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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23화 (223/458)

224화 생매장 (4)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루비아는 내가 원래부터 모든 걸 준비해 놓은 것처럼 착각한 거다.

놀라운 타이밍이다.

<모르는 척해라. 모르는 척.>

블랙베리가 준 거라고 사실대로 고백할까.

하지만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는 루비아의 모습을 보자니, 오히려 그게 더 못 할 짓인 것 같다.

제 마음 편하자고, 그녀가 느끼는 기쁨을 희석시키는 거다.

속았다고 원망받아도 감당하면

그만이다.

여기선 적당히 얼버무리자.

“아, 뭐.

무슨 말을 할까.

쉽게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옷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군.”

빈말은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눈여겨봤는지, 블랙베리가 골라 준 주황 드레스는 루비아의 몸에 딱 맞았다.

맞춤 제작할 시간은 없었다.

블랙베리의 드레스 컬렉션이 대단하리라는 건 쉬운 짐작이다.

“정말. 저한테 잘 어울려요?”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기쁜 둣, 부끄러운 듯 미묘한 표정이다.

“매우.”

드레스도 루비아에게 입혀져 한껏아름다움이 살아났다.

새하얀 진주 구슬이 꽃 모양 허리장식에 올올이 박혀, 시선을 집중시키며 몸매에 자연스레 눈이 가게 만들었다.

저런 진한 색이 이렇게 잘 어울릴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고운피부와 드레스의 진한 색이 오히려서로를 확 살리는 효과가 있었다.

“촉감이 정말 부드러워요.”

루비아는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감탄했다.

- 사록. 사르록.

두 겹 실크 허리띠를 손가락으로 비비며 헤실헤실한 그녀를 보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였다.

안쪽 주머니에 세 겹으로 겹쳐진 검은 카드의 존재가 떠올랐다.

두 손가락으로 카드 뭉치를 잡고 가볍게 움직여 보았다.

- 끼기긱.

부드러운 소리는 나지 않는다.

블랙베리가 전해 준 검은 카드와, 유베가 주었던 카드가 비벼져 작은 마찰음을 냈다.

- 끼긱.

묘한 위화감이 일어난다.

지금껏 만난 ‘상인 연합’의 멤버는 유베와 블랙베리 두 명.

처음에 피혁상 유베를 만날 때는 그가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했다.

유별난 호의와 관심.

무력이나 기계공학 따위의 능력을 보일 때 반짝이던 유베의 눈빛이 떠오른다.

그는 이번 생에서 내게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가도 없이 루비아를 보호해 주고, 캐빈 애슈턴의 책까지 기꺼이 구해 줬다.

보석상 블랙베리는 어떤가.

가게 점원이 손님에게 큰 무례를 범했으니, 진심 어린 사죄 차원에서 수수료를 깎아 준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9할 1푼을 깎아 주는 건 과도하다.

게다가 방금 받은 호의는, 진네이 유베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섬세한 마음 깊은 호의다.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강하다고 해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가?

상인 연합이라.

두 번이 우연일 수는 없다.

- 깡!

아이작이 정강이를 쪼았다.

<뭘 그렇게 멍하게 있냐?>

루비아를 앞에 두고 혼자 생각에 빠져 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아. 티 파티는 언제지?”

“이틀 후예요! 혹시 옷에 먼지가 묻으면 안 되니까. 이제는 벗고 다시 입어야겠어요. 준비해 주신.

평상복으로요!”

루비아는 다시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말할 것 없이 이 옷도 블랙베리가 준비해 준 옷이었지만, 루비아는 세심하게 챙겨 준다며 몇 번이고 깊은 감사를 표했다.

“이런 것까지 생각해 주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으음. 뭐.

“완전 최고예요!”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입술을 꾹다물며 외쳤다.

“그런가.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어서 괜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 티 파티라는 건 어떤 거지?”

“그게. 일단! 찻자리와 다찬회가 있는데요.

신난 그녀에 의해 티 파티에 대한 여러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옷에 대한 감사를 듣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었다.

찻잔을 모으는 유행이 시작된 건 누구누구 공작부인 때부터라든지.

티 파티는 남자는 참가하지 못하는 여자들만의 세상이라 온갖 소문을 다 들을 수 있다든지.

수도의 티 파티는 주로 소규모로 마음 맞는 사람만 부르고, 테이블위의 꽃 장식과 디저트 세공에 힘을 주기로 유명하다든지.

결코 쓸 일이 없을 듯한 정보를 잔뜩 습득했다.

“그래서 꼭 가 보고 싶었는데.

갑자기 말이 끊겼다.

“루비아.?”

루비아는 어느새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었다.

긴 여행 끝에 체력이 소진되었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

티 파티 때문에 흥분하느라 겨우깨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잠들었나.”

뱉은 혼잣말이 그녀가 새근대는 숨결에 섞여 들었다.

잠깐 그녀를 지켜본 뒤에, 살짝들어서 커다란 침대 위로 옮겼다.

푹신한 침대 안으로 그녀의 몸이 폭 파묻혔다.

무척 편안함을 느끼는지 그녀의 눈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까지 고생만 잔뜩 시켰는데.

간만에 긴장이 풀린 모습을 보자, 약간의 뿌듯함과 안도감을 느꼈다.

“아이작.”

<왜. 또 뭐. 자고 있는데 방해하지 마라.>

아이작은 뒤로 벌렁 드러누운 채 발만 까딱 움직이며 대답했다.

방 안의 침대는 무려 넷.

그중 아이작은 가장 넓고 훌륭한 침대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인간 셋이 누워도 될 만큼 넓은 침대에 까마귀가 뒤로 자빠져 있는 모습은.

좋게 말해 우스꽝스러웠다.

“인형이 잘 리가 없잖아.”

<쿨. 쿨. 음냐. 음냐.>

극도로 어설픈 자는 척이다.

잠을 자지 않는 내 입장에서조차 어색해 보일 정도.

오랫동안 자는 걸 안 해서 흉내도 제대로 못 내고 있는 것 같다.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보고 있다, 왼쪽 발에 쥐고 있는 보석에 슬쩍손을 가져다 댔다.

<도둑이야!>

- 파드드득!

녀석은 몸을 뒤로 강하게 돌리며 날개를 괘쳐 일어났다.

푹신한 침대 위에서 몇 번을 발로 껑껑거리더니 매서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곤, 다시 넓은 침대 위를 이리저리 걸어갔다.

<또 얼마나 쓸데없는 소릴 하려고 하느냐? 너랑 말을 섞느니 자는 걸 연습하는 게 낫다.>

“대체 자는 연습을 왜 하는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작은 의외로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중에 인간의 몸에 들어가려면 미리 연습해 둬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인간의 몸으로 세계를 지배할것이니라.>

“인간의 몸? 지금 같은 기계장치에 들어가 있는 게 효율적이지 않나.

루-륨 용량을 키우고 싶으면 그냥더 큰 장치에.

아이작은 내 말을 잘랐다.

<아니. 나는 효율적인 거 싫어해.

효율적인 걸 좋아하면 그냥 죽으면되지. 그게 최고 효율적이야.>

아이작이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뱉는 말은 농담 같은 소리였지만 짙게 깔린 진심이 느껴졌다.

<더럽고, 구질구질하고, 추악하고.

그게 사람이고. 난 그게 좋아.>

<아무튼 너 때문에 잠 다 깼잖아.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상인 연합의 목적은 뭘까? 과한 호의를 계속 받다 보니 불안하군.”

- 파드득!

녀석이 내 무릎에 날아와 앉으며 킥킥 웃었다.

<크크. 웬일로 네 녀석이 이면을 다 읽어 내려는 거냐. 평소 같으면 넙죽 호의나 받고 좋아했을 텐데.>

“혹시 나한테만 이러는 거냐?”

아이작이 부리를 살짝 흔들었다.

<너에게 특별 대우를 해 주는 건.

네가 그만큼 유능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너’라서 특별히 다르게 한 건 없다.>

그렇다면, 푸르손의 추종자들이 나를 섭외하려 한 것과는 성격이 조금다르다.

나는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그라스미어 영주도 회원이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 너 외에도. 어느 정도 세력이나 재주가 있는 자들에게는 꽤 파격적인 호의를 베풀고 끌어들이려고 하지. 다만.>

“다만?”

<능력만 보는 건 아닌 것 같더군.

세상에 잘 알려지거나 제대로 자리잡은 자들보다는 새로운 인물을 더좋아하지. 으음. 그들의 목적을 알고 싶다면, 다시 그라스미어로 돌아가서 기다려 봐라.>

“기다려. 보라고?”

<그래. 영주가 작위를 아들놈에게 물려줄 때까지.>

틀림없다.

챈들러 형빈을 말하고 있다.

내가 검술을 약간 지도해 줬으며, 크리스티나를 호위로 뒀던 인간.

터무니없는 계약을 지킨다고 내게 우겨 댔고, 결국에는 황실이 키우는 애벌레에게 잡아먹혀 버린 남자.

꿈틀대는 애벌레의 등에 나타났던 복사된 얼굴이 떠오른다.

여기서 왜 그가 나오는 거지?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아이작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현 영주도 일단 회원권은 갖고 있었지만. 내게 생명이 빨려 늙어죽어 가던 처지였다.>

“그렇지.”

이 아이작이 어떤 녀석인지 다시 한 번 상기된다.

제 악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영주가 상인 연합과 한창 거래실적을 왕성하게 쌓아 갈 때였지.

그때 상인들 측에서 어떤 제안을 건네려다 멈칫한 적이 있었다.>

서떤 제안이지?”

<말도 안 했다. 슬쩍 눈치로 보면 무척 예민하고 정치적인 사안인 것 같은데. 그때 영주는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신의 작위와, 회원권과 함께 그 ‘제안’은 다음 대代로 넘기 겠다고 했지.>

“아들에게 귀찮고 골치 아픈 건 다떠넘기겠다는 건가.

<그래. 다음 첸들러가 영주로 등극하면, 상인 연합은 ‘그 제안’을 금세들려줄 거다. 저들의 좀 더 내밀한 속마음 말이지.>

챈들러 형빈이 살해당한 게 혹시상인 연합과 관련된 게 아닐까?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냐고 물어본다면 순순히 알려 줄까?

“.머리가 복잡해지는군.”

<뭐. 별거 있겠냐? 일단 호의를즐겨. 받을 거 다 받고, 누릴 거 다누려. 뽑아 먹을 거 다 뽑아 먹고!

나중에 뭐 부탁하면 그냥 거절해.

간단하지.>

<게다가 넌 아직 회원도 아닌데 뭐가 고민이야? 일단 다섯 개 다모으고 생각하라고.>

그건 맞는 이야기다.

상인 연합이 무슨 의도건, 지금걱정하기는 이르다.

게다가 당장은 집중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다.

“일단 알겠다, 아이작.”

‘루비아를 잠시 부탁한다.”

<뭐야. 이 야밤에 어딜 가려고?

수도 밤 문화를 즐기기엔 네가 좀부족한 게 많잖아.>

“T&T 쪽에 들러 봐야지. 애초에 수도에 온 목적이니까.”

아직 레나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루-륨 탈취에 관한 일이라면 극히 위험하겠지.

루비아와는 되도록 엮이지 않게하는 게 최선이다.

블랙베리가 소개한 고급 숙소니, 잠시 나갔다 올 동안 크게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겠지.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 아이작에게 말해 두는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놈도 의외로 루비아에게 정이 든 것 같으니까.

아이작이라면 웬만한 위기는 쉽게 막아 줄 것이다.

다만, 그가 직접 레나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할까 봐 걱정이었다.

<.좋아.>

하지만 아이작은 의외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얘랑 여기에 있을 테니까잘 듣고 와.>

“괜찮겠지?”

<그럼. 황실의 함정이라면 아마 첫만남부터 체크당하고 있을 텐데, 거기 끼어들기 싫다.>

그런 거였나.

<네가 뒈지면. 나는 이 녀석을 이용해 볼 생각이니까. 얘기나 잘듣고 와.>

의외로 순순히 보내 주긴 하는 게 다행이다.

아침까지 기다릴까도 싶었지만, 밤이 레나를 만나기에 적합한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만나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질주 Lv.7을 발동합니다!]

[500%의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24:59]

- 파앗!

[은신 Lv.6을 활성화합니다!]

[특전: 자취말소(C플러스) 적용]

수도의 밤을 달렸다.

바람 한 점 없었지만, 내가 워낙빠르게 달리는 탓에 공기는 비명을 질러 대며 갑옷 이음새 사이사이를 날카롭게 베어 왔다.

- 쌔애앵!

속도 자체에 고양된 몸이 점점 더빠르게 옥상과 옥상 위를 달린다.

100에 가까운 힘으로 발이 지면을 박차면 한 번에 서너 개의 건물을 뛰어넘기도 한다.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물체가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면 굉음으로 경비병의 주의를 사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역시 100에 가까운 높은 민첩으로 착지하는 데다, 희귀 등급은신 스킬 덕분에 별다른 소음은 나지 않는다.

- 팟!

근방에서 가장 높은 탑 위에 올라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시야에 들어오는 구역이 있었다.

저 즈음에서.

캐빈 애슈턴의 신문을 봤던 것

같은데.

그리고 레나가 일했던 샤루니안의 가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탐지 Lv.7을 발동합니다!]

이동하며 신경 써서 지붕과 지붕, 바닥을 세심히 뒤져 봤지만 역시 신문 따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기가 전혀 다르긴 하다.

그때는 지금으로부터 수개월 뒤.

레안드로 후작이 살해당한 뒤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발행되는 신문인지도 모른다.

황실에 점점 가까워지는지, 신문대신 골목 곳곳을 오가는 경비들의 기척만 느껴질 뿐이다.

‘하나 죽일까?’

공권력 파괴 퀘스트를 진행해 볼까싶기도 했지만, 굳이 하고 싶다면 수도를 떠날 때 해도 충분.

일을 끝낼 때까지 최대한 조용히 있는 게 낫다.

저쪽 즈음이었나.

갔던 곳을 찾는 데에는 생각보다시간이 약간 더 걸렸다.

전반적으로 수도는 지난번에 왔던 때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내가 찾고 있던 건물이 완전히

변해 버린 게 문제였다.

위치를 몇 번이나 돌며 확인했다.

처음에 왔을 때는 거친 자들이

드나드는 선술집.

레나의 손이 닿은 후에는 아가씨들이 드나드는 고양이 까페.

이번엔 그 어느 쪽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일부러 정체를 감춘 듯한 검은 벽.

문까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창문도 없다.

이런 게 길거리에 떡하니 있다니.

오히려 눈에 띄고 싶은 게 아닐까싶을 정도다.

게다가 딱 봐도 고급스러운 마차들이 가문 문장을 가린 채 차례로 문 앞에섰다.

‘주인이 바뀐 건 아니겠지.’

T&T 지부인 이곳은 나냐우의

비밀 통로와 연결되어 있다.

비밀 통로가 변경되지 않는 한

T&T가 소유권을 유지하고 있을 건 분명하다.

마차에서 내린 자는 초대장 같은것을 내밀었다.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한 채 얼굴을 반쯤 가리는 가면을 하고 있었다.

가드는 꼼꼼하게 초대장을 확인한 다음에야 문을 열어 손님을 들여보냈다.

‘.대체 뭐 하는 곳이지?’

당연히 초대장은 없다.

펜던트를 내민다면 들여보내 주겠지만, 일단 뭐 하는 장소인지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꽤 실력 있어 보이는 가드였지만, 당연히 내 은신을 꿰뚫고 알아볼정도는 아니다.

가볍게 문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감탄하며 주위를 이리저리돌아보았다.

건물 안은 바깥과 놀라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여러 층이었던 건물을 넓게 터서 천장이 무척 높았고, 테이블보다 큰상들리에가 공간 전체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지금이 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곳곳을 메운 조각상과 예술품들은 그저 공간 장식이 목적이라기보다실제로 대단히 높은 가치를 가진 물품들 같았다.

‘테이블이 셋.

가운데에 사람이 들어갈 공간이 있는 독특한 형태의 테이블이었다.

화려한 가면을 쓴 인간들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금화를 산처럼 쌓아 두고 있었다.

‘저건.

그들이 돈을 걸고 있는 건 내가 아는 유일한 게임이었다.

<너클 본>.

손가락 마디 뼈 다섯 개를 공중에 던진 뒤, 가장 많이 잡는 사람이 이긴다.

저들은 마디 뼈를 본 딴 나무조각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

하지만<납골당>을 지키던 시절, 인간들은 나와 다른 해골들의 뼈를 갖고<너클 본>을 하곤 했다.

이 던전은 너무도 시시했다면서, 선술집에서 살 독주 따위를 걸고 내기를 했던 것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지.’

어진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마스커레이드.’

투구를 벗고 자연스럽게 빈자리에 끼어들었다.

은신을 해제하자 게임을 주최하던 도박장 직원이 깜짝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새 손님이 오신 걸 못 봤군요.

마침 다음 게임을 시작하려던 참입니다. 얼마까지 거시겠습니까?”

- 툭.

“일단 이걸로 시작할까.”

품에서 펜던트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슬쩍 던졌다.

여기가 레나의 구역이라면 반드시반응이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빠지면 되는 일이다.

“흐읍.

직원이 눈을 크게 뜨며 숨을 들이켰다. 잘 정돈된 눈썹이 미묘하게 움찔거렸다.

“예약하신 분이셨군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은 주위의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나를 지하 회전문으로 안내했다.

회전문을 지나자 갑자기 풍경이 익숙해졌다.

청소 도구와 비품이 쌓인 커다란방이 나타났다.

- 드르륵!

문을 열자 레나와 헤어져서 혼자 올라왔던 계단이 보였다.

‘안쪽부터는, 기존의 건물을 남겨둔 건가.’

“본부장님! 그분입니다.”

직원이 계단 안쪽을 향해 말했다.

외관이 전혀 달라져 의아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틀림없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안내하던 직원은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깊이 숙인 뒤 돌아나갔다.

‘마스커레이드 해제.’

레나에게는 이쪽이 익숙하겠지.

- 저벅. 저벅.

괜히 계단을 하나하나 소리 내어밟으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 끼익.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나냐우 파의 T&T 고위 간부들이 회의하던 석실.

넓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인영이 보인다.

수없이 본 익숙한 형태다.

루-륨 확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온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반가움이 몰려왔다.

레나가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슬며시 올라온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내가 상상도 못 한 한 마디였다.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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