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생매장 (7)
“아, 신분증 필요하지?”
레나가 손을 내밀었다.
횃불에 비친 팔 그림자가 천천히 흔들린다.
그 끝에는 두 장의 신분 증명패가 쥐어져 있었다.
마치 당연한 걸 가져왔다는 듯한 태도에 내 쪽이 말문을 잃고 패를 바라봤다.
검은색 상아에 붉은 글씨가 새겨진 신분증이다.
그곳에 새겨진 ‘내’ 정보를 보면서 생각했다.
언제 이런 걸 준비했을까?
“받아. 작전 이전까지는 일단 이신분으로 생활하고 있어.”
“하나가 아니군.”
“그 아가씨와 같이 왔을 테니까, 당연히 두 개가 있어야지.”
티 파티의 건도 있다.
루비아가 임시로 쓸 신분증 제작을 레나에게 부탁하려고 했다.
그런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제공해 준 거다.
새삼 놀랍다.
내가 온다고 확실히 알 수 있었던 상황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뭐야, 갑자기 왜 말이 없어?”
“.네 준비성에 놀랐다.”
“이런 건 기본이지. 딱히 일부러당신을 위해서 제작한 건 아니니까착각하지 마.”
“그렇다면?”
“우리는 정보 길드잖아. 언제든지 쓸 수 있게 갖춰 놓은 여분일 수도 있고. 너무 감동할 건 없다고.”
뭔가 화법이 좀 이상하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미리 준비해 준 데에서, 레나의 세심함과 배려가 느껴진다.
능력치나 신분은 바뀌더라도.
존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본질은 그대로라는 걸까.
나는 다른 신분증 하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라티아. 백작 영애?”
그런 정보가 새겨져 있다.
“응.”
레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신분이랑 딱 맞잖아?”
놀랍다.
어느새 루비아에 대한 조사까지 끝내 놓은 건가.
황야의 먼지를 아무렇지 않게 뒤집어쓰며 달려온 탓에 나도 가끔 깜빡하지만.
레이 루비아는 엄연히 백작 작위계승권을 가진 귀족이다.
흠칫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투로 또 다른 패를 읽었다.
“기사 아메리타트라.”
“이름 특이하지? 내가 지었어.”
“그라티아는? 그것도?”
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실제 있는 백작가야. 동부 산맥변두리에서 광산을 운영하고 있는 가문인데, 우리들의 손안에 있는 녀석들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가.”
“내가 지어 준 이름이니 잘 기억해두라고, ‘아메리타트’ 씨.”
“.정말 고맙다.”
이거라면 루비아도 쉽게 티 파티에 참석할 수 있겠지.
“근데,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네?
뭐가 그렇게 기뻐?”
그녀는 또다시 내 감정을 금방 읽어낸다.
기쁘달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왔던 인간이 티 파티에 가고 싶어 했었다.”
나는 ‘그라티아 백작 영애’라고 새겨진 가짜 신분증을 슬쩍 들어보이며 말했다.
“이거라면 되겠구나 싶어서.”
물끄러미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고마움을 표했는데, 어찐지 몹시미묘한 표정이다.
“?"그래서 좋아했구나.”
어조도 무척 미묘하다.
대답을 잘못한 걸까?
“.티 파티 좋지.”
차갑다.
그늘이 느껴진다.
이건 위험하다.
좋아했던 이유를 밝히면 절대 안됐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 뚜두둑.
가볍게 뼈 꺾는 소리.
내가 내는 건 아닌데.
어떻게든. 수습이 필요하다.
“고마워. 티 파티가 아니라도. 요긴히 쓸 수 있는 이런 증명서를 준비해줘서 정말 기쁘군. 지어 준 이름도마음에 든다.”
“ TT , ,
고.
레나는 새침하게 웃었다.
“노력은 해서 좋지만.”
그녀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시선의 끝이 나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콕콕 찔러 온다.
“아, 이걸 말해 줘야지. 작전에서 당신 몫은 10%야.”
레나가 입에 뜻 모를 미소를 엷게 머금고 말을 이었다.
“열 명이 참가하거든. 각자 몫을 나눠 가지는 거지. 500리터 정도가 금고 하나에서 이송되니까, 당신 몫은 50 리터.”
50리터.
정말 어마어마한 양이다.
10%라는 배분에도.
총량에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이건 거저먹는 일에깝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맡을 역할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일이다.
정보 입수부터 계획 수립.
산사태를 일으키는 폭파 따위의 주요실행과, 내부자 제어나 최후 물품회수 같은 어려운 일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10%.
레나가 아니었더라면 이 작전에 참가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존재조차 몰랐겠지.
결국 회귀 전 그녀의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데 이어, 루-룸 몇 병을 남긴 게 이런 변화를 만들었다.
50리터라.
다시 생각해도 짜릿하다.
그라스미어 지하에서, 골렘들을 쓰러트리고 얻었던 루-룸의 무려수십 배나 되는 양.
루-룸을 찾아다녔던 날의 보람이 진하게 느껴진다.
과거가 얼마나 변한 걸까.
아니.
구체적으로, 내가 남긴 루-륨이.
<시나리오 클리어>가.
레나라는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을까.
더 자세히 확인하고 싶어졌다.
좋은 질문이 떠오른다.
“혹시.
“응?”
“이런 슬라임을 알고 있나?”
나를 빤히 바라보는 레나를 향해물었다.
칼끝으로 바닥에 적당히 슬라임의 생김새를 묘사했다.
T&T 견습 단원이었던, 레나가
접촉할 수 있던 유일한 정식 단원.
보육원장 슬라임.
믿을 만하다고 했던 녀석.
불신의 상징 같은 레나가, 자신의 아끼는 동생마저 맡겼던 상대다.
하지만 이미 본부장에서 시작하는 시점이라면.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너무 툭 던지는 질문인가 싶기도 했는데, 레나가 입을 열었다.
“.알지. 당신, 대단하네. 그자도 알고 있고?”
그자라.
첫 번째로 만났을 때의 레나와, 아무래도 ‘보육원장’ 슬라임에 대한 태도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녀의 말투에서, 예전과 같은
신뢰와 존경은 느껴지지 않는다.
“상당히 까다로운 녀석이야.”
뭐랄까.
인정하고 있는 적.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느낌만이 있을 뿐.
“강한 용해 능력에다, 웬만한 곳은 자유자재로 스며들 수 있어서 큰골칫거리인.
나는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결과의 변경으로.
그에 따르는 과거까지 완연하게 바뀌어 버린 것이다.
T&T 본부장 레나가 있을 수 있게 만드는 완전한 별개의 ‘세계선’.
그게 여실히 느껴진다.
게다가, T&T 자체도 ‘예전’만큼푸르손의 영향하에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나우파의 세력이 더 커진 것도 명확해 보였다.
“그럼 길드에는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거지?”
보육원을 통한 게 아니라면.
“굶주리던 나와 동생을, 시조가 어릴 때 발견하고 길드에 들어오게 해 줬어. 그렇게 쭉 키워진 거지.”
은혜를 입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레나의 수완으로 T&T가
입은 혜택이 컸겠지.
달리아크에서 나를 태연히 납치할만큼 녀석들의 영향력이 커진 데는 분명 레나의 활약이 있었을 거다.
그녀 한 명의 삶에 이어, 주위의 세계까지 꽤나 바뀌어 버린 셈.
만약 이런 회귀를 반복하다 보면.
이상적으로 여기는 세계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세계의 변혁을.
아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일단은.
“동생은 잘 지내나?”
“의외로 자세하게 묻잖아? 나한테 관심 가져 주니 좋네. 별로 없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
동생도 별문제 없이 잘 자라는 것같다.
“그렇게 좀 물어봐. 가족 관계나, 취미 활동 같은 거. 어떤 색깔이나 날씨를 좋아하냐고 물어도 되고.”
으음.
레나가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사실 묻고 싶은 건 다른 것.
“혹시.
“또 뭐야? 얼마든지 물어.”
“어렸을 때 루-륨이 든 병 따위를 접한 적은 없나?”
내가 레나에게 전해 주고 간 액체.
그게 어떤 식으로 ‘회귀’ 이후에 전달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레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슬쩍 고개만 저을 뿐.
“응? 루-름 병? 전혀 없는걸.”
숨기는 기색은 없다.
여기까지 와서 레나가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사실 살면서 뭘 찾아낸 건 별로 없어. 내 주요 업무는, 던전 탐사가 아니라 운영이랑 기획 쪽이거든.”
다들 그게 엉망이야, 라며 레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다면 내가 레나에게 건넸던 아홉 병의 루-륨은.
레나의 미래를 바꾸는 값으로 이세계선에서 사라졌다.
예전 생에서 아이작이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원래리면 발휘할수 없는 함을 루-륨을 사용해서 발휘한다.>
<변혁의 질료로 쓰일 때 비로소 기화하는 거다. 가만히 보존되어 있는데 그 양이 변하진 않아.>
아이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계 변혁의 질료로 사용되면서 사라졌다는 걸까.
레나 ‘시나리오 클리어’의 결과를 한층 더 극적으로 변경하면서.
“하핫.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어.”
그녀가 내 팔을 옆에서 다시 꼭잡으며 말했다.
“며칠 뒤에, 나랑 답사 한 번 더하자. 괜찮지? 한 번으로 끝내면 쓸쓸하잖아.”
“.좋아.”
“내가 접촉할게. 정확한 날짜와 시간도 그때 알려 줄 거고.”
이의는 전혀 없다.
레나가 확신하는 계획이다.
어련히 잘 준비했겠지.
“슬슬 밖으로 나가 볼까?”
레나가 높은 천장을 가리킨다.
어느새 긴 밧줄이 하나 늘어져 있다.
비밀 통로가 아니라 환풍구 위로?
“조금 위험하지 않나.”
“여기가 바로 무너뜨리는 그 산위야. 외곽이라 사람도 없어.”
잠시 머뭇거렸지만.
레나는 이미 내 팔에 밧줄을 감고 있었다.
이 무슨.
“가자. 수도의 밤을 보여 줄께.”
이미 봤지만.
- 파르록.
뭔가를 조작한 걸까.
팔을 묶은 밧줄이 위로 느릿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레나는 옆에 내려와 있는 또 다른 밧줄을 잡은 채로 상승.
중간 지점의 도르래가 보였다.
- 철컹.
밧줄이 천장 부근까지 올라가자 자동으로 동그란 문이 열렸다.
저 작은 틈으로 어떻게 이 많은 달빛이 쏟아지는지 신기할 만큼, 환풍구가 환하게 밝아졌다.
먼저 올라간 레나가 내 손을 잡아위로 끌어올린다. 달은 부서지거나 이지러지지 않았다.
“만월이네.”
하얀 달빛이 갑옷 틈 사이사이로 차곡차곡 내려앉았다.
“이런 날은 웨어울프들이 부러워.
제대로 달에 취할 테니까.”
단순히 물빛 달을 아름답게 여길뿐만 아니라, 만월 시기에 그들은 실제로 전투력이 수직 상승한다.
물론 레나도 알고 있을 터다.
잠자코 그녀를 따라서 달을 올려봤다.
“이 산을 무너뜨릴 거야.”
레나가 가까이 있는 이산을 손을 들어 가리켰다.
달빛의 질량은 높이 쌓인 흙보다무거운 건지, 자꾸 흙 사이로 숨고 흙 아래로 흘러내렸다.
나무 하나 없는 야산의 흙과 돌을 바라봤다.
“산사태 나기 딱 좋다더라.”
레나는 이리저리 나를 안내했다.
작전이 실행되는 비밀 통로와.
그 위쪽 지상이 점차 입체적으로 와 닿고 있었다.
조금씩 새벽빛이 밝아 올 때 즈음.
“내가 또 연락할게!”
레나는 안내를 마치고 수도 쪽 골목으로 혼자 걸어갔다.
그녀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실점 같았다. 있는 줄도 몰랐던 추위가 느껴졌다.
텅 빈 거리에서 멈칫거리다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 드르륵!
안쪽에서 날 보고 있던 아이작이 창문을 열었다.
무심코 거기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창문을 확 열면 루비아가 깨는 거 아니냐.
<실컷 놀고 이제 와서 뭘 그렇게 걱정하는 척?>
내가 뭘 어쨌다고.
일하고 온 것뿐인데.
<근데 뭐 이런 제약을 달고 왔어?
자율규제라. 뭔 수상한 각서 같은 거라도 썼냐?>
“역시 알아차리는 거냐.”
<어. 그리고 흙 묻었다.>
- 까강!
아이작이 갑옷 정강이 부분을 콱부리로 찍었다.
혼자 들으러 갔다고 삐진 건가.
묘하게 공격적이다.
<갑옷에 슬쩍 표식까지 새기고.
야, 너네 땅굴 팠냐? 이제 와서 파는건 아닐 거고, 이미 있는 걸 쓰나본데.>
몸이 이완됐다.
반응이 침식되고 있었다.
그렇다, 혹은 아니다, 라는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흐흐. 굳이 무리 안 해도 된다.
밖으로 나올 때 빼앗는 거네. 언제어디인지도 아나 본데. 나나우가 그사이 많이 컸네. 수완이라고는 없는 녀석인데 정보력이 대단해.>
이게. 이렇게 알기 쉬운 건가?