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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10화 (210/458)

211화 9:1 (6)

나는 괜히 뒤를 돌아봤다.

모래와 지평선밖에 없었다.

탐지 영역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누군가가 쫓아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월 본 것도, 들은 것도 아니다.

추적 장치도 떼어 냈다.

어차피 막연한 기분에 불과하다.

내 감이란 게 지금껏 맞은 적도 별로 없다.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고, 사막에 숨을 곳 따위는 더더욱 없다.

착각일 게 분명했다.

상인들이 우리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 댔다.

“어디에서 오신 거요?”

“아만에서 왔어요.”

“그쪽 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 긴여행을 하셨군.”

“뭐, 그렇죠.”

루비아는 슬쩍 들어오는 더 깊은 질문을 차단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도망자다.

어디까지 삼촌의 수배령이 내려져있을지 모르는데, 에라스트 출신인 걸 밝혀서 득이 될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꾸캐물어 댔다.

“사막은 처음이시오?”

“네.”

“딱 봐도 그런 것 같았지. 낙타가 아니라 말을 사서 오다니. 준비도안 되어 있고 말이지. 하하핫.

- 뭐야? 서부 사막 횡단하는 것도 아닌데, 얼마 가지도 않을 건데 말이면 어떻고 낙타면 어때.

살짝 무례해지는 놈들이 짜증 나긴했지만 적당히 참아 냈다.

애초에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하며 호의로 접근한 인간들 아닌가.

“갑옷에 문장이 새겨지지 않아서 그러는데. 기사님의 가문을 알려주실 수 있으시오?”

“이름 있는 가문은 아니다.”

“그러시군.

상인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녀석들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어쨌건 우리를 만난 걸 행운으로 생각하시오. 성지까지 가장 빠른 길로 가게 해 드릴 테니까.”

“가장 빠른 길?”

“그렇소.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 가장 빨리 성지로 가는 길이오.”

그렇게 말한 구불구불한 수염의 상인이 낙타 옆에 매달린 육포를 집어서 내게 건넸다.

시원한 물이 담긴 가죽 주머니도 함께였다.

“안 드시겠소?”

손을 내저어 거절했다.

물 한 모금 안 마시는 걸 수상히 여길 염려도 있었지만, 경계심이 강한 거라고 해석해 주길 바랐다.

상단의 후미에서 앞을 바라봤다.

사막에는 신기루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온통 모래뿐이었다.

이곳이 한때 아이작 말대로 무척번화한 곳이었다는 게 쉽게 믿기 어려웠다.

루비아도 못 들어 봤다는 이야기 아닌가?

지어낸 이야기거나, 정말 오래된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상인들을 따라서 한 시간 정도를 갔을 때였다.

뒤에서 기척이 잡혔다.

말에 탄 누군가가 내 쪽을 향해똑바로 달려오고 있었다.

말이 모래를 박차는 소리, 후드가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가 저 멀리서 느껴진다.

반사적으로 탐지 스킬에 한층 더집중했다.

기척은 탐지 범위의 끄트머리에 걸쳐 있었다. 인간에게 보일 만한 거리는 아니지만 빠른 속도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상대가 누군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먼 거리에서 정체까지 느낄 수 있다는 건.

아주 익숙한 상대다.

레나가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녀 혼자서.

나는 짐짓 모른 척을 하고 태연히 말을 몰았다.

목적은 모르지만, 레나 하나라면 내가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다는 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괜히 아이작에게 말해 봐야, 혹시바닥에 함정을 놓으라든가, 이상한 주술을 쓴다든가 해서 일을 꼬이게 만들지도 모른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녀가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적어도 쫓아오는 걸 못 하게 막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혼자 나를 쫓아오는 걸까.

나냐우도, 샤루니안도 없이.

레나가 그렇게 막무가내일 리가 없는데.

“아.

루비아의 작은 탄식이 딴생각에 빠진 나를 깨웠다.

“투명하네요.”

그녀가 하늘을 가리켰다.

사막으로 한참 들어가자 초입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작은 호수 하나, 오아시스 하나보이지 않으면서도 사막의 하늘은 또렷하고 푸르게 변했다.

더위 때문에 지친 기색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루비아는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정말 선명하네요. 이런 말은 좀어색할까요? 하늘, 땅. 구름과 저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랬다.

나 역시 사막은 처음이었고, 이 정도의 ‘맑음’도 처음이었다.

내가 헤매고 다녔던 어떤 남부와 중부에서도 이 정도로 맑고 깨끗한 하늘은 없었다.

- 흥. 맑은 거 너무 좋아하지 마라.

일 년 내내 이렇게 맑으면 아무도 못 사는 황야가 되어 버린다.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싶었지만,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기 때문이죠? 기상학 책에서 읽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지 못할 만큼 아름답네요.”

그때 였다.

모래 언덕 너머로 인간 스무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공교롭게도 지금 동행하는 상단과 정확히 같은 숫자라, 자연스럽게 비슷한 부류의 녀석들인가 생각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모습들을 보니 평범한 상인 같지는 않았다.

타고 다니는 낙타에 거래할 봇짐따위는 실려 있지 않았고, 양손에 활이나 창칼을 들고 우리를 겨누며 곧장 다가왔다.

하얀 터번으로 얼굴을 둘둘 싸고, 위는 붉은색, 하의는 하얀색으로 옷을 맞춰 입었다.

아무리 봐도 호의를 가지고 접근하는것 같지는 않은 무리다.

“일단 정지!”

선두에 선 거한이 길을 막았다.

놈들이 잔뜩 끌고 온 모래 먼지가 루비아에게 닿지 않도록, 검신의 넓적한 부분으로 칼을 휘둘렀다.

강한 바람이 생기며 모래 먼지가 좌우로 갈라졌다.

행렬의 후미에 있어서 우리에게 특별히 신경 쓰는 녀석은 없었다.

꽉 쥔 주먹 크기가 루비아의 얼굴정도 되는 거한은 무거워 보이는 칼을 한 손으로 붕붕 돌려 대면서 다른 손으로는 입 부분의 터번을 아래로 슬쩍 내렸다.

“통행세를 내놔라!”

- 사막 도적단이군.

아이작이 짧게 녀석들의 정체를 품평했다.

“경매소에서 나에게 팔려고 했던 위험 정보가. 이거였을까?”

- 흐흐흐. 글쎄다.

만약 이 녀석들이라면.

아이작 말대로 정보를 사지 않길잘했다고 생각했다.

36세이론의 가치는 없다.

앞에 나선 도적단 두목은 그나마강해 보인다.

벤슨 프레쳐나 유블람 경비대장정도는 될 것 같았지만, 그래 봐야 주먹으로 살짝 치면 머리가 멀리떨어져 나가면서 즉사할 거다.

하지만, 정말 달리아크에서 이런녀석들을 ‘위험’으로 판단한 걸까?

스무 명의 무장 강도단이긴 한데.

돈을 뜯어내기 위해 위험을 잔뜩과장한 건지도 모른다.

“사막에서 강도라니. 장사가 잘될까요?”

나를 믿고 있는 건지, 루비아도 긴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우리와 함께 가는 상인들에게도 전혀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구불구불한 수염의 상인 두목이 앞으로 나섰다.

“<사막의 독사>로벤 님이시군요.

통행세는 마련했습니다.”

“흠.

둘은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둣, 관례처럼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주고받았다.

“통행. 세?”

달려들어서 물건을 다 빼앗을 줄알았는데, 신기한 광경이었다.

“강도 짓도 오래 해 먹으려면 항상싸울 수는 없으니까요. 이긴다고 해도 수배가 붙을 거고요. 적당한 선에서 통행세 받고 보내 주는 게 보통이래요.

서로 좋은 거죠.”

루비아가 옆에서 설명했다.

- 모험기에서 읽은 장면을 실제로 보니까 아주 즐거운 모양이야? 응?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보세요, 이제 우리를 보내 줄.

그때 였다.

가죽 주머니를 연 ‘사막의 독사’

로벤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이거 봐, 예오만 씨. 단골이라고 깎아 달라는 거야, 뭐야? 평소보다둘이나 더 지나가면서 가격은 왜 반도안 주는데? 한번 해 보자는 거야,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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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다루니 짧게 잡았소. 아껴가며 쓰시는 거야 자유지. 솔직히 나도 끌릴 정도인데, 당신들에게 넘기는 건 정말 대출혈 서비스요!”

상단주가 푸르른 사막의 하늘을 향해두 팔을 활짝 벌렸다.

루비아는 자기가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귀를 막아 주고 싶을 정도로 더러운 말이었지만, 아이작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머리 위를 날면서 큭큭거렸다.

‘사막의 독사’는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그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뒤탈 없는 것들이겠지?”

“아만 출신도 아닌 녀석들인데. 죽어자빠진다고 누가 알겠소.”

상인들이 우리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터번을 두른 도적들이 메웠다.

“지금. 다들 뭘 하려는 거죠?”

- 흐흐. 인간이 인간 하는 거지, 뭐 다른 걸 하겠나?

“여기까지 우릴 제물로 데려온 거군.”

- 그나저나 너무 싸구려로 팔린 거 아니니? 좀 자존심 상하지 않아?

고작해야 상단 통행세로 팔리니까기분이 많이 안 좋겠네. 싸워라!

싸워라! 이기는 편 우리 편?!

아이작은 또 왜 저렇게 신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예쁜이, 안녕?”

- 대사 전형적이고!

도적 두목이 칼을 획획 돌리면서 우리 쪽으로 접근했다.

아이작은 위를 날아다니며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놈이 지나치게 신난 것 같아 문득 짜증이 났다.

품을 뒤져 은화 몇 개를 꺼냈다.

도적 두목에게 물었다.

“통행세 받을 생각 없나? 후하게 쳐주도록 하지.”

“크하하하하하!”

우리를 둘러싼 스무 명의 도적이 일제히 웃었다.

몇 명은 활로, 몇 명은 긴 창으로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독사>로벤이 말했다.

“뒤탈 없는 것들에게까지 뭣하러통행세를 받아? 다 벳고 죽여서 모래에 묻으면 그만이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주위를 둘러봤다.

뒤로 빠진 상인들은 아예 2차로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었다.

몇 명은 아예 칼을 빼 들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단순한 구경거리이상이었다.

희생양이 만에 하나 도적단에게서 도망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상인들까지 뚫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러는 거죠?”

“철저히 입을 막기 위한 거겠지.

탈출한 자들이 이 일을 퍼트린다면 곤란할 테니까.”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으면서도.

루비아는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일에는 유독 어두워진다.

공포 때문일까?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혹은 밑바탕에 깔린, 인간에 대한 신뢰 때문일까.

처음 그녀를 만날 때를 떠올렸다.

빼앗을 것도 없는데, 산적이 왜자신을 쫓아오냐고 순진한 눈으로 묻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능력치가 조금 오르기는 했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그녀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도적 두목이 루비아에게 두꺼운 칼을 겨누며 말했다.

“후후후. 네년을 내 노예 목록에 추가시켜 주마.”

루비아는 혹시 무슨 마가 낀 게 아닐까.

왜 저런 것이 계속 꼬이는 걸까.

한두 번이 아니다.

네크론 신사회.

유블람 경비대.

이제는 저런 것들까지.

나는 슬쩍 대검을 들어 올리면서 두목에게 물었다.

“너희들, 이런 일이 자주 있나?”

한 손으로 대검을 너무 쉽게 들어올려서 일까.

낄낄대는 분위기가 한순간 조금경직됐다.

두목은 한 걸음 뒤로 물러가며, 내말에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런 칼을 쓰니 힘은 제법 있는 모양이군. 함께할 텐가?”

“함께. 하자고?”

“그래. 같이 돌리자고. 아가씨의 수행기사 따위를 하는 모양인데. 솔직히 말해 봐. 많이 굶주렸지?”

“흐흐. 저런 몸매를 옆에서 보며 안 그랬을 리 없잖아. 대체 얼마나하고 싶었을지 상상도 안 돼. 좋아!

대출혈 서비스다. 네가 1번이야.

여기서 사막에 시체로 묻히느냐, 평소에 꿈만 꿨던 걸 하고 우리와 함께하느냐! 쉬운 선택이지.”

덩치 큰 ‘독사’의 커다란 목소리가 사막에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어느새 열 대가 넘는 화살촉이

빼곡히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때 였다.

- 피리리리릭!

쿠크리가 날아와서 도적 두목의 칼을 든 손목을 날려 버렸다.

손목에서 피가 뿜어져 허공으로 분수처럼 뿌려졌다.

- 다그닥! 다그닥!

아까부터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던 레나였다.

은신 스킬을 쓴 탓인지 도적들은 레나의 존재조차 감지하고 못하고 있었다.

- 피리리릭!

부메랑 하나가 더 날아와서 도적두목의 남은 손목을 잘라 버렸다.

어느새 십여 미터로 거리를 좁힌 그녀가 후드를 살짝 내리고 차갑게 중얼거렸다.

“이런 게 출혈 서비스지. 서비스더 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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