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9:1 (10)
“숨어 있던 녀석들까지 한차례 다쓸려 나가겠군.”
아직 몬스터들이 많이 남아 있는 서부 사막.
하지만 그 대부분은 특별히 모래가 좋아서 여기 살아가는 게 아니다.
작렬하는 태양과 한 줌 습기조차 없는 메마른 공기.
그 환경보다도 인간이 두려운 탓에 사막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을 터.
하지만 황실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다면, 그들이 완전히 멸절될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놈들에게 닥칠 시련에 묵념이라도 보내자고. 그런데. ‘상인’들 물건은 내가 가져가도 될까?”
시체를 뒤지면서 누구에게 승낙을 구할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묘하게 쑥스러워 보인다.
“얼마든지. 다 가져도 좋다.”
“고마워.”
레나는 능숙하게 상인들의 시체를 뒤지며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와 전리품을 다툴 생각은 전혀없었다.
초록색 빛도 안 나오는 녀석들에게 별건 없을 거다.
레나가 시체를 뒤지는 모습을 보는건 꽤나 오랜만이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전쟁 전의 대대적인 서부 토벌.
이런 사건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한 행동이 미래를 바꿨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
나비효과라고 생각하기에도, 이번생에는 황실과 관련된 행동을 거의 한 적이 없다.
굳이 따지면, 삼촌으로부터 탈출한 루비아를 살려 낸 것 정도.
그 외에는 에라스트조차 가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여관에서 몇 명을 죽였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이런 큰변화가 일어날 리는 없다.
게다가 서부를 휩쓰는 이 작전이 하루아침에 세워진 것도 아닐 테고.
물론, 그저 내가 이 역사적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도 높다.
아니면 서부 사막 토벌은 분위기만 잡아 놓고, 빠르게 한탕 끝낸 뒤전쟁에 돌입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예 그쪽에 주의만 돌리게 하고 다른 일을 벌이는 건지도.
어느 쪽일까.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 후후후.
어느새 날아온 아이작이 관심 좀가져 달라는 듯 웃음을 홀렸다.
- 사막은 오래간만이구나. 더위도 추위도 느끼지 않는 몸이 되어 오니 꽤나 새롭구나.
사막은 또 언제 와 봤다는 건지 물으려다 관뒀다.
지금은 시꺼멓고 웃기는 인형 속에 들어가 있지만, 어쨌거나 수백 년전에 제국의 절반을 지배한 경력이 있는 놈이다.
옛날 얘기를 물었다가, 끝도 없이 제 자랑만 늘어놓을 게 뻔하다.
가만히 있자 놈이 말을 이었다.
- 잘 싸우더구나. 아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보지만 말고 조금쯤은 도와주지 그랬나.”
- 혼자도 잘하는데 뭐 하러. 원래혼자 사는 세상이야. 혹시 ‘보인’ 건 없었느냐?
아이작은 꾸준히 상태창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녀석에게는 역시 아무것도안 보이는 모양이다.
애쉬월을 잡으며 자세한 상태창이 뜨기는 했지만, 굳이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놈이 나에게 도움이 되거나, 좋은 정보를 제공할 때만 나도 아는 걸 말해 줄 생각이다.
“보이면 말할 테니 일일이 귀찮게 물어보지 마라. 그보다. 너, 서부사막에 이런 녀석이 있다는 걸 정말 몰랐냐? 와 봤다면서.”
- 내가 이런 시골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 게다가 얼마나 오래전에 왔는데. 그걸 기억하냐?
아이작이 날개를 파닥이며 부인할때였다.
“전혀 놀라지 않으셨잖아요.”
뒤따라온 루비아가 끼어들었다.
아이작이 움찔하며 부정했다.
- 그럼 이 몸이 고작 저런 거에 놀라야 되냐?
“놀라지 않은 정도가 아닌던데요.
고개도 끄덕끄덕하셨잖아요. ”
- .짐작이야 했지. 하지만 뭐가 어디서 나올지 딱 알 수야 있느냐.
설사 안다고 해도. 안 알려 주지.
뭐라고?
사막 적응 스킬은 유사流沙를
탐지할 수 있다.
아이작을 거기에 확 파묻어 버리고 싶어졌다.
“안 알려 준다고?”
- 삶이라는 건, 일단 부딪쳐 보는거지. 왜 이렇게 도전 정신, 모험정신이 없냐?
설마 그런 생각으로 달리아크에서 위험 정보를 사지 말라고 한 건가?
저런 당당한 태도를 보자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루비아가 나섰다.
“아이작 님이 부딪치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시는 거죠. 아이작 님이 야말로 부딪치기 싫어서 무덤 안에 계속 계셨던 거 아닌가요?”
- .요즘 젊은것들은 틀려먹었어.
도전 정신도 없고, 말대꾸나 따박따박하고 말이야.
놈이 구시렁거리다가 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날아갔다.
아이작이 사라지자, 루비아가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 으세요?”
“뭐. 그럭저럭.”
모래를 좀 뒤집어쓰긴 했지만, 적어도 크게 어디 부러진 곳은 없다.
루비아의 빵이 사과처럼 빛난다.
꼭 사막의 더위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멋지다고 생각해 버렸거든요.
걱정해야 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저렇게 거대한 존재를 상대로.!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장면이었어요.!”
레라지에의 성지에서 ‘부스러기’를 쓰러트릴 때는 아이작에게 기절해있던 상태였으니, 이렇게 싸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인 셈이다.
“그런가. 다친 데는 없고?”
“저는 당연히 멀쩡하죠! 아무것도안 하고 뒤에서 보기만 했는걸요.”
그때 였다.
상인들의 시체를 탈탈 털던 레나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루비아가 계속 얼굴이 상기된 채 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봤어요! 같이 싸우는 모습이 정말 멋지시던걸요.”
- 화르록.
레나는 팔에 달린 와이어를 차분히 정리하며, 루비아의 말을 무시한 채 내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이런 곱게 자란 아가씨는 어디서 데려온 거지? 당신과는. 그리고 이런사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가씨인데.”
루비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맞아요. 싸우시는 걸 보면서 사실주눅 들었어요. 저는 그렇게 도움이 될 수 없으니까요.
루비아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아니. 무척 도움이 된다.”
당연히 빈말은 아니다.
루비아에게 비밀로 하고 있지만, <서번트 시스템>의 놀라운 효과만 해도 그녀를 계속 데리고 다녀야 할 중요한 이유였다.
루비아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사실 아니지만.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루비아의 호감도가 1 올랐다는 문구가 허공에 떠올랐다.
앞에 서 있던 레나의 표정이 문득 미묘해진 게 느껴졌다.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내가 무슨 말실수를 한 건가?
“.으음.”
곤란했다. 뭔가에 끼인 느낌인데,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말 한 마디만 잘못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되돌릴 수 없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리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힘이나 민첩, 검기나 마법 따위는 완전히 무용해지는 느낌이었다.
몇 초가 흘렀을 때였다.
“하.
레나가 숨을 뱉으며 뒤로 한 발물러났다.
“전갈 조심하라고.”
그녀가 발로 ‘상인’의 문신을 툭차며 말했다.
루비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충고 감사드려요. 제가 또조심해야 할 건 없나요?”
레나가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아가씨로군. 당신들.
혹시라도 너무 서북쪽으로는 가지 않는 게 좋아.”
레나가 루비아와 나를 번갈아 돌아보며 말했다. 주위에 팽팽하던 묘한 기류가 사그라졌다.
나는 그제야 레나에게 물었다.
“그건 왜지?”
그녀는 눈썹 안쪽을 살짝 찡그리고 심각한 느낌으로 말했다.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들어 본이름인가?”
“어. 아는 사이세요?”
루비아가 나를 바라봤다.
전혀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옆에 붙은 탓에 한순간의 미세한 동요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눈치 빠른 레나도 날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잠깐 딴생각을 했다.
놈이 어쨌다는 거지?”
“흐음.
레나가 말을 이었다.
“제국 푸른 사자 기사단 총단장.
4검주의 일익을 맡고 있는 남자지.
그가 서쪽에 바실리스크를 잡으러갔다고 하더군. 막 시작한 따끈한 작전이라고 들었어.”
바실리스크 사냥 작전.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다.
후작이 바실리스크를 잡는 임무를 맡았다는 건, 레나와 함께한 마지막생에서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정확한 작전 기간이야 몰랐지만, 이때 즈음이었구나.
“그러면.
“마주치면 아주 곤란하겠지. 너무서북쪽으로는 가지 마.”
괜한 허세를 부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레나 정도 된다면, 후작과 지금 내 힘의 차이는 당연히 절 수 있을 거다.
“정보 고맙다. 가격은?”
“먼저 받고도 물어봐 주는 거야?
좋은 손님이네. 하지만. 이 녀석들시체를 혼자 털게 해 준 보답이야.
적당한 값이라고 생각해.”
레나가 은화를 모은 듯한 커다란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런가.”
레안드로 후작.
푸른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녀석을 만난다면 그 자리에서 다시 회귀하게 될 게 뻔하다.
특별한 원한은 없지만.
아니, 오히려 원한이 있는 건 굳이 따지자면 내 쪽이지만.
놈은 아무 원한 없이도 조우하면 내 정체를 알아보고 쪼개려 할 게 뻔하다.
게다가 딱 봐도 불길하게 보이는 아이작까지 함께 있다.
아마 두 배로 수상하게 여길 테고, 절대 그냥 안 지나치고 쫓아오겠지.
‘.진짜 싫다.’
레벨을 올려도 동쪽에서 올리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무척 강해지긴 했지만, 놈을 상대할 자신은 물론 없다.
정보를 말해 준 레나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륨만 찾고. 우리는 여기서 최대한 빨리 빠져야겠군.”
레나가 씩 웃었다.
“행운을 빌어. 만나서 반가웠고.
그럼 난 이만!”
- 히히힝!
레나가 말에 올라탔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조금 의아했다.
“너희도 어차피 루-륨을 찾는 게 아니었나?”
행운을 빈다며 그냥 가려는 그녀의 태도는 묘하게 어색하다. 예메라의 신전까지 따라올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추적 장치를 붙일 정도였으니까.
레나는 말에 탄 채, 비스듬히 허리를 돌려 내쪽을 바라봤다.
“원래 그럴 생각도 있었지. 하지만 싸우는 실력이나. 나한테 다 말해주는 모습을 보니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졌어. 무엇보다.
“무엇보다?”
“더 좋은 계획이 떠올랐거든.”
그녀가 씩 웃었다.
“계획?”
“그래. 이렇게 자잘한 것들 말고, 크게 한 번 제대로 당길 계획.”
“루. 륨을?”
“응.”
솔깃한 이야기였다.
나도 그 은빛 액체가 필요하다.
예메라의 신전에서 찾을 루-륨이 <전직>에 충분할지 어떨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원리나 이유는 몰라도, 그 액체는 회귀한 뒤에도 위치가 유지된다.
단순히 위치뿐만이 아니다.
강한 영향력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아홉 병을 가지고 있던 레나는 그스탯이 크게 올랐다.
지부장으로 만들어 주고 끝냈는데, T&T 본부장이 되어 거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만약 충분한 루-륨을 보유한 뒤, 루비아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그녀에게 넘긴다면?
지나친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다시 회귀할 때, 루비아가 패자霜者급의 강성한 영주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기대감을 안고 레나에게 물었다.
“신전에 있는 양이 자잘하다고?”
“신전뿐이 아니야. ‘밖’에 있는 걸 다 모아 봐야<1>밖에 안 돼.<9>는 다른 데 있거든. 어때? 관심 있어?”
“나머지가 어디 있다는 거지?”
레나가 동북쪽 텅 빈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각도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내가 떠올린 장소를 그대로 소리 내어 말했다.
“황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