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13화 (213/458)

214화 9:1 (9)

눈앞에서 다른 선택지들이 사르르지워진다.

객기를 부린 걸지도 모른다.

세계. 부정이라니.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유혹하듯 흐릿흐릿하게 깜빡이는 상태창에 속아 넘어간 느낌도 든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빨리 얻을 수 있는 보상을 선택해야 했을까?

5%를 골라 괜찮은 무기를 얻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도 마음에 걸린다.

설마 더 이상 반복해서 살아나지 않는다는 뜻일까?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일단 전진하는 수밖에.

그 아래로 이어진 레벨 업 메시지를 치우고, 적당히 포인트를 분배했다.

간만에 확인하는 상태창이다.

[Lv.28(226)]

[체력: 81]

[힘: 93]

[민첩: 84]

[지혜: 70]

예전에 에라스트 성에서 한차례 날된것과, 유블람 여관에서의 일, 그리고 레라지에의 성지에서 얻은 경험치에다, 이번에 ‘사막의 신’까지 해치우고 난 결과다.

주로 루-륨에 신경을 써 왔지만, 레벨이 상승할 때마다 스탯 분배는 빠짐없이 꼼꼼히 하고 있었다.

굉장하다면 굉장한 수치다.

웬만한 수준에서는 내게 손도 대지 못한다.

스킬이 전혀 없어도, 단순한 힘과 속도로만 밀어붙여도 부대 하나를 박살 낼 수 있는 힘이다.

내가 속했던 해골병사들이나 그에 맞부딪친 노예병의 전열戰列 정도가 아니라, 숙련 장창병이나 방어력이 높은 중보병 부대도 혼자 어렵잖게 박살 낼 수 있을 거다.

B더블 플러스라는 높은 랭크의 녀석을

이렇게 쉽게 잡은 것도, 꾸준하게 쌓아 온 스탯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연한 소리다.

“당신. 정말 대단하던데.”

어느새 곁에 다가온 레나의 말이 나를 상념에서 깨웠다.

“고맙다. 네가 큰 도움이 됐다.”

디디고 잡을 마디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훨씬 시간이 걸렸을 거다.

지반이 단단한 것도 아니고, 녀석은 잡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으니까.

“내가 뭘. 멍하니 구경만 했지.”

그녀가 날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씩 묘해진다.

기억 없는 레나에게 이런 호의적인 시선을 받자 복잡한 마음이 든다.

“혹시 당신 일행, 어디 소속된 게 아니면 우리 길드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말도 끝까지 안 들어 보는 거야?

매정한데.”

“추적 장치까지 달아 놓은 자들과 합류할 생각은 없어서.”

“.흐응.”

레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물론 추적 장치가 이유는 아니지만, T&T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레나라면 몰라도 T&T 의 다른

녀석들과 연을 맺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와 새롭게 얽히고 싶지 않다.

루비아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고, 모험이라는 명목으로 방황하게 하고 있는 처지다. 레나가 눈썹을 살짝내리며 말했다.

“너무 단호하게 자르시네.”

흘끗 시선이 마주쳤다.

상처받은 표정이 보였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정말 권유대로 T&T에 들어갈까 망설이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고개를 돌렸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거대한 애쉬웜의 사체에서 초록색빛이 올라온다.

정수 흡수의 시간이다.

가만히 손을 뻗었다.

레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 모습을 바라본다. 저번 생에도 확인했지만, 그녀는 이 빛을 보지 못한다. 물론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다.

권능을 전수해 준 기스-제-라이 자신을 제외한다면.

[사막 적응 Lv.l.]

[사막 적응 Lv.2.]

[사막 적응 Lv.5를 흡수했습니다!]

홉수 속도가 꽤 빠르다.

[해당 지형(사막)에서 다음 효과가 주어집니다.]

- 경험치 습득 15% 상승.

- 지형 패널티를 받지 않습니다.

- 오아시스와 야자나무를 발견할확률이 3배 상승합니다.

- 모래 폭풍과 조우할 확률이

65% 감소합니다.

- 유사流砂를 감지합니다.

단번에 5랭크의 지형 적응까지

흡수해 버린다. ‘사막의 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녀석인 만큼사막 적응은 확실한 모양이다.

모래 아래로 거대한 몸을 자유롭게 운신하던 녀석이니 이 정도 되어야 맞기는 하다.

사막 적응을 끝내자 초록색 빛이 반쯤 사그라든다.

계속 정수를 흡수하자 재미있는 게 나왔다.

[특전: 사무친 원한]

[예메라에게 터무니없이 살해당한 자들이 가지게 된 원한입니다. 예메라를 섬기는 적에게 15%의 추가 데미지를 가합니다.]

예메라의 추종자를 적으로 얼마나만나게 될지는 몰라도, 15%의 추가 데미지라면 당연히 나쁘지 않다.

흡수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혼백 씹고 뱉기(희귀) Lv.l 을흡수합니다.]

- 살해한 상대의 혼백을 씹은 뒤뱉어 냅니다. 영격靈格을 보존하게 할 수 없으며, 약한 상대의 혼백만 가능합니다. 마력이 아주 미약하게 차오릅니다.

까닿게 변해 있던 상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렇게나 씹힌 건 그 녀석들의 육체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체력 스탯이 1포인트흡수되며 애쉬웜에게서 뿜어 나오는 초록색 빛이 사라진다.

“당신, 방금 뭘. 한 거지?”

“글쎄. 죽은 자의 유지를 이었다고 해 두지.”

정수를 볼 수 있는 것도, 그리고 흡수할 수 있는 것도 이 세계에서 나와 기스-제-라이 둘뿐이다.

거대한 녀석을 처리한 것치고 초록빛정수는 꽤 빨리 사라졌다.

스랫이 오르면 오를수록, 흡수로 얻을 수 있는 능력은 무척 빠르게 줄어든다.

납득할 만한 일이다.

이게 계속 유지된다면.

기스-제-라이는 혼자서 이 세계를 멸망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금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레나는 애쉬웜의 영역 밖으로 끌어다 놓은 상인에게 사뿐사뿐 다가갔다.

그 많던 상인들 중 레나가 끌어다놓은 단 한 명만 살아남았다.

상단장의 곁에 있던 남자다.

부두목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레나가 칼을 빙빙 돌리더니 녀석의 가슴팍에 대고 물었다.

“말할 기회는 줄께. 흉측하고 커다란벌레는 어디서 나온 거지? 피리는 누가 준 거고?”

결박당한 상인이 모래 위에서 뒤로 주춤거린다.

“끄으. 일단 날 살려 준다고 약속해 주쇼! 전부 다 이야기할 테니!”

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까? 어렵지 않지.”

상인의 눈빛에 희망이 스쳐갔다.

“당신들이 모를 비밀까지 다 말해주겠소. 그러니 낙타 한 마리도.

같이 준다고 약속해 주쇼.”

레나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상인의 눈앞에 내보였다.

“던져서 앞면이 땅에 닿으면 살려주고, 낙타와 물까지 다 줄께.”

상인은 침을 삼키며 앞면과 뒷면을 확인했다. 앞뒷면이 다 있는 평범한 동전이었다.

“던질 때 내가 던져도 되나?”

“그래. 마음대로 하라고.”

레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의 얼굴에 완연히 화색이 돈다.

동전 정도는 원하는 쪽으로 나오게 던질 재주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는. 크흠! 사실 사막 최고의 도적단이었지.”

녀석은 보라는 듯 제 팔뚝을 움찔거렸다. 레나가 대신 소매를 걷어줬다. 굵은 팔뚝에 새겨진 긴 꼬리전갈 문신이 드러났다. 레나가 놈의 문신을 살살 만지며 말했다.

“호오. 너희가 바로, 그 유명한 <독주머니>구나?”

상인이 레나의 손이 닿은 팔뚝을 씰룩거렸다.

“딱 맞췄소. 아가씨가 뭘 아는군.

지금은 단원들 이름까지 전부 다바꿨지만. 대단했소이다. 상인들에게 강탈한 짐이 워낙 많아서, 이렇게 상단을 차려 버릴 정도였으니까.”

‘재밌네. 계속해 봐.”

남자는 숨을 한 번 흑 들이쉬더니 말을 이었다.

“한창 여행자들을 사냥할 때였지.

몇 명은 일부러 풀어 주고 화살 쏘기 연습을 하는데, 한 남자가 이쪽으로 똑바로 다가오더군. 머리를 싹 밀고 검은 수도복을 입은 남자였는데.

나이는 40 초반 정도였소.”

레나는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남자의 문신에 손을 얹은 채 조용히 집중하고 있었다.

전직<독주머니>도적단원 상인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수도자들을 대하는 방식이있소. 깊은 유사流砂에 빠뜨려 놓고, 네가 섬기는 신에게 기도해서 도와 달라고 하게 만드는 거요. 유사에 빠져 본 적 있으시오?”

레나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없지.”

상인은 두 손이 뒤로 묶인 채로도, 은근히 의기양양한 태도로 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발이 아래로 들어가는 건 부드러운데, 밖으로 빼내려면 마치 딱딱하게 굳은 돌에 박힌 것처럼 빠지질 않는다오.

그렇게 점점 아래로, 아래로 몸이 단단하게 고정되지.”

레나는 ‘상인’에게 보여 준 은화를 손가락 위로 가볍게 굴렸다.

방패가 그려진 앞면과 밀이 그려진 앞면이 손가락 하나를 지날 때마다 한 번씩 뒤집히며 빠르게 지나갔다.

“듣고 있어.”

“하지만 그 수도승은 달랐소. 칼로 위협해 유사에 들어가게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지. 우리는 신을 불러보라고 했소. 그는 품에서 피리를 꺼내 들더군. 그리고.!”

“재가 나타난 건가?”

레나가 애쉬웜의 거대한 사체를 가리켰다.

“그렇소! 수도사를 아래에서부터 태우고 꺼내더군. 우린 다 죽는 줄알았다오. 지, 진짜로 ‘신’이 나타나다니.r

“수도사는 어떻게 생겼지? 생긴 걸 자세히 말해 봐.”

“얼굴이 길고 홀쭉했소. 눈은 움푹파였고. 머리를 밀기는 했지만, 좌우로 숱이 좀 빠졌소이다.”

“흐음.”

“우리를 죽이는 대신, 그는 거짓말처럼 피리를 불어서 다시 ‘신’을 모래아래로 사라지게 했지. 그리고 두목에게 피리를 건네주며 말했소. 원하는 대로 행패를 부리며 사막을 돌아다니다가. 감당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나면 피리를 불라고. 그러면 계약에 따라 ‘신’이 적을 해치워 줄 거라고.”

“그걸 믿었나?”

“솔직히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지.

하지만 일단 고이 가지고는 있었소.

버렸다간 무슨 화를 당할 줄 알고?

그러다 당신들을 만나 이렇게 된 거지.

이야기는 여기까지요.”

“좋아.”

현직 ‘상인’이 눈을 깜빡였다.

“이제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동전을 던질 테니 나를 이만 풀어주시오. 앞면이 바닥이랬지?”

레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으로는 놈의 포박을 끊어 주고, 다른 손은 앞으로 내밀었다. 가느다란손가락 위에서 앞뒤로 뒤집히던 동전이 상인의 눈앞에서 반짝였다.

“그럼.

남자가 막 동전을 집으려는 순간이었다.

- 과득!

5로티짜리 은화가 레나의 손가락위에서 절반으로 접혔다. 방패가 그려진 앞면이 아예 사라졌다.

“던져 봐.”

“이. 이게 무슨 짓이오!”

“평소에 하는 짓인데?”

tt 끄으으.!”

상인은 끙끙대며 양손으로 은화를 다시 펴려고 했다. 하지만 레나가 손가락 두 개로 접은 은화는 전혀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상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는 찰나에 레나가 놈의 목을 그었다.

모래 위에 피로 한 획이 더 그어졌다. 상인은 몸을 두어 번 움찔거리다 그대로 죽었다.

“.깔끔하게 접었군.”

나는 반으로 접힌 은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그게.

레나는 나를 잠시 잊었던 것처럼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인’의 이야기에 꽤나 몰입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요즘 수도에서 유행이라서.

내가 너무했나?”

유행이라 따라 했다고 하기에는, 손가락으로 동전 굴리는 게 한두 번해 본 솜씨가 아니었지만.

문제 삼을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변명할 필요는 없다. 잘했어.”

레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과거의 그녀가 겹쳐 보였다.

분위기가 이상해져 말을 돌렸다.

“놈이 이야기한 수도사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나?”

“응. 잿빛 추기경 그레이시엄. 예메라의 사제장이야. 사막 지대인 제국서부에 던전이 많다는 이야기는 당신도 들었을 테지?”

“그래서?”

“자극할 수 있는 마물들을 모조리자극해서 출현시킨 뒤. 그 핑계로 군사를 일으켜서 대대적인 토벌을한다. 서부를 휩쓸고. 연합을 친다.

그게 지금 황제의 계획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