있을 때 그대로였다.

그러나 내부에 꽉 차 있던 은빛마력액은 온데간데없었다.

-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내 소중한 보물이 사라지다니! 사도의 피가 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냐!

이럴 리가 없다!

사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게 다 어디 간 거지.

“병은 예쁜데. 원래 뭐가 있어야 하나 보네요.”

루비아가 당황한 아이작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뭐가 있어야 한다.

저번 생에서는 분명히 열두 병이 은빛으로 꽉 차 있었다.

그때보다 오히려 지금 훨씬 더 일찍왔다.

누가 와서 가져갔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

정보를 얻기 위해 아이작에게 슬쩍떠 봤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이 이것까지 다털어 갔을 가능성은 없는 거냐?”

어차피 교단의 결계도 부서진 거아니냐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아이작이 작게 부리를 저었다.

- 그럴 리가 없다. 결계가 훼손되었으면 흔적이 있어야겠지. 드나든 흔적자체가 전혀 없다.

“음.”

확신으로 가득하다.

자칭 고금 제일의 결계사니까, 아무래도 그 정도는 알아보겠지.

옆에서 루비아가 갸웃하며 물었다.

“이 상자는 사백 년이나 전에 여기 놓으신 것 아닌가요?”

- 그래서?

“안에 있던 게 말라붙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증발했을지도 몰라요.”

아니라는 건 안다.

그래도 아이작의 대답이 궁금해서, 가만히 있었다.

녀석이 단호히 대꾸했다.

- 사도의 피는 그 총량이 변하지 않는다. 땅으로 스며들지도 않으며, 말라붙고 기화하지도 않지. 게다가 보존 결계 안에 있는데 그럴 리가 총량이 변하지 않는다고?

루비아의 질문 덕분에 중요한 말을들은 것 같다.

“마법을 쓰면 줄어들던데.”

예전에 이 교단으로 들어오면서, 바윗덩어리를 모두 박살 냈을 때가 떠올랐다.

아이작이 즉각 반발했다.

- 과하게 썼을 때 아닌가?

그건 그렇다.

- 원래라면 발휘할 수 없는 힘을, 루-룸을 사용해서 발휘한다.

- 변혁의 질료로 사용될 때 기화하는 거다. 보존되어 있는데 변할일은 없다.

변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퍼뜩 스치는 게 있다.

설마.

회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걸까?

일단 그 질문은 참기로 한다.

아이작에게 너무 많은 걸 드러내고 싶지는 않으니까.

- 그러니까.

녀석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 이게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고개를 들어 다시 황당해했다.

어디로 가긴.

세 병은 내 몸 안에 흐르고 있고.

한 병은 레나가 T&T 지부장으로 승급하는 데 사용했지.

문득 궁금해진다.

나머지 여덟 병 분량은?

그건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남은 루-룸을 마지막으로 어디에 맡겨 놓았는지 떠올렸다.

내가 가지고 다니지는 않았고.

레나.

분명히 그녀에게 맡겨 놓았다!

그러면 이 시간선에서.

루-륨 여덟 병이, 모두 레나에게 있다는 소리일까.

그녀가 루-룸을 어떤 식으로 보유하고 있을지, 어떻게 쓰고 있을지 솔직히 짐작조차 어렵다.

세계 변혁의 질료라.

그 말이 자꾸 곱씹어진다.

세 병 분량을 가지고 있는 나조차 이렇게 강해졌는데.

여덟 병은 레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어쩌면.

단순한 T&T 지부장 이상의 존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작.”

망연자실해 있는 녀석이 대꾸했다.

- 뭐냐.

“루-름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혹시 알고 있나?”

- 현 황실이 가진 힘의 원천이자 기반이다.

“황실이 가진. 힘의 원천이라고?”

- 세이론이 사도들을 살해하며 얻은피다. 사도들을 찢고 흩뿌리면서 그들에게서 약탈한 피. 힘 그 자체라고 보면 된다.

“황실은 그걸 어디 보관하고 있는건데?”

- 내부의 비역이겠지. 거기까지는 나도 모른다. 목숨이 다섯 개쯤있으면 약간은 홈칠 수 있을지도.

K.r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던 황궁에 영향을 끼칠 방법이.

목숨 다섯 개를, 어쩌면 그 이상을쓴다.

황실이 가진 힘의 원천.

‘사도의 피’라고 부르는 그 액체의 위치를 바꿔 놓는다.

그러면 이 세계의 판도를 바꾼 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내가 레나의 운명을 바꿔 놓았던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장부에서 지워 냈던 것처럼, 세계의 수레바퀴를 조금씩 바꿔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황실 근처에도 접근 못 하고 있는 지금이지만.

엄청난 실마리를 얻어 낸 기분이다.

- 탁.

아이작이 한숨을 쉬듯 부리를 벽에 부딪쳤다.

- 이렇게 된 이상, 캐빈 애슈턴의 유적으로 간다.

‘애슈턴의 유적이라고?”

- 그렇다. 내가 수상하게 생각했던 곳이 있다. 네게는 따로 뭐가 보일지도 모르겠군. 거기로 가자.

그때 였다.

“해골님에게는 따로 뭐가 보여요?

무슨 말씀이시죠?”

루비아가 끼어들었다.

“그게.

상태창에 관해 말해야 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이작도 알고 있는데 루비아에게 숨길 건 없다.

허공에 뜨는 반투명한 창.

자신에 대해서 나오는 여러 가지 정보들.

“.이 수치들이 표현되는 거다.”

차분히 고백했을 때였다.

루비아가 묘한 표정이 되어 나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은 나와 아이작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세상에. 저처럼 그런 창을 보는 분은 처음 봐요!”

아이작은 기절할 것처럼 뒤쪽으로 몇 걸음을 디디며 말했다.

- 뭐. 뭐라고?

“제 능력치도 볼 수 있어요. 스킬확인도 다 되고 있고요.”

루비아는 당연하겠지만, 아이작이 놀라는 것도 연기는 아니다.

녀석은 진심이었다.

마치 무덤에서 주술 역류로 봉인될때처럼, 정말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 그런 게 보였지?”

“어릴 때부터요. 아버지께 말씀드렸는데,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어릴 때부터라고?

과거까지 바뀌어 버렸다.

처음 루비아와 만날 때는 분명히 이런 이야기가 없었다.

회귀를 거듭하며 생긴 현상이다.

레나 역시 언제부터인가 그 창을 인식했다.

혹시 나와 관계가 깊어지게 되면, 상태창을 보게 될 확률이 늘어나는걸까?

- 이런 어처구니없는.

아이작에게 물었다.

“네가 살았던 시대의 인간들만 그창을 볼 수 없었던 건 아니겠지?”

루비아와 아이작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버지도 그런 건 처음 듣는 소리라고 했으니까요.”

- 그건 헛소리다. 대대로 챈들러가주들의 시야를 공유하며. 실시간으로 전부 인간을 봐 왔다. 이런존재는 너희 둘밖에 없다. 우연이라는건 말도 안 되고.

멈칫하던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 너희 둘 중 하나가, 상대에게 큰영향을 준 거겠지.

과연 눈치가 빠르다고 할까.

녀석은 나를 더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봤지만, 어릴 때부터 상태창이 보였다는 루비아의 말에도 흔들리는것 같다.

“그런가요?”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 분명한 건. 후후. 나도 너희를 따라다니다 보면 창천의 구멍을 볼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어쩐지 기분이 꺼림칙하다.

루비아보다도, 왠지 내 쪽을 신경써서 보는 것 같은데.

루비아의 상태창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볼 수 있는 건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내용뿐이라고 했다.

첫 번째 생의 나 정도로 상태창을 인식하는 것 같다.

그녀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지만, 나는 일단 화제를 돌렸다.

“아까 캐빈 애슈턴의 유적이라고했나.”

- 그렇다. 이 근처에서 루-륨을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지.

루-륨이 라.

“결국 네가 마력 충전을 하겠다는 이야기 같은데.”

- 흥. 어차피 ‘타이탄 저격기’도 충전해야 할 거 아니냐. 그 무기를 한번 써 보고 싶지 않느냐?

“.글쎄.”

마도공학으로 작동하는 무기라.

조금 호기심이 가는 건 부정할 수 없다만.

적어도 지금은, 그걸 작동시키는 은빛 액체가 훨씬 더 궁금하다.

- 따라오기나 하거라.

- 파드득!

힘을 조금 회복한 둣, 위로 날아오르는 아이작을 향해서 루비아가 말했다.

“탑에 있는 유해들은 그대로 놓아두실 생각인가요?”

- 신경 쓰지 마라. 힘을 회복하고 돌아와서. 내 손으로 유해를 모두 수습할 것이다.

예전과 같은 반응이다.

성격은 변하지 않는 건가 싶다.

그렇지만, 지금은 교단의 결계를 복구해 달라는 이야기는 없다.

레나와 함께 여기 머물렀을 때랑은 상황이 달라서 그런가.

교단 밖으로 나는 녀석의 날갯짓이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이런 곳에 폭포가 있었다니.

남쪽으로 향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아이작은 기묘한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 콰르르르.

“아.

폭포 아래로 넓게 펼쳐진 경치를 루비아가 멍하니 바라봤다.

멋진 풍경이기는 하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일까.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장소다.

아이작이 우리에게 말하는 대로, 이상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자 마치 환각처럼 나타난 공간.

- 뭘 이런 거에 감탄하고 그러느냐.

빨리 가자!

- 파드득!

녀석이 절벽 아래를 날아갔다.

우리는 어쩌라는 건지.

말이랑 함께 가는 건 좀 무리고.

여기서부터는 두 발로 뛰어야겠군.

“루비아.”

“네?, ’

“잠깐 날자.”

‘으어에옛!”

- 쿵!

루비아를 안고 곧바로 절벽 아래로 착지했다.

그녀의 안색이 새하얗다.

“괜찮은 건가?”

최대한 충격이 안 가게 안았는데.

루비아가 아니라 신생아라도 괜찮을 정도로.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상한"

비명. 질러 버렸네요*".

- 파드득!

근처에 있던 아이작이 날개를 크게 움직였다.

- 장난칠 시간 없다. 주변 냄새를 맡아 봐.

냄새라고?

품 안에 안겨 있는 루비아도 짐짓심각한 기색이 되어 말했다.

“피. 냄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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