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오래된 친구 (18)
피 냄새다.
한두 명의 피 냄새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숫자의, 얼마 되지 않은 신선한 피 냄새가 났다.
- 채 하루도 안 지났군.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나는 녀석을 보며 물었다.
‘여긴 대체 어디지?”
- 말하지 않았나? 캐빈 애슈턴의 유적이라고.
캐빈 애슈턴의 유적이라는 건 다이렇게 피비린내가 나는 걸까.
루비아를 바닥에 사뿐히 내려놓고 칼자루를 꽉 잡았다.
이대로 들어가도 될까?
‘탐지.’
내 영역 안에서 움직이는 녀석은 없다.
하지만 그저 감지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대로 저 안쪽으로 들어간다면 어떤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다.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아이 작이 중얼거렸다.
- 나간다고 안전한 것도 아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상황을 알아 두고 가는 게 차라리 더 나을거다. 이런 일을 벌인 게 지금은
‘밖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리 있는 말이다.
“어쩔까?”
나는 루비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도 긴장이 되는지, 몸을 살짝긴장시키며 대답했다.
“저는 끝까지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기 들어오려고 결계까지 힘들게 뚫은 거잖아요?”
힘들게 뚫긴. 금방 뚫었지.
“흐음.
둘의 의견이 일치한다.
발끝에서부터 느릿하게 차오르는 긴장감을 느끼며 한 걸음 한 걸음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당하는 건 전혀 상관없지만, 루비아가 이 시체들과 비슷한 꼴을 당하게 될까 봐 차오르는 긴장이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한 걸음 한 걸음 더 걸어갈수록시체의 상태는 점점 끔찍해졌다.
제대로 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들은 거의 없었다.
짓이겨져 있거나 뜯겨져 있다.
“이분들은.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걸까요.”
시체들 사이를 한 걸음 한 걸음나아갈 때마다, 루비아는 내 곁에 더 바싹 붙었다.
“좀 더 봐야겠지.”
팔을 붙잡는 그녀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해골님도 부디 조심하세요.!”
내가 죽으면 루비아도 필연적으로 죽게 될 거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보다도 내걱정을 먼저 하고 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 주제에.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간다고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이 우리들을 안으로 계속 들어가게 만들었다.
시체가 산산이 조각나서 겹쳐진 탓에, 몇 명이나 죽었는지 정확한 숫자도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팔다리와 내장이 서로 넝쿨처럼 뒤엉켜 있었다.
흘끗 루비아를 바라봤다.
따라오는 루비아의 다리에 약간 힘이 풀리는 게 느껴진다.
내장과 뇌수가 흐르는 시체에는 조금약한 건가.
“뒤에 남아 있는 건 어때.”
“아, 아니에요!”
루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이작이 작게 날개를 파닥거리며 말했다.
- 어설픈 헛소리 하지 말고 데리고가라. 얘를 여기에 혼자 떨어트려놓을 생각이냐?
옳은 말이다.
죽은 것이 있으면 죽인 것이 있다.
‘죽인 것’이 얼마나 강한지, 지금어디 있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루비아 바로 옆에 있는 게 그나마안전하겠지.
“따라. 갈께요.”
그녀는 낯빛이 하얗게 질리지도 않았고 이를 부딪치며 떨고 있지도않다.
숙련된 병사라도 이 정도 광경을 접하면 그녀보다 격한 반응을 보일텐데, 시체의 바다에서 나름대로 멀쩡히 버티고 있다.
역시 사령술사라는 건가.
직업 특전으로, 일종의 정신저항을 가진 건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책만 읽던 영애가 시체들을 보고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분들.
정신을 꽉 잡으려고 노력하는 둣, 루비아가 이를 악물고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부 엘프. 인 건가요?”
그러했다.
사방에 널린 시체들은 모두 귀가 길고, 얼굴이 뾰족했다.
어두운 피부색과 하얀 머리칼.
그들 특유의 물결 모양 갑옷.
으음.
루비아가 아이작에게 물었다.
“캐빈 애슈턴의 유적이라고 하셨는데, 왜 엘프분들이 전부 여기에 잔뜩 계신건가요?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길래.
그녀도 주저주저하면서 말했지만, 꽤나 날카로운 질문이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대신 해 준 것이다.
- 딱.
녀석이 부리를 닫으며 대꾸했다.
- 여기는 놈들의 성지聖地니까.
“뭐야? 다크 엘프의 성지라고?”
- 그렇다. 그들이 섬기는 레라지에의 성지지.
<새를 사냥하는 마왕>레라지에.
말파스와 적대하는 사이라는 건, 저번 생에서 주술사를 봐서 이미 잘알고 있었다.
“또 거짓말이었나.”
레라지에는 말파스의 적이다.
아이작은 나를 여기 데리고 와서 한바탕 분탕이라도 치려 한 걸까?
녀석이 파닥거리며 홍분했다.
- 거짓말은 무슨! 이 장소가 캐빈애슈턴의 유적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레라지에의 성지이기도 한 걸 굳이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일부러 누락하신 거군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주저주저하면서도 루비아는 할 말 다 하고 있었다.
시체의 계곡을 지나면서도.
아이작이 주제를 돌리듯 말했다.
- 애슈턴이 쓴 책은 분명 여기를 가리켰느니라. 보이는 거 없느냐?
창천의 구멍을 보는 너라면 뭔가 다를 법한데.
“글쎄.”
아이작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딱히 보이는 건 없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뭐가 더 위험한 선택인지, 현명한 선택인지.
적어도 앞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가라거나 뒤돌아서 도망치라거나 정도만 써 줘도 좋을 텐데.
문득 레나가 떠오른다.
그녀의 직감에 의지하거나, 혹시<펜던트>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걸믿었을 텐데.
지금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루-름이 여기 있는 건 맞고?”
- 그래! 당연하지! 괜히 레라지에의 성지가 아니라니까?
회귀된 후에도, 유지되는 물질.
세계를 변경시키는 힘.
캐빈 애슈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액체.
뒤로 도망쳐도 위험을 회피한다는 보장이 없으면, 분명 안으로 들어가 볼 만한 가치는 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둥그런 돔 모양의 천장은 오히려조금씩 더 높아지고 있었다.
- 저건.!
- 파드득!
빠르게 천장으로 날아간 아이작은 그곳에 맺힌 은빛 액체 한 방울을 삼켰다.
좌록, 하며 무언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까마귀 날개가 커졌다.
“와아.
- 보아라!
처음 마력을 불어넣어 줬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 이걸로 잠깐은 살겠군.
- 화르록! 화르르륵!
날갯짓을 할 때마다 큰 날개에서 강한 바람이 일어났다.
많은 양도 아닌데.
“한 방울도 효과 좋은데?”
- 400년 전 이 녀석을 만드느라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모든 것이 최적화되어 있는 녀석이다.
“그러면 루비아 좀 뒤에 데리고 있지그래?”
저렇게 힘차게 날아다닐 정도면, 인간도 데리고 날아오를 수 있을 것처럼 보이니까.
- 내가 알아서 하느니라. 어디서 감히 누구에게 명령질이냐?
“아이작 님? 어찐지 아까랑 말투가 달라졌네요.
확실히 마력이 충전되지 않았을 때의 아이작이 더 나은 것 같다.
지금의 기고만장한 녀석은 그리 봐줄 만한 꼬락서니는 아니다.
하지만 저 정도로 기운이 넘치면, 무슨 일이 생길 때 루비아를 보호하는 역할은 하겠지.
특히 지금처럼, 위험한 분위기가 팍팍 풍겨 오는 상황에서 녀석이 힘을 찾은 건 반가운 일이다.
나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움직이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흔적은 안으로 갈수록 조금씩 더분명해졌다.
‘죽인 것’은 외부의 다크 엘프들을 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살해할 수 있었지만, 안쪽에서는 약간이나마저항이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몸이 찢겨져 나가기 전에 한 번은 휘둘러 본 듯, 부러진 창칼이 여기 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바닥 곳곳에는 무언가로 찍은 것 같은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바위가 몇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나간 흔적도 흔했다.
‘죽인 것’은 다크 엘프들을 가시가 박힌 꼬리로 쳐서 부수고, 손으로 찢고, 입으로 잡아 뜯은 것 같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들어오길 정말 잘한 걸까?
바로 나갔어야 하지는 않을까?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 파드득!
아이작이 내 뒤에서 커진 날개를 펄럭이며 말했다.
- 뭔지 알 것 같다.
“짚이는 거라도 있나?”
- 부스러기. 사도의 부스러기들이 남긴 흔적과 비슷하다.
“사도의 부스러기라고?”
어디에서도 못 들어 본 단어였다.
- 그렇다. 이 몸이 제국 남부를 지배하던 시절 자주 사냥하던 것들이지.
“네가 자주 사냥했었다면 별거 아닌거 같은데.”
- 아니. 별거 아닌 게 아니다!
아이작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있었다.
“그럼. 이제 나가야 하나요?”
“그럴 수는 없지. 너희들은 뒤에 남아 있어라.”
- 뭐? 혼자 뭘 하려고?
어쩌면 루비아가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내가 다시 안쪽에 있는 ‘무언가’에 다크엘프들처럼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쪽으로 홀린 듯이 계속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신전 최심부 쪽에서 은은한 초록빛이 비쳐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는, 몹시 익숙한 빛.
정수 홉수의 빛이다.
수없이 많은 인간들을 죽였지만, 이제 웬만해서는 만날 수 없게 된정수 흡수의 빛.
레안드로 후작처럼 나보다 월등히 강하다거나.
은신술처럼 뛰어난 게 있으면서, 어느 정도의 실력도 가진 레일리 같은 녀석의 시체에서나 보여지는 초록빛그게 가능할 정도로 강한 자들이, 신전 최심부에서 당했다는 말.
이런 곳에서, 정수 흡수를 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이렇게 대량으로.
가로로 쭉 찢긴, 잿빛 머리칼의 남성엘프에게 손을 뻗었다.
완전히 갈라진 은색 갑옷 아래로 초록색 정수가 빨려 들어왔다.
[시미터 Lv.l을 흡수했습니다!]
골반 아래 두 다리가 날아가 버린 여성 엘프에게 손을 뻗었다.
[숲 적응 Lv.l을 흡수했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초록색 빛을 뿜는 녀석은 점점 더 많아졌다.
기스-제-라이가 만들어 낸 구덩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쉽게 접할 수 없는 장소임은 분명했다.
[지혜가 1 올랐습니다!]
[단검술 Lv.l을 흡수했습니다!]
[쌍검술 Lv.l을 흡수했습니다!]
[쌍검술 Lv.2를.]
쌍검술 스킬이 있던 다크엘프를 흡수하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아이작이 파닥거리며 날아왔다.
- 이건. 루턱의 인장 아니냐!
놈은 슬쩍 부리를 움직여 쓰러진 엘프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기묘하게 생긴 펜던트가 흉갑에 대각선으로 매달려 있었다.
위쪽은 붉은색, 아래는 진녹색의 보석이 타원형의 은색 고리에 박혀있다.
“아는 거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 레라지에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최상위 전사들에게 수여되는 문양이다.
이런 녀석도 살해당하다니.
“강한가.”
- 난 기본적으로 다크 엘프는 광산노예로밖에 취급하지 않지만, 이 인장을 가진 놈들은 솔직히 말해 실력이 상당하다. 광산 경비대로 쓸 정도는 된다는 얘기지. 너도 쉽게 이기지 못할걸?
쌍검 다크엘프의 몸에는 빼곡한 저항흔이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몸통이 날아간 바깥쪽 녀석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 봐 봐. 몇 칼은 제대로 먹인 것 같은데.
부러진 칼끝에 맺힌 은빛 액체를 아이작이 부리로 집어삼켰다.
- 화르록!
살판난다는 듯이, 녀석이 부리로 화염을 뿜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