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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07화 (207/458)

208화 9:1 (3)

“진심이에요. 이분은. 이대로 그냥보내 드릴 거예요.”

레나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더없이 진지한 눈빛이다.

“뭐? 네 꿈에 나오는 녀석이라고 해서 힘들게 잡았는데, 지금 농담하는거지?”

샤루니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르릉거렸다.

“아뇨. 농담 아닌 거 아시잖아요.

이제 술법 풀어 주세요.”

“후으어. 이해할 수가 없네.”

심지어 풀려나는 당사자인 나도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다.

몸수색 전후의 태도 변화가 급격하다.

레나는 지금 뭘 하는 거지?

분명히 기억은 없고, 내 꿈을 계속해서 꾸는 상황일 뿐이라면서. 그저20 정도의 호감도로, 오래 노렸던 사냥감을 이렇게 간단히 풀어 줄 수 있는 걸까.

정말 꿈에서 봤던 정이라는 건가?

쉽게 이해는 되지 않았다.

- 스르록.

묘족 샤루니안이 하얀 고양이로 변했다. 예전에 들은 말이 떠오른다.

묘족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고양이 형태로 변한다고 했던가? 완전히 고양이로 변한 녀석은 귀를 종긋세우며 옆을 바라봤다.

[시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나와 레나를 한 번 구해 준 여자.

그리고 지금은 언제든 내 머리를 날려버릴 준비를 마친 여자, 트로핀나냐우의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 본부장님 하고 싶은 대로 하셔야지. 귀한 분인데.”

나냐우가 거대한 낫자루를 슬쩍아래로 내렸다.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꽉 조이고 있던 무형의 압박감이 풀렸다. 레나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나냐우에게 말했다.

“열쇠 주세요.”

스스럼없는 태도다. T&T 내에서 그만큼 중요하게 아낌 받고 있다는 거겠지.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뿌듯함부터 느껴진다.

“여기.”

그녀는 나냐우에게 열쇠를 받았다.

- 투칵.

단순하게 생긴 열쇠를 작은 틈에 넣고 돌리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한 번에 수갑과 족갑이 풀렸다. 이제보니 수갑 안쪽에 복잡한 룬 문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참 대단한 걸로 내 손발을 채웠지 싶었다.

“주술 풀어 주세요.”

[허. 난 모르겠다, 정말. 이렇게 얘를 풀어 줘도 되나.]

“풀어 줘요, 샤루니안.’

[끄응.]

고양이가 눈을 푸르게 빛냈다.

- 툭.

말랑말랑한 앞발이 내 다리를 두드리자, 다리에 이어 몸 전체의 마비가 빠르게 풀렸다. 이전 생에서는 예언만 보여 준 고양이였는데 이런 능력까지 있다니. 정말 만만히 볼 수 없는 녀석이다.

保.]

샤루니안이 눈을 빛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향한 묘한 감정이 느껴진다.

질투?

하지만 나한테 그걸 느낄 이유는 없으니 착각이겠지.

“이제 가셔도 좋아요.”

레나가 등을 떠밀었다.

정말 이대로 나가는 건가?

뭔가, 이상하다.

하지만 어떤 부분을 딱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럼,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의구심은 다 해소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연스러운 척 밖으로 나갔다.

오두막 문을 완전히 닫기 전에, 슬쩍뒤를 돌아봤다.

트로핀 나냐우는 팔짱을 끼고 별표정 없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저자도 온몸의 피를 루-륨으로

대체했다고 했지. 하지만 지금은 물어볼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일단 놓아준 걸로 만족하자.

괜히 긴 골목을 돌고 돌아갔지만, 납치범들이 나를 뒤따라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납치당한 경위도 당황스럽지만, 풀려날 때도 생각보다 훨씬 더 간단하게 풀려났다.

레나도 허술해진 게 아닐까.

원래였다면 나를 이렇게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위가 달라져서 그런가?

힘들었던 과거가 달라져서일까.

아니면, 나를 이대로 놓아주는 게 옳은 판단이라는 자신의 직감이라도 따른 걸까.

- 팟!

[은신 Lv.6을 활성화합니다!]

[특전: 자취말소(C플러스) 적용 중.]

소는 잃어도 외양간은 고쳐야지.

비록 나냐우라는 괴물에게 납치당하기는 했지만, 달리아크의 다른 수상한 것들에게까지 뒤를 허락할생각은 전혀 없다.

따라오는 녀석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아이작과 루비아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까마귀 인형이 성을 내며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 네놈은 대체 뭘 하고 온 거냐?

딱히 기다리지는 않았느니라.

“그냥 경매에 좀.”

- 그게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말이 되는 소리냐?

“많이 기다렸어요. 누구를 따로 만나고 오신 건 아니죠?”

“딱히.”

마음 한구석이 뜨끔하다.

하지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만난 건 아니니까.

일방적으로 납치당한 거지.

- 이 자식, 뭔가 수상한데.

하지만 레나와 있었던 일을 말할이유는 전혀 없었다.

“안 믿어도 할 말은 없다.”

- 흐음.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알았다.

아이작이 몹시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천천히 훑어봤다. 까마귀 인형의 검은 눈에 붉은빛이 슬쩍 떠올랐다.

부담스러운 시선이다.

얼른 말을 돌렸다.

“경매에서 문제가 생겼다.”

“무슨 문제인가요?”

“루-륨의 위치 정보에 12세이론을 걸었어. 하지만 아무래도 경쟁자가 있는 것 같던데, 어떻게 하지?”

- 흠. 자세히 말해 보거라.

나는 경매소에서 있었던 상황을 둘에게 전달했다.

납치당했던 것만 빼면 숨길 것도 더할 것도 없었다.

이야기를 들은 아이작이 부리로 작은 원 하나를 그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 내가 400년 전에 경매의 신 소리좀 들었느니라. 내 말을 듣거라.

“뾰족한 방안이라도 있나.”

아이작이 기다렸다는 듯 거들먹거렸다.

- 경매의 기본은 상대를 파악하는거지.

당연한 말이다.

준비한 자금과 의도를 알면.

얼마를 부를 건지 알면 간단히

승리할 수 있다.

물론 말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달리아크의 정보 중개상은 당연히 상대를 알려 주지 않을 거다. 그이야기를 하자 아이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쯧쯧. 파는 녀석이야 당연히 안알려 주지. 우리가 직접 찾아야지.

사도의 피가 모인 곳에는. 비가 내리면 하얀 활이 뜬다.

“흰색 무지개 말씀이군요.”

- 이걸 미끼로 해서, 상대를 낚아올리자는 거다.

“확실히. 루-륨을 찾고 있다면 그런 정보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겠네요.”

- 이해가 빠르군.

나도 좀 같이 이해하면 좋겠는데.

머리가 빨리 확확 돌아가는 스탯같은 건 없는 걸까?

지혜 수치를 아무리 높여 봤자, 스킬의 위력이나 지속되는 시간에 관여할 뿐.

실제로 머리가 좋아지게 만들어 주는건 아니다.

아무리 스랫이 강해져도, 어쩌면 이거야말로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인지도 모른다.

- 뭐야. 이해 못 했냐?

“우리 생각이 꼭 맞다는 보장도 없는데 왜 그렇게 나쁘게 말해요?”

- 무리하게 편들기는.

루비아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별건 아니에요. 루-륨이 있는 장소에서 흰 무지개가 나타난다면, 그걸 봤다고 소문을 퍼트리는 거죠.

그러면 누가 접촉해 올 거예요.

우리와 경쟁하는 상대겠죠.”

- 나서 줘야 될 녀석이 이렇게 잘알고 있으니 걱정이 없군. 누구랑다르게 말이다.

“나서 줘야 할 녀석이라니. 설마루비아를 말하는 거냐?”

곁에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건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두 분, 인간 도시에서 활동하기 좋은 몸은 아니잖아요?”

루비아가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 걱정되면 따라다니든가. 은신능력도 있지 않느냐. 너 정도 강하면서 뭐가 걱정이냐.

“내가. 강한가.”

- 흐흐. 스스로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느냐? 혼자서도 제국 기사단하나 정도의 힘은 낼 수 있는 게 바로 네놈이다. 이 몸께서 괜히 관심을 가져 준 줄 알았느냐?

생각해 보면 그렇다.

방금 전 속절없이 당해 자신감이 많이 멸어진 상태이기는 했지만, 이건 상대가 너무 나빴다.

‘트로핀 나냐우.’

이 녀석은 그야말로 책 속에서나접할 만한 전설적인 존재다.

T&T의 창시자로, 무려 400년에

걸쳐서 활동하는 은막의 강자.

그 녀석 외에도 아이작이나 나냐우, 제국 무력의 정점인 검주 따위를 일상적으로 접하다 보니 스스로가 약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내 주위 상황이 워낙 극단적으로 돌아가다 보니 감각이 영 이상해져버린 것이다.

아이작이 파드득거리며 강변했다.

- 거기에다 나까지 따라갈 테니까.

제국 4검주가 루비아를 암살하러 오지 않는 이상 아무 일 없다.

“.꼭 그렇게 말해야 되냐?”

- 뭐 어쩌라는 것이지?

“왜 기분 나쁘게 제국 4검주가 어쩌니 운운하냐. 가정이라도 아예그런 말은 하지 말지.”

몇 번이고 나를 쫓아오던 후작과 기괴한 모습의 공작을 떠올리니, 절로 마음이 답답해졌다.

“말이 씨가 된다고.”

- 큭큭큭.

아이작이 강렬한 비웃음을 날리며 나를 조롱했다.

- 미친놈. 심각한 편집증에라도 걸린게 아니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없을텐데.

루비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 감사하지만, 사실 걱정이 약간과하신 것 같기는 해요.”

- 제국 4검주들이 대체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이런 여자애 하나 암살하러 여길 오느냐? 어마어마한 괴물을 토벌하거나 수만금을 받고 누군가의 아주 아주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겠지.

“그런가.

- 정신병 자랑하지 말고 얌전하게 따라가거라. 검주는 아니라도 골목불량배 정도는 붙을지 모르니까.

핀잔을 들은 나는 조금 무안해져, 가만히 은신 스킬을 쓰고 루비아를 따라붙었다.

“후아.

루비아는 기지개를 켜고, 깊게

심호홉을 했다.

달리아크에서 가까운 포목점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무얼 찾으시나요?”

느긋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 여성이 지키고 있는 가게였다. 내 눈엔 별특별한 점은 없어 보였다.

나는 은신 상태로 한구석에 기대있었고, 아이작도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 야, 긴장하지 마라. 은신까지 한 주제에.

루비아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연스럽게 포목점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문 앞에 걸린 겨우살이 리스가 너무예뻐서요. 저도 모르게 그만 들어와 버리고 말았지 뭐예요?”

여주인은 그 한마디에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난 있는지도 몰랐는데 꽤 자랑스러워하던 장식이었나 보다.

“제가 직접 만든 건데, 그렇게 말해주는 손님은 처음이에요.”

“정말 너무 아름다운 걸요! 아, 이렇게 들어온 것도 인연인데 천 좀보여 주세요. 마침.

그렇게 5분이 지나자 루비아는

여주인네 집 포크 개수를 알 정도로 친해져 있었다.

“아, 그런데. 이 천을 보니까지나오면서 봤던 흰 무지개가 생각나네요. 굉장히 기억에 남았어요.”

무지개는커녕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는데. 루비아가 눈 하나 깜짝안 하고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꺼내는 데에 놀랐다.

의외로 거짓말에 소질이 있는지도 모른다.

포목점 주인은 무료한 일상에 좋은 이야깃거리가 생겼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어머나! 흰 무지개요?”

“네. 그런 건 정말 처음 봤어요.

안개에 휩싸인 것도 같고. 전혀엉뚱한 곳에 반원형을 그리는 게 어찌나 신기하던지.

“어때요? 저 잘했죠?”

밖으로 나온 루비아는 뺨을 사과처럼 붉힌 채 물었다.

“상상도 못 했는데.”

“헤헤, 도움이 될 수 있다니 너무기뻐요.’

눈꼴사납구나.

“포목점 주인분의 반응이 굉장히 좋던데. 아이작 님도 슬쩍 도와준거죠?”

- 흥. 가벼운 주술을 걸었느니라.

이제 저 녀석이 앞장서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게 분명하다. 너는 마중물 역할만 하면 된다. 다음 장소로 이동해라.

다음 날까지.

온갖 가게를 들르며 루비아는 천연덕스럽게 제 역할을 해냈다.

“이쯤이면 됐을 거 같은데.”

“이제는 정말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미 퍼졌으려나?”

그렇게 꽃집, 옷집, 구둣방을 거쳐 빵집에 들른 뒤 밖으로 나와 함께 거리를 걸었다.

추운 겨울인데도 흩겹 옷만 입은 남자아이가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어휴. 가엾네요.”

루비아가 막 구워진 빵을 조그린 아이에게 내밀었을 때였다.

“이해 없는 연민은 사실 별다른 도움이 되질 않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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