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9:1 (1)
말을 달려 사흘쯤 갔을 때였다.
<등불>달리아크의 도시, 아만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겨울은 해가 일찍 진다.
날카로운 첨탑 사이로 천천히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창 자루를 바닥에 몇 번 튕기며 마차들을 검문하는 경비들은 하나의 풍경처럼 보였다.
물론 걱정할 건 없었다. 그라스미어에서 받은 신분증도 있고, 투구를 벗어 보라고 하면 마스커레이드스킬을 쓰면 그만이다.
하지만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 경비병들은 우리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이분들. 우리를 외면하네요?
외면 정도가 아니다.
“있는 걸 아예 모르는 것 같아요!
혹시 우리, 유령이 된 건 아니겠죠?”
루비아는 깜짝 놀란 얼굴로 경비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정말 안 보이나 보군.”
“이제 어떡하죠?”
- 어떡하긴 뭘 어떡하느냐? 당연히 그냥 들어가야지.
나는 부리를 위로 처들고 으스대는 아이작을 향해 물었다.
“네가 부린 수작이냐?”
- 수작이라니 참. 말을 해도 곱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 몸이 가벼운현혹 주술을 사용했느니라.
오랜만에 쓸모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작이다.
메달에 봉인되어 있을 때와 달리, 스스로 준비해 둔 까마귀 인형에 들어간 상태라면 이런저런 주술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기분상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놈은 애슈턴의 유적에서 루-륨을 잔뜩홉수한 뒤 훨씬 강해진 느낌이다.
“이분들은 평생 우리를 못 보는 건가요? 내일도? 모레도요?”
- 그건 아니다. 삼 분 정도면 전부 정신을 차릴 테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기나 해라.
횃불이 타는 아만의 거리를 지나, 아이작의 안내를 따라 달리아크의 결계를 돌파했다.
- 시키는 대로 걸어라. 먼저.
별 해는 없지만, 지나가는 자들을 얌전하게 만들어 주는 결계라던가.
달리아크의 평화를 위해.
결계에 대해 설명을 들은 루비아가 미간을 모으고 작게 중얼거렸다.
“얌전하게 만들어 주나요? 이 결계라는 게 좀 웃기네요.
- 어떤 면이?
“아이작 님처럼 결계를 잘 알거나, 아예 힘으로 뚫을 수 있는 분들은 결계의 영향을 안 받는 거겠죠?”
- 당연하지.
“사실 그런 분들이야말로, 이곳에 정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분들아닐까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이야기다.
파악하고 회피할 수 있는 자들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약한 자들만 결계의 영향을 받아얌전하고 순종적으로 길들여진다.
- 세상이라는 게 다 그렇지. 죄다눈속임이야.
“그런가요.?”
루비아가 뭔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만큼은 세상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길 바랐지만, 별달리 반박할 말도 찾기 힘들었다.
좁아지는 돌담을 따라 빙빙 돌자, 곧 거대한 여관 입구가 등장했다.
커다란 건물들이 서른 채가 넘게 촘촘히 이어진 여관.
이곳이 달리아크다.
예전에 왔을 때는 하얀 가면을 쓴
여자가 우리를 맞이했지만,
- 팟!
- 어, 재 뭐냐?
아이작이 부리로 가까운 건물의 지붕위를 가리켰다.
어디론가 몸을 솟구쳐 사라지는 여자가 보였다.
예사롭지 않은 몸놀림이다.
얼핏 하얀 가면이 보인다.
저자는. 여기서 손님을 맞아야 할 여자 아니었나.
어디로 가는 거지?
“.모르겠군. 일단 따라와라.”
어쨌거나 길은 이미 알고 있다.
비회원 구역으로 곧장 걸어갔다.
멍한 표정의 인간들이 드문드문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우리를 바라보는 거지?”
아이작이 가라앉은 어조로 답했다.
- 우리가 아니다. 저것들. ‘너’룰바라보고 있어.
“나를?”
“네. 맞아요. 해골님만 특정해서 바라보고 있어요.”
- 건널목 지붕. 오른쪽 골목.
한두 녀석이 아니다. 대체 달리아크에서 무슨 짓을 한 거냐?
루비아마저 나를 흘끗 바라본다.
“저랑 계속 같이 움직이셨는데.!
이 도시에서 유명하셨던 거예요?”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저번 생에 레나랑 다녀갔었지만, 이번 생은 여기 오는 게 처음이다.
이상한 일이다.
한 놈 잡아서 물어볼까 싶었지만, 달리아크에서는 모든 종류의 폭력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물어봐야겠군.”
- 어디^!?
“정보 경매장에서.”
아이작이 작게 큭큭거렸다.
- 그거 참 신선한 발상이네. 그럼우리는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어차피 루-륨의 위치에 대해서도 물어봐야 한다.
수상한 시선들을 의식하며, 혼자 <경매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직 한 명만 입장하는 게 이곳의철칙.
저번에는 메달에 봉인된 아이작과 함께 들어갔었지만, 지금은 녀석이 까마귀 인형 안에 있어서 데리고 들어갈 수도 없다.
문득 의문이 떠오른다.
저번 생에 녀석과 함께 경매소에 들어갔을 때.
나는 캐빈 애슈턴에 대한 정보를 구했다.
아이작은 어째서 아무 말도 없이 침묵했을까?
그때부터 뒤통수를 칠 예정이었던 거겠지.
“정보를 사러 오셨소이까.”
장막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매소의 정보상인.
두 번째로 만나는 녀석이다.
이자의 정체는 뭘까?
첫 만남 때 내가 인간이 아니고, 결계에 영향을 안 받았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냈다.
몹시 강한 존재다.
내가 비폭력 원칙만 지켜 준다면, 인외라도 상관없다고 했었지.
그런데 묘한 점이 있다.
이번에 녀석은, 아예 내 정체에 관한 말은 꺼내지도 않고 있다.
“정보를 사러 오셨소이까.”
자연스럽게 다시 한 번 물을 뿐.
“그렇다만.”
“그럼 어떤 정보를?”
먼저 루-륨에 대한 것부터.
“루-륨이 있는 곳들에 대해 알고 싶은데.”
“그 정보는 경매를 해야 하오.”
“경매를?”
“알고 들어온 거 아니오? 여기는 경매소니까. 가격을 불러 보시게.”
룰은 알고 있다.
정해진 기간 동안 정보를 갖고
있다가, 그 기간에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자에게 판매한다.
얼마를 불러야 할까?
아이작의 도움을 얻을 수도 없고.
가격이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럴 거면 어느 정도 생각이라도하고 왔어야 했는데, 너무 막 들어와 버렸다.
생각해 보면 레안드로 후작에 관한 정보가, 드물게 정가를 매겨 파는 녀석이라고 했었지.
[회계 Lv.l이 발동합니다!]
[스킬 레벨이 너무 낮습니다.]
[적정 가치를 산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도 안 통하고.
어쩔 수 없다.
적당히 은괴 하나를 꺼내어 앞으로 내밀었다.
“1, 200로티. 12세이론이라. 좋소.
접수됐소.”
“현재 최고가인가?”
“그건 알려 줄 수 없소. 공정거래따위를 보장할 생각도 없고.”
당당하다.
하지만 아쉬운 건 이쪽이다.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닌 것도 당연하고.
게다가 정보가 보관된 안쪽에는 알수 없는 기관 장치가 있다.
[탐지 Lv.7을 발동합니다!]
높은 레벨의 탐지로도 자세하게 느껴지지 않는 숨겨진 장치들.
측정할 수 없는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을 게 분명하다.
기적적으로 이 녀석을 해치운다고 해도, 저 안에는 또 어떻게 들어갈것인가?
“더 낼 거요? 망설이는군.”
“잠시 보류하지.”
“마음대로 하시오.”
회계 스킬이 먹히지 않는다.
가격을 더 올리기 전에 아이작의 조언을 들어 볼 생각이다. 돈이야 나중에 추가로 걸 수도 있고.
문득 궁금한 게 생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이번에는 나를 보고 놀라지 않는 건가?
처음에는 인외人外라느니, 결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느니 하면서 꽤 관심을 가져 줬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내 정체를 원래부터 알고 있던 것 같은 느낌이다.
“더 살 정보가 있소?”
아무래도 물어봐야겠다.
“혹시. 이 도시에서 내가 알려져있는 건가?”
장막 안쪽의 남자가 소리 없이
피식거렸다.
“이건 퍼질 대로 퍼진 정보이니까그냥 알려 주도록 하지. 당신에게는 수배령이 내려져 있소.”
“뭐? 수배라고? 누가 나를.?”
“그건 판매하는 정보가 아니라서.
조심해서 돌아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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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누가 나를 수배한다는 거지?
이번 생애에 내가 한 일을 차분히 돌이켜 보았다.
푸르손의 추종자들과 적대한 적도 없다.
황실도 전혀 안 건드렸다.
레라지에의 성지에 가긴 했지만, 이미 다 전멸해 있던 녀석들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아이작의 조언이라도 들어 봐야 할것 같다. 초조한 걸음으로 막 천막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땅을 밟는 순간.
- 팟!
발아래서 뭔가가 작은 소리를 내며 터졌다. 발끝에서부터 온몸이 빠른속도로 굳어 갔다.
- 덥석!
장갑을 낀 손이 뻗어 와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여기 있네.”
묘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뒷덜미를 잡힌 순간부터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버둥거려 봐야 방법이 없다고.
“같이 가자. 돌아보지는 말고.”
“당신이. 나를 수배한 건가?”
“그래. 얌전히 따라오라고.”
이번에는 또 다른 목소리.
변조된 채지만 조금 앙칼지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뒤에 있는 녀석은 두 명.
대체 어디서 이런 녀석들이 튀어나온거지?
절대로,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딘지 익숙하다.
목소리도 변조되었고 가면을 쓰고 있지만, 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는느낌.
유령들을 마주했을 때처럼 꺼림칙하고 불길한 감정만은 아니다.
“좋다. 가자고.”
“어라? 순순히 응하네?”
“어차피 선택지는 없는 것 같은데.”
“현명하군.”
여기서 기적적으로 몸을 빼낸다고 해도, 억지로 도망쳐서 루비아까지 휘말리는 것보다 일단 이야기라도 들어 보는 게 낫다.
솔직히 궁금하기도 하다.
왜 나를 수배한 거지?
달리아크 안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무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누구지?
- 쑤욱!
커다란 검은 보자기가 나를 덮었다.
마법이 적용된 물건인 듯 안쪽이 의외로 넓었고, 푹신푹신했다.
어깨에 메고 가는 걸까.
다행스럽게도 바닥에 질질 끌리지는 않았다.
검은 보자기 안에서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칼은 이미 빼앗겼고, 양쪽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
발목에도 족갑이 채워져 있다.
어느새?
대단한 녀석들이다.
애초에 팔다리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힘을 줘서 끊을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최상의 컨디션으로도 나를 납치한 둘을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확실한 직감이었다.
- 스록.
납치범들은 나를 검은 보자기에서 꺼냈다.
말 없던 녀석이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의자에 들어앉혔다.
인형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주위를 둘러봤다. 통나무로 지은 작은 오두막에 불과하지만, 눈앞의 두 가면이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니 절대 탈출할 수 없다는 아쥬라의 스펠홀드처럼 느껴진다.
“당신들은. 누구지?”
오른쪽 가면이 고개를 갸웃했다.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가 할 질문이야. 넌 누구지?
환몽幻夢 계열의 주술을 전문으로 연마한 리치인가?”
주술은 대체 무슨 주술.
설마, 아이작이 내가 모르는 사이 또 엉뚱한 짓을 한 건가.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는데.”
일단 잡아떼기로 한다.
그나저나.
눈앞의 두 녀석이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다.
왼쪽 가면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흐음. 기다려 보지. 곧 당사자가 등장할 테니까.”
어둠이 깔린 작은 오두막 안.
가면 뒤에서 전해 오는 시선을 한참 받아냈을 때였다.
- 삐그덕.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