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생매장 (6)
T&T는 단순히 루-륨을 탐내서
이 작전을 실행하는 게 아니다.
길드의 존망이 걸린 ‘통로 폐쇄’.
황실이 본진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하니까.
나냐우만 봐도 알 수 있다.
참가자의 면면은 만만치 않다.
“여기서부터 ‘미로’야.”
레나의 안내를 따라 한참을 걷고, 또 걸었을 때.
그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으로 눈을 가린 남자가 거미줄에 걸려 있다.
전면 벽에 양각으로 새겨진 그림.
꽤 세밀한 그림이다.
슬쩍 올라가 있는 남자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느껴진다.
“좁아지니까 조심해. 발밑도 울퉁불퉁하고.”
빈말이 아니었다.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도 넉넉할것 같던 통로는, 그 직경이 1/10정도로 급격히 좁아졌다.
고작 인간 서넛 정도가 그럭저럭지나갈 정도였다.
바닥도 고르지 못했다.
“구멍도 있다고.”
입을 쩍 벌린 공간이 많다.
아래로 떨어지면 어디로 가게 될지 알 수 없다.
빛은 한 점도 없다.
그저 레나가 손에 든 작은 횃불에 간간이 벽이 비칠 뿐.
“악어가 많지?”
벽에 새겨진 악어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움직인다.
실제 악어보다 훨씬 더 크다.
벽은 좁고.
그런 까닭에,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통로와 천장에 걸쳐 새겨진 모습이 무척 기괴하다.
“물이라곤 전혀 없는 지하 아닌가?
그런 곳에 악어 조각이라니.
“에이, 그렇지도 않아.”
그렇지 않다고?
의문을 표하기도 전.
레나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여기야.”
횃불이 눈물 두 방울을 막 흘리는 악어를 비추고 있다.
- 끼긱.
그림 눈 밑으로 날카롭고 긴 칼이 들어갔다.
그녀는 눈을 파내듯이 칼을 그대로 들어 올렸다.
- 끼기긱. 쿠구구.!
- 쿠구궁.!
악어가 새겨진 벽이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양쪽에, 눈먼 독사들이 입을 벌린 벽이 새롭게 나타난다.
늪을 모티브로 한 미로인가.
- 쿠구구. 쿵.
움직임이 멎고.
앞에는 샛노란 팔찌를 손목에 찬조각상이 움푹 파인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샛노란 황금 팔찌.
하지만 손댈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거대한 팔찌에 몇 번이고 거듭해서 응축된 전기의 힘이 느껴진다.
“저거. 지금은 못 가져가.”
레나가 포기한 황금이다.
눈독 들여서 좋을 게 없다.
맞는 순간 뼈가 가루가 될 정도의 전격이 뿜어져 나올 거다.
“그냥 지나가지는 못하겠는데.”
아래를 보자 묘한 문양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탐지 스킬을 발동한다.
결과는 놀라웠다.
이 무슨.
앞쪽 전체가 함정이다.
“길이. 있기는 한가?”
“첫 번째는 몸으로 감당해야 해.”
- 터벅.
말릴 사이도 없이, 레나가 앞으로 한 걸음을 디뎠다.
바닥에서 솟아난 가벼운 전격이 레나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후우.”
그녀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살짝훔쳤다.
피와 살을 가진 몸으로 이런 걸 앞장서서 받아 내다니.
“.말을 하지 그랬나. 내가 했을텐데.”
“아니야. 내가 안내자인걸. 이제앞, 왼쪽, 다시 앞으로.
조각상을 코너에 두고 함정 영역을 지난 순간이었다.
- 파지지지지직!
황금색 팔찌에 걸린 빛이 사방으로 강렬하게 방전됐다.
원래 보이던 것보다 수십 배는 더환한 빛에 휩싸이며, 벽을 따라서 전격이 퍼졌다.
어둡고 좁은 통로를 번개가 깨물며 환하게 밝혀냈다.
- 치직.! 파지지직.!
번개가 친 길을 따라 통로 벽은 이미 쩍쩍 금이 가고 깨져 있다.
팔찌가 빛을 잃었다.
조심스럽게 앞을 바라본다.
앞쪽에는 까맣게 그을리고 부서진 해골들이 널려 있었다.
제대로 스템을 못 밟았으면, 빛이 그대로 우리에게 퍼부어졌으리라는 사실은 명백해 보였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하나하나를 그대로 기억에 담으려애썼다.
번개가 터지는 길까지.
처음 보는 미로다.
지금은 레나의 안내를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음’에 왔을 때는 혼자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빼놓지 않고 모두 살펴보았다.
높은 지혜 스탯을 가진 덕분일까.
한 걸음, 한 걸음.
머릿속에 빠지지 않고 길이 담기고 있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쓰러지고 부서진 조각상들이 놓인 광장이 나타났다.
목 주위에 무성하게 털이 난 쥐와, 늑대의 몸을 한 올빼미의 조각상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발레포르. 아몬.?’
고위 마왕의 상징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각상들은 대부분 여기저기가 뻥뚫리고 날아가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잘 정비된 비밀통로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공간.
광장은 세 방향으로 적막하게 뚫려있다.
탐지 스킬은 아까부터 계속 쓰고 있었지만, 어디를 선택해야 좋을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이 미로는 나냐우가 뚫은 건가?”
“그렇지. 쉽지 않았다고 했지만.”
“나냐우가 쉽지 않을 정도라면.
황실에게 뚫릴 걱정은 조금 덜 해도 되는 거 아닐까?”
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시조는 탑주塔主급 마법사라면 큰위험 없이 돌파할 거라고 예상했어.”
“황실이 그런 마법사를 섭외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고.”
이런 미로를 발견한 이상 황실이 그대로 놓아둘 거라는 건 지나치게 안이한 생각이라고 말을 이으면서, 레나는 순서대로 아래를 밟았다.
- 펑!
올빼미의 부리에서 시커먼 독연이 터졌다. 연기는 여기까지 닿지 않고 벽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 치이익
벽이 부식되고 있다.
트랩 없이 미로만으로도 어디가 어딘지 도저히 모를 수준인데, 저런지독한 함정까지 도처에 깔리다니.
고대에 만들어진 ‘미로’는 다 이런수준일까?
차라리 여기에 살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아무도 모르는 지하 미로 깊숙이.
확실히 방해받지 않기에는 좋을 것 같기는 한데.
통로를 만들었다는 고대인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씩 더 솟아오를 때.
一 치이이익.
연기가 전부 빠졌다.
이제 보니 벽이 너덜너덜하다.
“.이제 가자.”
레나가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뻥 뚫린 올빼미 조각상의 눈을 지나서 천천히 걸어갔다.
같은 악어 문양이 새겨져서 어디가 어딘지 구별되지 않았다.
모든 벽이 미로인 곳에서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발을 디뎠다.
- 파각!
- 피비비빗!
독침이 쏟아지고.
냉기가 땅에서 솟아난다.
자잘한 함정이 레나의 손에 하나씩 무력화되고 있다.
한두 번 걷는 길은 아닌 것 같다.
귀찮다고 다 부수고 갈 수 있는 통로는 아니다.
이 많은 트랩들을 그냥 맨몸으로 받아 내기는, 심지어 레안드로 녀석정도라도 확실히 무리겠지.
길은 계속 좁아진다.
- 데구르르.!
발에 차인 작은 돌 하나가 아래로 굴러갔다.
경사가 있다.
“높은 곳으로 가는 건가?”
“그렇지.”
곧 길인지도 뭔지도 알 수 없는, 녹아내린 바위들이 사방에서 잔뜩우리를 맞이했다.
둘이 몸을 붙여야 할 정도로 길이 좁은데, 기묘하게도 높이는 갑자기 꽤 높아진다.
“여기야.”
레나가 지도를 꺼내어 가리켰다.
“새로 발견했다는 지역인가.”
“응. 비밀 통로치고는 좀. 좁지?
환풍구야. 터널에는 꼭 환풍구가 있어야 하거든.”
레나의 설명이 이어졌다.
황실이 루-룸을 옮기는 것은 바로 이 아래의 통로.
계획은 이러했다.
수송대가 지날 때, 환풍구를 통해 아래로 수면 가스를 배출한다.
- 철컥.
그녀가 바닥을 눌렀다.
- 지이잉!
바닥에 은은한 불빛에 들어오며, 작은 소리와 함께 자동으로 아래로 툭 열렸다.
슬쩍 들여다본 아래쪽에서 비밀통로의 야광주 빛이 새어 나왔다.
처음 들어오면서 봤던, 넓은 비밀통로의 모습이다.
“저 위에도 이런 구멍들이 있어.”
레나가 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두 번째 폭탄은.
이 환풍구에서 터트린다.
“감응하기 쉬울 정도로만.”
“감응이라고?”
“응. 대부분의 폭탄은. 여기에서 터트릴 거야.”
레나가 수도 전도를 폈다.
“여기가 바로 통로 이 지점이고.
수도 전도 쪽에는 작은 산이 하나놓여 있다.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이 그 산의 꼭대기를 가리켰다.
“우리는 산사태를 일으킬 거거든.
준비는 완료됐어. 전문가가 완벽히 계산을 끝내 놨지.”
“폭탄으로 산사태를 일으킨다고?
그게 말이 되나?”
“나야 세부 사항은 들어도 모르지.
어쨌건 기술적으로는 믿을 수 있는 녀석이니까.”
그 말대로라면, 인공적으로 일어난
‘산사태’가 터널의 한 지점으로 쏟아진다.
‘코끼리도 재울 만한’ 수면 가스와 함께 이런 걸 당하면 꼼짝없이 묻힐수밖에 없으리라.
그야말로.
하늘이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겠지.
“여기서 당신 역할이. 중요해.”
나는 긴장했다.
“내부자가 활약하겠지만, 완벽하게 타이밍을 맞추려면 현장에서 누군가 길을 가로막아야 할 필요가 있어.”
“그게 나인 거로군.”
레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이라면, 토사와 수면 가스에 매장당해도 죽을 위험은 없으니까.”
“루-륨은?”
유리병 안에 들어 있다면 산사태에 온전할 리가 없다.
“단단한 금괴 안에서 운반될 거야.
손상 걱정은 없어.”
하지만 흙 속에 묻힌, 어느 정도 크기인지도 모를 금괴를 내가 꺼내갈 수 있을까.
마치 내 걱정을 읽은 듯이 레나가 아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곧바로 2차 폭파가 있을거야.”
“바닥을 터트린다고?”
“응. 이 아래쪽은 거대한 지하수의 맥이 흘러. 어마어마한 양이지.”
설명이 이어졌다.
시체들과 루-룸 금고.
그 모두가, 격렬한 지하수에 쓸려준비된 장소로 나오는 계획.
토사와 물에 모두 쓸려 나올 테니대기조는 그물만 쳐서 잡는다.
“산 채로 나오는 것들은, 거기에서 다 죽일 거고.”
놀라운 준비다.
“당신은 뒤쪽 통풍구로 올라오면 되지만, 그냥 지하수에 몸을 맡겨도 괜찮아.”
레나가 내 옆으로 몸을 붙였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두 팔이 옆에서 허리를 감았다.
몰아붙여지는 기분이었다.
- 끼긱.
그녀가 단검을 들어, 기습적으로 내 갑옷에 작은 표식을 새겼다.
갑작스럽게 몸을 붙여 온 탓에 뭐라제지할 틈도 없었다.
강철을 어렵지 않게 긁을 정도로 날카로운 칠흑의 단검이 루비아가 사 줬던 갑옷을 긁어 냈다.
“당신이 떠내려와도, 대기조에게 공격당하지 않는 표식이야.”
표식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유사시에 잠깐 버티는 것밖에 없다는 건가.
“나 혼자만 간단한 역할을 맡은 것 같은데.”
각도를 계산해서, 무려 산사태를 일으키는 역할라든지.
떠내려오는 호위들과 싸우게 될 대기조에 비하면, 내 역할은 있으나없으나 별 차이도 없는 게 아닌가.
“글쎄?”
레나가 픽 웃고는 말을 돌렸다.
“호위대가 지날 때, 바닥을 밟으면 자동으로 가스가 뿌려질 거야. 그게 뿌려지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거니환풍구를 통해 뒤로 빠져. 시조가 나와서 일을 처리할 거야.”
게다가.
‘정말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아예 트로핀 나냐우가 나타난다.
지나치게 쉽고, 간단하다.
“호위는 어떤 자들이지?”
레나가 품에서 목록을 꺼냈다.
스무 명 정도.
붉은 동그라미가 쳐진 이름 셋이 눈에 띄었다.
“먼저, 마법사 알로히스. 셋 가운데 가장 주의해야 할 녀석이야. 하지만 화염 마법에 특화되어 있지.”
“화염이라면.
“그래. 선택이 잘못됐어. 터널에서 불 질러 봐야 자기들만 손해지.”
좁고 긴 공간에서 불이 이동하며 같은 편을 다 구워 버릴 거다.
“안 그래도 산소가 무척 부족한데, 불까지 지르면 질식해 죽자는 거지.
그러니. 전투 마법사 알로히스는 정작 이 터널 안에서는 무력해.”
확 불 질러 주면 우리야 편하지만, 이라고 말하며 레나는 다음 이름을 가리켰다.
“통찰의 브헤가스. ‘등록된’ 특정한 존재들을 인식할 수 있지.”
“등록?”
“황실은 주의할 만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등록’하게 만들었어.
가면을 쓰거나, 마법으로 위장하고 있어도 소용없어.”
“등록된 녀석들은 브헤가스 앞에서 모두 간단히 정체가 인식되어 버려.
아는 녀석이 수상한 짓을 했다간 곧황실도 알아차리는 거지.”
“나는 상관없겠군.”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참가자들 가운데 오로지 당신만이 ‘등록’되지 않은 상태야.
그리고 제정신인 녀석들 앞에 서는 유일한 역할이지.”
나는 납득했다.
T&T가 루-름 탈취의 흑막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버리더라도.
발각이 느리면 느릴수록 좋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유령들이 따라올 거야.”
“.뭐라고!”
나는 깜짝 놀랐다.
유령들이라고?
이 세계선의 T&T.
레나가 처음부터 본부장인 T&T는 황실 유령의 존재마저 아는 건가.
“어라?”
그녀는 몸을 떨어트리지 않은 채 나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설마 유령에 대해서도 알아?”
“아니, 그냥. 유령이 따라온다는 말이 신기해서다.”
“로랑스 공작 직속의 무리들이지.”
“로랑스. 공작?”
놈이 그런 이름이었나.
“로랑스 폰 타르티에. 로라라고 불러 달라는 미친놈이지. 그런 걸 원하면 아래쪽을 자르면 될 텐데, 그건 또 싫다나.”
“양쪽의 쾌감을 빠짐없이 꼭 누려야 한다고 하더군. 수도 돼지들은 놈을 욕심쟁이라고 부른다.”
정말로, 그런 걸 알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유령의 수장.
그 공작이라면, 내가 봤던 녀석이 틀림없다.
설마 녀석을 상대해야 되는 건가?
흙 정도를 못 뚫고 나올 상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잠깐이라도 막을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그 공작이 따라오는 거냐?”
“놈이 개입했다면 이 계획은 아예시작하지도 않았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건 확인됐어.”
레나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살짝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유령들이 비밀 통로에 붙어서 다행이야. 이들이 아니면.
3검주가 대신 지하에서부터 따라붙었을 테니까.”
“3 검주?”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이름은 말해 주지도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유령들이 타르티에 공작의 명만 받는 게 불쾌하다며, 3검주는 루-륨이 나오는 외부 통로에서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야. 거기서부터 동부까지는 그 녀석이 담당할 거고. 직접 싸우게 되면 일이 너무 커지고. 그러니 탈취는 반드시 이 지하 통로에서 이루어져야 해.”
레나의 설명은 끝났다.
잘 짜인 계획이다.
어차피.
비밀 통로의 구조나 다른 참가자의 면면도 모르는 내가 허점을 찾는 게 어불성설.
그냥 레나를 믿고 가는 거다.
이 계획은 성공할까?
나는 손에 쥔 펜던트를 바라봤다.
‘판단 시행.’
[현재 설정:<사망 및 그에 준하는 위기 시 자동 발동>]
[설정을 변경하시겠습니까?]
[발동 후 7일 동안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사용되는 능력:<위기회피(B)>]
[설정을 변경하시겠.]
‘변경하지 않는다.’
실패할 계획이라면.
펜던트는 진작 경고를 보냈을 터.
하지만 아무런 메시지도 없다.
역시 완벽한 계획인가.
비로소 안심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