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생매장 (5)
나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 철컥.
몇 걸음이나 가 버렸는지, 차가운석벽이 등에 닿았다.
스승님이 라니.
그 호칭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마 기억이 완전히 돌아온 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멈춰 선 채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 그랬구나.”
미묘하게 변해 가던 레나의 표정이 확신을 두른다.
그제야 뒤늦게 깨닫는다.
시험해 본 거다.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 분명히 그렇게 만났었네.”
스승님이라고 불린, 나도 모르게 잠깐 멈칫한 그 순간 다 읽혔다.
“이 장소도 기억하나 보지? 다른 곳에서 헤매지도 않고 곧바로 와서 펜던트를 내민 걸 보면.”
레나가 한숨을 쉬었다.
따듯하게 데워진 피가 느껴진다.
그녀가 가진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어딘가로 숨겨진 것 같았다.
“주술에 걸렸다고 생각한 거 아닌가?”
“틀려. 나한테 이런 감정을 갖는 주술을 걸었다면.
레나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살짝저었다.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해야겠지.
하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있으니까. 꿈은. 진짜겠지.?”
나는 침묵했다.
레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거는 변경되었다.
꿈의 형태로 발현되는 옛 기억이.
그녀의 삶 어딘가에 들어갈 만한 자리는 없다.
당연하게도, 회귀를 짐작하는 것 같지는 않고.
바로 답하는 대신 그녀의 상태창을 열었다.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얻어 내는 게 좋다.
[이미 완료한 시나리오.]
[???반영되었습니다.]
[이름: 레나]
[호감도: 31]
변했다.
이번 생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레나의 호감도는 분명히 20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번 생에는 당연히 그녀와의 첫만남이었는데도 20이라는 꽤 높은 호감도로 시작했다.
레나 입장에서라면, 알지도 못하는 녀석이 이상하게 계속 신경 쓰이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더 심해졌다.
올랐다는 별도의 메시지조차 뜬 적없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31이라는 한층 더 높은 호감도를 보여 준다.
물론 능력치는 잔뜩 올라간 능력치그대로.
쉬운 추측이 떠오른다.
나와 접촉할수록 호감도가 점점 더높이 올라가 버리고, 그에 따라서 기억도 선명해진다는 것.
그렇다면.
어느 순간.
발렘할 수 없을 때가 온다.
예전 같은 관계가 되어 버리겠지.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잘 살고 있는 레나의 삶에 난입할생각은 없다.
“나는 일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
루-륨을 한 번에 크게 얻을 계획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을 돌렸다.
일부러 단호하게 잘랐다.
‘이번 삶’에서 나는 레나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바뀐 과거로 살아온 그녀의 삶을 착취할 생각은 없다.
“하아.”
긴 한숨에 담긴 온기가 허공으로 방울방울 사라졌다.
레나는 잠시 머리를 짚더니 결국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런 걸 원하면 거기 맞춰 드려야지.”
그녀의 시선이 나를 얽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에 대해 알아내기를 멈추진 않겠지만.”
뭘 얼마나 더 어떻게 알아내려고.
이 석실 어딘가에, 내 동선 따위를 세세하게 정리해 놓은 비밀 석판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쩐지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기분이다.
“탈취 계획을 알고 싶다.”
말을 돌리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정말 알고 싶다.
T&T가 세운, 아이작조차도 꽤나궁금해한 계획이 궁금하다.
대체 어떻게 침입하겠다는 걸까?
레안드로 후작마저 시체로 발견된그 비역^!.
아이작은 하늘, 땅, 지하가 전부 막혀 있다고 했는데.
레나도 계획 이야기가 나오자 조심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건, 일단 여기에 서약해야 알려줄 수 있어서.
- 스르륵.
레나가 서랍에서 얇은 가죽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램프 불빛 아래 비친 종이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완연한 백지.
“내용은 나중에 쓸 건가?”
“에이, 아무리 음지에서 살아도 그런 짓은 안 해.”
레나가 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기울이자 짙은 녹색이 아래로 쏟아졌다.
- 화르르!
가죽 종이에 바로 불이 붙었다.
불은 얇은 종이를 제물로 삼아
비명처럼 타올랐다.
하지만 넓은 석실을 데울 정도로 사납게 타오르던 불은 누르스름한 종이를 아예 그을리지조차 못했다.
대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던
텅 빈 종이에서 서서히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 사항을 준수.]
[???공개하거나 누설.]
[. 관한 사항.]
[2. .에.]
특수한 액체를 부어야만, 숨겨진 글자가 나타나는 종이.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있었다.
종이도, 잉크도, 액체도 모두 딱딱맞아떨어져야만 한다.
레나는 서랍에서 텅 빈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같은 방식으로 불이 붙으며 글자가 떠올랐다.
내용은 같다.
다만 그 아래, 레나의 글씨체로 <서약한다.>라고 적혀 있는 것만이 달랐다.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계획을 누설하지 않는다는 내용.
“누설할 경우는 어떻게 되지?”
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예 누설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참가자들 자신의 혼이 양분이 되어, 그 총량으로 서로를 구속하는 강한 서약이니까.”
“심지어 고문을 당해도 말하는 게 불가능해.”
“저항할 수 없다는 건가?”
“제약이 한정될수록 주술은 강해.”
레나가 말을 이었다.
“금제는<이 계획에 대해 알리지 않는다.>하나뿐이니까. 구체적이지.
강한 세뇌라도 걸려, 억지로 말하게 될 경우는 생명이 끊어지게 되고.”
그나마 다행이다.
죽음 후에는 끊어지는 제약이라는건가.
그래도 이번 생에서는 루비아나, 아이작에게 계획을 못 말해 주는 게 조금 걸리적거리지만.
“내가 서약을 안 한다면?”
“아쉽지만 당신을 점찍은 역할에 딴 참가자를 섭외해야겠지. 아무리봐도 당신이 최적이지만.”
내가 최적이라.
어떤 역할인지 더욱 궁금해진다.
어쨌거나, 상황은 분명하다.
서약을 하지 않으면 레나는 내게 계획을 말해 주고 싶어도 못 한다.
일단 빈손으로 돌아가는 게 좋은 선택은 아니다.
황실의 힘의 원천.
내가 이동시키면, 그 위치가 묘한 방식으로 변하는 물질.
‘전직’에 필요하다고 했던 액체다.
수도까지 왔는데 여기서 무르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펜을 들었다.
양피지 위에 서약한다는 말을 적어넣는 순간, 묘한 구속력이 보이지 않는 정신 어딘가에 단단하게 자리잡은 듯했다.
“이런 스크롤은 어디서 구했지?”
“시조가 모험을 다니며 유적 같은 데서 하나둘 모아 놨지. 애지중지 아끼던 물건인데, 워낙 큰 작전이니이것저것 잔뜩 내어놓은 거야.”
유적이 라.
내가 갔던 것 같은 캐빈 애슈턴의 유적이라도 털었나.
어딜 가면 이런 터무니없는 물건이 나오는 건지 묻고 싶어진다.
“나냐우도 참가하는 건가?”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체적인 조율자로서. 혹시라도 어디 구멍이 생기면 거길 나냐우가 메우게 될 거야. 물론, 잘해 주면 볼일 없고.”
나냐우의 힘은 알고 있다.
T&T 최강의 전력이 백업으로서
준비된 것이다.
서약서라고 준비한 종이만 보아도, T&T에서 얼마나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느껴진다.
“이후 빼돌린 루-륨을 조율하는 역할이기도 하고.”
“조율?”
“참가자들이 전부 루-륨 자체를 원하는 건 아니거든. 황금을 원하는 자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참가자는 얼마나 되지?”
“당신까지 포함해서 열 명. 하나씩 소개받을 생각은 없지?”
“그래.”
알려 주지 않는 편이 안심이다.
아무리 같은 참가자라고 해도, 쉽게 그 면면을 발설할 정도면 내 정보도마찬가지다.
“이해 고마워. 그럼, 먼저., 레나가 특이하게 생긴 열쇠로 석실한구석을 ‘끌어’당겼다.
- 쿠구궁.!
테이블 오른쪽에 놓인 석판이 위로 살짝 들리더니 천천히 움직였다.
“내려와.”
레나가 먼저 구멍 안으로 조금씩 다리를 집어넣었다.
아래로 향하는 사다리를 디딘 것 같았다.
“직접 작전을 실행할 곳에서 설명하는 게 좋겠지? 사전 탐사라고.”
- 철컥.
자연스럽게 사다리를 잡고 레나를 따라 내려갔다.
익숙한 장소다.
수도에 들어올 때도.
나갈 때에도 이 통로를 통했다.
나냐우에게 설명만 듣고서, 직접먼 거리를 이동한 적도 있다.
그 태도가 전해진 탓일까.
“익숙하네. 역시 아는 장소구나.”
“글쎄.”
레나가 나를 보고 다시 물었다.
“여기가 황실 비역과 연결된 것도 알고 있었던 거야?”
- 달그락!
나는 경악으로 걸음을 멈췄다.
“지금 무슨 소리를.!”
황실과 이 통로가 연결되었다고?
“어라? 그건 몰랐던 거야?”
먼저 바닥에 내려온 레나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천천히 다시 움직여 아래로 내려갔다.
어차피 숨기지 못할 경악이다.
굳이 억누를 필요도 없다.
“정말인가?”
“하핫. 재미있네. 너무 잘 들여다보여서 좋은걸. 역시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야.”
좋아하는 타입?
장난하자는 건가 싶었을 때.
레나는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벽 한쪽을
칼집으로 꾹 눌렀다.
- 드르륵!
벽에 아래위로 두 장의 지도가 걸린 큰 보드가 튀어나왔다.
위는 평범한 수도 전도全圖.
아래는 한눈에 봐도 지하 비밀
통로를 표시한 지도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모두 본 적있는 물건.
한데 두 번째 지도가, 분명 어딘가 예전과 다르다.
묘한 위화감이 든다.
오래지 않아 명확한 차이점을 짚어낼 수 있었다.
‘더. 넓어졌어?’
수도를 빠져나가기 전.
트로핀 나냐우는 지도를 보여 주며 구석구석을 짚어, 나가는 법을 무척자세히 설명했다.
<여기서 네가 지날 통로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레나가 지금 보여 주는 비밀지도에는, 나냐우가 보여 준 것에는 없던 통로들이 새롭게 그려져 있다.
“여긴 어디지?”
나는 새로 그려진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레나의 얼굴에 감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정확하게 짚었네. 거기가 바로 이작전을 짠 계기가 된 곳이야. 새로 발견한 구역이거든.”
새로 발견한 구역.
설마 루-륨을 레나에게 남기고 간사실이 새 비밀 통로 개척에 영향을 끼친 걸까?
혹은 시나리오 클리어로 인해 바뀐상황일지도.
어쨌거나, 이 새로운 상황에 내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명백하다.
루-륨 탈취 계획이라니.
책임감이 목 위로 걸터앉는다.
내가 변경시킨 과거.
새롭게 탄생된 계획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도를 가리키는 막대가 움직였다.
“이 통로, 수도 전체에 걸쳐 있어.
하지만 정말 지독한 미로라서, 무려시조마저도 새 부분을 발견하는 데엄청난 시간이 걸렸지.”
트로핀 나냐우가 새로 발견했다는 부분을 바라봤다.
“아직 좀 먼 것 같은데.”
붉은 동그라미가 크게 그려진 황궁영역과는 겹쳐지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 다고?”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로 발견된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황실이 전쟁 준비를 위해, 여기로 루-륨을 가지고 지나갈 거거든.”
전쟁 준비와 루-룸.
“둘이 무슨 상관이지?”
아이작은 나에게 루-륨이 황실이 가진 힘의 원천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확히 왜 그런지는 전혀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루-륨은 기본적으로 기계장치의 동력원이다. 첫 번째로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
자유 연합의 철인鐵人을 빼앗아서, 자신들이 움직이는 데 쓰려는 것.
내 추측에 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다른 식으로 쓰려고 하는 것 같아. 기사와 병사들을, 루-륨에 중독시키고 있는것 같거든.”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그게. 그런 식으로도 사용되는 액체인가?”
“시조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어.
그녀는 피의 형태로 루-륨을 사용했지만, 엠버는 기계장치의 원동력으로 사용하고 있잖아?”
생각해 보면, 그 둘은 전혀 다르다.
“폭발적인 힘을 내게 하는, 마약의 형태로 개발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했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루-륨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저번 생에 이런 정보를 접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 액체의 성격 자체가, 내 전생에 따라 달라진다는 가정은 무리수.
원래 그런 물질이라고 봐야 한다.
일반적인 인간에게 ‘주입’해 높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면.
기술력이 높은 연합을 침공하려는 황실의 자신감도 이해가 간다.
“어쨌거나 일회성 수송이 아니야.
이쪽으로 마차가 다니면서, 수송이 없을 때는 수색대가 다른 길을 찾고있어.”
그녀의 말투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뭘 걱정하는 건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희가 이 통로를 쓰는 걸 황실이 모르나?”
“아직은. 하지만 머지않아 우리 쪽으로 침범해 버릴 가능성이 높아.”
T&T의 비밀 루트를 황실이 점거하는 건, 그저 내키지 않는 정도로 끝날 일은 아니다.
맞부딪칠 경우 힘에서 어느 쪽이 우월할지는 굳이 대보지 않더라도 명백한 일.
“그냥 루-름을 탈취하기 위해서 벌이는 일은 아니야. 우리는 새로 발견한. 이 지역을 아예 무너뜨릴필요가 있어. 깜깜한 암흑 속에 다묻어 버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